741화. 장변(臟變)
한참 후에야 석목은 몸의 기력을 회복했다.
석목은 망가진 구룡쇄금갑을 거두어들이고는 하얀 화염을 둘러 말라서 굳어버린 빗자국과 먼지를 전부 깨끗이 지웠다.
몸에서 번지던 불이 꺼지자 석목은 새 옷을 한 벌 꺼냈다. 그리고 이제 막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는 순간 가슴의 토템 문양이 사라진 걸 보았다.
“구수흉망의 수혼이 자폭을 해서 나를 지켜주었군.”
석목은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옷을 입은 후에 석목은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단약 몇 개를 입에 집어넣고는 선급 영석 두 개를 꺼내 빠르게 회복했다.
석목은 눈살을 찌푸렸다.
토템의 힘이 번개의 힘에 맞서 부서진 후, 영해도 손상을 입은 것이었다. 하지만 심각한 건 아니었기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석목은 빠르게 선급 영석의 영력을 전부 빨아들이자 ‘퍽!’ 소리를 내면서 회색으로 변한 영석이 깨져버렸다.
진기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에 석목은 또 다른 선급 영석을 꺼냈다.
영석 몇 개가 전부 회색으로 변한 후에 석목은 의식적으로 영석을 더 꺼내려했지만 이미 영석을 전부 써버리고 없었다.
석목은 쓴웃음만 나왔다.
다급한 상황에서 번천곤에 영력을 보충하기 위해 석목은 절제 없이 영석을 사용해 이제 선급 영석을 전부 써버려서 단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다.
선급 영석 뿐만 아니라 최상급 영석과 상급 영석마저 모두 써버렸다.
지금 석목에게는 하급 영석과 중급 영석만 남았는데 이런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깊은 구덩이를 훑어보았다.
방금 전엔 너무 혼란스러웠기에 번천곤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낭패를 보지는 않았을 텐데 결국 토템 비술을 날리는 대가로 목숨을 지킨 것이었다.
석목이 다시 번천곤을 찾으려 할 때,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끝이 아니라니……”
곧 하늘이 어둡게 변하였으나 이 어둠은 잠깐 사이에 사라져버리고 흑백이 반으로 정확히 나뉘었다.
석목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동쪽과 서쪽 하늘에 각각 기괴하기 짝이 없는 구름 덩이들이 나타나 빠르게 밀려오고 있었다.
이 두 덩이 흑백 구름은 마치 살아숨쉬는 듯이 끊임없이 들끓었으며 그 속에 번개를 번쩍이고 있었다.
석목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흑백 구름은 이미 머리 위로 몰려왔다.
더욱 의아한 것은 두 덩이 흑백 구름이 한참 들끓은 후에 서로 얽히고설켰지만 합쳐지지 않고 점점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때, 흑백으로 반씩 갈라졌던 허공이 얼룩덜룩 뒤섞이며 깜빡거렸다.
석목이 실눈을 떴다가 다시 천천히 눈을 감자 몸에서 금빛 파동이 줄줄이 퍼져나갔다.
석목은 한 손을 옆으로 내밀어 다섯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는 허공을 잡았다.
공기 속에서 윙윙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석목 가까이에 놓인 부서진 돌들과 흙이 파헤쳐지더니 번천곤이 그 속에서 튀어나와 금빛으로 변하여 다시 석목의 손으로 날아갔다.
번천곤이 석목의 손에 들어오자 곤봉에 새겨진 문양이 줄줄이 밝아지며 눈부신 금빛이 그의 몸에 번져 금색 갑옷을 입은 신처럼 비추었다.
이때, 비경이 다시 어두워졌다.
석목이 주변을 훑어보니 모든 것은 원래의 색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전부 흑백 두 가지 색으로 변하였다.
몸을 날려 구덩이 밖으로 날아 나와 보니 비경 속은 석목이 들고 있는 번천곤만 금빛을 반짝일 뿐, 천지가 전부 흑색과 백색으로 변하였다.
쾅!
이때 짓눌린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늘에 뜬 흑백 구름 속에서 용이 울부짖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검은 구름이 터져버리며 두 갈래 흑백 번개로 뭉친 교룡이 그 속에서 튀어나와 번개를 감은 채 석목에게로 내려왔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두 갈래 흑백 교룡이 풍기는 기운은 어떤 본원의 방대한 기운을 머금고 있어서 모든 것을 파멸시킬 기세였다.
