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42화 (742/916)

742화. 삼해(三海)

시간이 조금씩 흘러 반시진이나 흘렀다.

붉은 심장이 천지 영기를 빨아들이며 뿜어내는 붉은빛이 석목의 몸으로 스며들어가 윗몸에서 퍼졌다.

상처가 전부 회복되었으며 피부도 매끈해져 아무런 흉터도 남아있지 않았다.

석목의 얼굴엔 푸른 힘줄이 은은하게 어렸으며 심장에서 풍기는 뜨거운 열기는 이미 놀라울 지경에 도달했다. 다행히 석목은 몸이 단단해져서 뜨거운 기운을 견딜 수 있었다.

심장은 영기를 가득 삼킨 후에 포화 상태에 이르렀는지, 영기를 삼키는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더니 뜨거운 열기도 서서히 식어갔다.

석목은 그제야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계속 이어지면 버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쿵!’ 소리와 함께 붉은 심장이 격하게 흔들렸다.

쩍!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심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석목은 깜짝 놀랐는데 심장은 오장육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장기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신경 강자가 되어서 보통 무인들보다 훨씬 육신이 강력해졌지만 만약 심장이 찢어지게 된다면 석목 또한 죽음을 면할 수 없을 터였다.

석목은 다급하게 신식으로 안을 들여다보고는 흠칫 놀랐다.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신비스럽게 찢어진 점이 있었는데 그 점에서 붉은 공간이 나타났다.

쏴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붉은 공간에서 흘러나왔는데 마치 핏빛 바다와도 같았다.

“이건 뭐지!”

몸에 일어난 이상한 변화 때문에 석목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석목은 곧바로 숨을 내뱉었는데 이 기이한 붉은 공간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백원왕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드러났으며 곧바로 기쁨으로 차올랐다.

붉은 공간에서 빛이 날아 나와 석목의 몸 곳곳으로 스며들어갔다.

‘칙, 칙!’ 소리가 몸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석목도 백원왕처럼 깜짝 놀랐다가 이내 기쁨을 드러냈다.

붉은빛이 몸속으로 스며들자 마비되는 느낌을 받으며 뼈와 근육, 내장을 비롯한 모든 몸이 천지개벽을 하듯 변했다.

그와 동시에 근육이 꿀렁이더니 뼈가 부딪치면서 ‘뿌드득!’소리가 흘러나왔다.

단 몇 번 호흡을 거치는 동안 모든 빛들이 전부 석목에게 스며들어 소리는 천천히 멈추었다.

붉은 심장이 풍기는 빛이 전부 사라지자 그 속에서 보이던 신비스러운 공간도 조용해졌으며 모든 게 또다시 고요해졌다.

석목은 다시 몸을 다스릴 수 있게 되어 다급하게 눈을 뜨며 일어섰다.

그의 몸은 다양한 변화를 겪었는데 키가 몇 뼘 늘어났으며 어깨도 넓어진데다가 근육도 탄탄해져 완벽해진 느낌이었다.

석목은 몸이 달라진 걸 느끼며 크게 흥분했다.

단 몇 번 호흡을 하는 사이에 몸이 몇 배나 강력해진 것이었다.

이미 많이 단단해졌던 육신은 지금 두 배 정도 더 단단해졌으며 육신의 힘만으로도 평범한 신경 초기 강자를 격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에선 끈적이는 검은 물질이 흘러나와 악취를 풍기고 있었는데 아마 몸속에 있던 잡스런 기운 같았다.

석목은 파란빛을 날려 흐르는 물로 몸을 씻어내자 다시 몸이 상쾌해졌다.

“좋아, 좋아!”

격정에 찬 백원왕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선조님!”

석목은 백원왕을 깜빡 잊어버렸다가 목소리를 듣고는 다급하게 돌아서서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석목이 다시 고개를 들더니 안색이 굳었다.