석목은 다시 옆에 서 있던 번천곤을 바라보았는데 마치 오랜 시간동안 함께해온 벗 같아 석목의 눈에서 결연한 기색이 스쳤다.
석목이 하늘로 날아올라 교룡을 덮쳤다.
탱!
번천곤에서 금빛이 폭발하며 천지를 부숴버릴 듯한 기세가 흘러나와 교룡과 부딪쳤다.
쾅!
순간 굉음이 울려 퍼졌고, 흩날리는 금빛은 마치 쏟아지는 비처럼 석목에게 드리웠다.
석목의 표정은 금이나 돌처럼 단단했으며 두 팔로 번천곤을 치켜들고서 흑백 교룡을 막고 있었다.
흑백 교룡이 꿈틀거리며 번개를 번쩍이자 교룡의 입과 발가락 사이에서 허공을 찢어버릴 듯한 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석목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으며 이를 악물고는 번천곤을 촘촘하게 휘갈겼다.
교룡과 석목은 오랫동안 대치 상태를 이루었다.
“하!”
석목이 소리를 지르자 팔에 푸른색 힘줄이 튀어나와 미친 듯이 위를 향해 공격했다.
두 갈래 교룡이 맞서서 아래를 짓눌렀지만 끝내 번천곤이 흩날리는 금색 곤봉 그림자를 막아내지 못한 채 다시 울부짖었다.
교룡의 몸에선 흑백 빛이 반짝이더니 두 마리가 하나로 합쳐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갈래 흑백 교룡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고, 길이가 천 장이나 되는 교룡으로 변하였다. 또한 몸에 감고 있던 흑백의 기운도 전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교룡이 꿈틀거리며 번천곤과 강하게 부딪쳤다.
석목의 몸은 부들부들 떨렸으며 곤봉의 끝을 타고서 절대 막아낼 수 없는 거대한 위력이 아래로 떨어졌다.
석목의 두 눈에서 금빛이 번지며 몸속의 피가 들끓듯이 뜨거워져서는 혈관 속을 빠르게 흘러 다녔다.
근육도 울퉁불퉁 부풀어 올라 하얀색 딱딱한 털이 자라나더니 모공을 뚫어버렸다. 그렇게 석목은 순식간에 천 장 가까이 되는 하얀 원숭이로 변하였다.
석목의 몸통이 불어날 때, 번천곤도 함께 불어나며 하늘을 찌를 듯이 거대한 기둥으로 변하였다.
쾅!
석목이 거대한 두 발로 땅을 밟자 대지가 한참 동안 흔들렸다.
그리고 그는 잠시도 멈추지 않은 채 두 무릎을 살짝 굽혀 위로 날아올랐고, 번천곤이 내뿜는 금빛도 밝아지면서 주변에 희미한 곤봉 그림자를 줄줄이 그려내 온 힘을 다해 번개 교룡의 머리를 내리쳤다.
쾅!
굉음이 한 번 울려 퍼진 후에 비경 속엔 짧은 적막이 찾아왔는데 마치 시공간이 전부 멈춰버린 것 같았다.
쾅, 쾅!
이어서 폭발음이 연이어 울려 퍼지더니 교룡의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석목의 몸도 금빛을 번쩍였으며 몸이 빠르게 줄어들어 허공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손에 든 번천곤도 빛을 반짝이며 석목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고, 힘을 모두 소진하여 몸을 가눌 힘조차 남아있지 않아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하늘에 뜬 흑백 구름이 합쳐지려는 찰나에 하얀빛이 반짝이더니 빠르게 석목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석목은 막을 힘조차 없어서 빛이 그대로 몸을 뚫고 심장까지 전해지도록 내버려뒀다.
펑!
석목은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석목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팔을 굽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몸은 이미 상처투성이가 되어 검게 타버린 나무 같았으며 앉아있는 것조차 힘겨워 고통스럽게 입을 벌렸다.
정신을 가다듬은 석목이 단약을 삼키자 조금 안색이 돌아왔다.
몸속으로 흘러들어온 하얀빛이 석목의 가슴에서 튕기자 그는 다급하게 눈을 감고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속을 한참 들여다봤지만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자 석목은 고개를 흔들며 눈을 떴다.
이상한 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는데 머리부터 심장까지 번개와 진동 때문에 생긴 상처 외엔 특별한 점이 없었다.
“좋아! 천형신겁을 이겨내다니. 역시 내가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군.”