조금 전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백원왕의 허영이 처음보다 훨씬 어두워졌으며 얼굴의 윤곽도 희미해졌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빠르게 주변을 훑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비경 속은 이전처럼 아름다운 광경이 아니었는데 하늘은 어두워졌으며 땅은 잔뜩 갈라진데다가 곳곳이 모래와 흙더미로 변해버렸다. 또한 푸른 식물들도 전부 말라죽었다.

공간 전체에 마치 죽음이 찾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 공간은 근본적인 원기가 전부 빨려나가 곧 무너질 게다. 하지만 별 일 아니지. 이 공간은 사명을 이미 다했으니 더 존재할 이유가 없단다.”

백원왕이 말했다.

석목이 눈썹을 치켜뜨며 생각해보니 천지 영기가 전부 석목의 심장 속으로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석목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백원왕이 하는 말을 들으니 또 안심이 되었다.

“선조님, 제 심장이……”

석목은 백원왕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백원왕이라면 석목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에 관한 일을 잘 알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다 지켜보고 있었단다.”

백원왕은 석목이 하는 말을 끊으며 말했다.

“선조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심장에 일어난 변화가 혹시 선조님이 이전에 말씀하신 신겁의 기연입니까?”

“그렇구나.”

백원왕이 웃으며 말했다.

“천형신겁은 하늘이 신경 수련자를 향해 내리는 시험이란다. 뇌겁에는 살기가 있지만 또 생명의 힘도 있지. 마치 봄에 번개가 치면 만물이 깨어나는 것처럼…… 천형신겁에는 조화의 기운도 있어서 신겁을 이겨낸 사람의 몸에 떨어지면 임의로 그 사람 몸속에 자리한 한 부분과 합쳐지게 된단다. 그리고 이 합쳐진 부분은 신기하게 변화되는데 너는 심장이 달라졌구나.”

백원왕이 말했다.

“조화의 기운…… 그렇군요.”

석목은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이런 이변을 ‘조화정변(造化晶變)’이라 부른단다. 몸에서 정변이 일어난 부분은 신기한 신통과 기이한 기능이 생기지. 이런 기연은 매우 흔하지 않아.”

백원왕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석목은 심장이 변화를 거치면서 얻게 된 좋은 점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조화의 기운은 대체 뭐기에 이렇게 신기합니까?”

석목이 물었다.

“그건 천지간에서 가장 현묘한 본원의 힘이란다. 신겁에만 깃들어 있지.”

백원왕은 몸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아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조님, 선조님은 조화의 기운에 대해 익히 잘 알고 계신데 선조님도 예전에 이런 신겁을 이겨낸 것입니까?”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지만 석목은 질문을 내뱉는 순간에 참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백원왕은 매우 뛰어난 자였으니 신경에 진입할 때, 신겁을 깨우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무엇인가를 떠올렸다.

연나가 신경에 진입할 때, 그녀가 갖춘 자질로는 왜 신겁을 깨우지 못했을까? 혹시 회생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석목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 백원왕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하지만 내 운은 너 만큼은 좋지 않았단다. 신겁을 이겨낸 후에 조화의 기운을 얻긴 했지만 두 눈과 합쳐져 눈이 변화되었단다. 그리하여 영목신통이란 걸 얻게 되었지.”

“영목신통?”

석목은 흠칫 놀라며 금정영목을 떠올렸다.

“너는 정말 운이 좋구나. 조화의 기운이 네 심장과 합쳐진데다 그 기운으로 혈해(血海)를 개벽하였으니 정말 잘된 일이야.”

백원왕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이 멈칫하며 심장에 나타난 괴상하고도 기이한 공간을 떠올렸다.

“혈해? 그건 무엇인가요?”

석목은 단 한 번도 이 단어를 들어보지 못했다.

“혈해는 삼해(三海) 중에 하나로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바다지. 네가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란다. 필시 이제 각 성역에 더 이상 순수하게 체수(體修)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란다.”

백원왕이 말했다.

“삼해? 체수?”

석목은 들을수록 어리둥절해지는 것 같았다.

“삼해는 상고시대의 수련자가 만든 단어인데 그건 영해, 식해와 혈해를 가리키지. 삼해 중에 영해는 기운이 주를 이루고, 식해는 정신력이 주를 이루며 혈해는 육신이 주를 이룬단다.