백원왕이 날아와 희열이 가득한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번천곤 덕분이지요.”
석목이 어렵게 웃음을 지었다.
석목은 마음이 아렸는데 이 신겁을 이겨내기 위해서 치른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여의빈철곤이 터져버렸으며 구룡쇄금갑도 망가져 복구를 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인데다가 토템은 곧바로 찢어져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심한 상처를 입었으니 우선 치료부터 하거라.”
백원왕은 석목을 두어 번 훑어보더니 눈에서 이채를 흘렸다.
석목은 백원왕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걸 발견하지 못했는지 곧장 고개만 끄덕이고는 가부좌를 틀은 채 공법을 시전하여 진기를 회복했다.
그리고 구전현공 나무의 힘을 시전하였다.
석목의 간 부위에 푸른 작은 가마 허영이 나타났으며 그 속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몸속 곳곳을 드리웠다.
검게 타버린 상처가 천천히 회복되며 새살이 돋아났다.
이어 푸른빛이 계속해서 흐르며 몸속 경맥에 입은 상처도 하나하나 회복되었다.
* * *
족히 반 시진이나 지나서야 몸 곳곳에 생긴 상처를 전부 회복했다.
그리고 간 부위에 생긴 푸른 가마 허영이 반짝이며 사라졌다.
석목이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펴면서 속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나무의 힘이 상처를 치료하는 효과는 그 어떤 신묘한 단약도 대체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또한 끊임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석목이 수련한 건 소 구전현공이었는데 이젠 미천거원의 천수 혈맥을 각성했으니 진정한 구전현공을 수련할 수 있을 터였다.
허나 지금은 그런 것들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석목의 육체는 세 번 뇌겁 세례를 받으며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졌는데 이 점은 충분히 기뻐할 만 했다.
“음?”
이때,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져 석목은 곧바로 눈을 감고는 몸속을 들여다보며 깜짝 놀랐다.
심장 안쪽에서 기이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석목은 구전현공을 수련하며 심장에 수많은 불의 힘을 모았기에 붉은빛이 풍길 수는 있었지만 지금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 빛은 이전보다 훨씬 깨끗하고도 투명한 빛이었으며 수정 같은 빛도 머금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본 하얀 빛인가?”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석목은 다시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잠깐 사이에 심장에서 풍기는 기이한 붉은빛이 점점 밝아지면서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져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석목은 깜짝 놀랐다.
석목은 눈을 뜨고 싶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고,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기이해진 심장 때문에 몸이 통제력을 잃은 것만 같았다.
쿵쿵! 쿵쿵!
이때 붉은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지 영기에 파동이 일어 마치 쏟아지는 홍수처럼 석목의 몸속으로 몰려와 영기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소용돌이의 가운데엔 석목의 심장이 놓여있었다.
붉은 심장은 뛰고 있는 게 아니라 마치 형태가 없는 입이 벌어졌다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굶주린 듯이 주변의 천지 영기를 꿀꺽꿀꺽 삼켜댔다.
이때, 백원왕의 허영이 허공에 나타나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두 눈을 감고 있었으며 마치 조각상처럼 굳어버린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엔 붉은 심장의 허영이 쿵쿵 뛰고 있는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심장이라니……”
백원왕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몇 갈래 법결을 날렸다.
이어서 비경의 곳곳에 푸른빛이 번지더니 천지 영기가 석목에게로 몰려와 더 큰 영기 소용돌이로 변하였고, 소용돌이의 끝부분은 석목의 머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열 배, 백 배나 되는 천기 영기가 몰려와 소용돌이 속에서 짙어지면서 마치 실재하듯이 석목의 몸속으로 흘러들어가더니 곧바로 심장으로 향했다.
붉은 심장은 마치 구멍이 뚫린 듯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오는 영기를 전부 삼켜버렸다.
많은 천지 영기가 몰려오자 붉은 심장은 마치 큰 보약을 삼키듯이 ‘꿀꺽꿀꺽’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는 마치 소가 물을 마시는 소리와 같았다.
들끓는 혈액이 석목의 혈맥 곳곳으로 퍼져 순식간에 밝게 빛났고, 혈액 속에 깃든 순수한 영기 덕분에 몸속에 난 상처가 더욱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석목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마음은 물처럼 평온해져 조용히 몸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들여다보았다.
“이것이야 말로 백원왕이 말했던 천형신겁의 좋은 점인가?”
석목이 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