혈해는 위치가 심장에 있는데 심장은 온 몸을 도는 기운과 혈액이 모이는 곳이라 영해, 식해와 달리 매우 폐쇄된 공간이어서 육신을 최고 경지까지 수련한 후에 또 매우 큰 기연을 만나야만 열 수 있단다. 그러나 지금 거의 모든 성역에는 체수를 하는 사람이 매우 적으니 혈해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게다.”

백원왕이 말했다.

여기까지 들은 석목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수련자라면 영해와 식해를 모를 사람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혈해라는 것이 존재했다니.

백원왕이 하는 말은 석목이 수련을 하며 생각했던 고정관념을 뒤엎었다.

“상고시대엔 거의 모든 인간과 요수들이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체수를 했었단다. 그때는 혈해를 연 사람들이 많았지. 하지만 지금은 체수가 몰락하여 거의 사라지고 없구나.”

백원왕이 한숨을 내뱉었는데 체수의 몰락을 매우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석목이 수련했던 공법은 대부부 육신을 단련하는 공법이었으며 석목 본인도 육신의 실력이 강해지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백원왕이 하는 말을 들으니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혈해가 어떤 역할을 해서 이토록 중요하다고 하시는 겁니까?”

석목이 물었다.

백원왕은 허허 웃으며 답했다.

“육체를 단련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육신의 근골과 근육을 떠올릴 게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초보적이며 겉핥기 수련에 불과하지. 육체를 단련하는 근본은 사실 기혈을 단련하는 것이란다.”

석목은 그제야 희미하게 무엇인가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예전에 배운 육신을 단련하는 공법인 적원화경, 대력마원탈태결, 대범반무진경, 심지어 구전현공까지 석목의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육체를 단련하는 법문과 구결들이 생생하게 나타났다.

이미 거꾸로도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던 구절들이었는데 다시 들여다보니 마치 처음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면서 육체를 단련하는 식견이 한 층 더 높아졌다.

“그렇군요. 기혈을 운용하는 게 관건이었네요. 스스로 육신을 단련하는 법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했습니다!”

석목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육체를 단련하는 최고 경지는 근골만 단련해서는 이룰 수 없단다…… 반드시 기혈을 운전해야하는데 혈해는 몸의 기혈이 모이는 곳이라 그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지.”

백원왕은 말투가 매우 정중했지만 몹시 힘겨운 듯이 보였다.

“선조님……”

석목이 안쓰러운 듯이 백원왕을 불렀다.

“괜찮다. 끝까지 말해주마…… 이 밖에도 상고시대의 전집에 적힌 기록에 의하면 혈해 속엔 매우 오묘한 점이 담겨 있다더구나. 이런 오묘함을 풀게 되면 육신을 최고 경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단다.”

백원왕이 계속해서 말했다.

석목이 눈을 반짝였으며 나중에 다시 혈해를 들여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조님도 예전에 혈해를 열으셨었나요?”

“혈해를 여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란다. 만약 내가 예전에 혈해를 열었더라면 이렇게 죽지도 않았을 테지.”

백원왕이 자조하듯이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웃고 있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린 채 우물쭈물 말했다.

“선조님도 혈해를 열지 못하셨다고요……”

“혈해를 연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란다. 그리고 나는 미천거원 일족이라 강인한 육신을 타고 났으나…… 오히려 그게 혈해를 열 땐 걸림돌이 되었지…… 아마 인족이 더 유리할 게다.”

백원왕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석목은 멈칫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남해성을 떠난 후부터는 인족이라는 신분으로 괄시만 받아왔었는데 이런 좋은 점도 있었다니.

“혈해를 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군요.”

석목이 그리 말을 하며 동시에 운이 좋은 것에 감사했다.

“그럼…… 현생에 혈해를 연 사람은 너를 포함해도 다섯 명 밖에 없단다.”

백원왕이 말했다.

워낙 적은 숫자와 마주하니 석목은 다시 한 번 놀랐다!

“네 자질이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사실 나는 큰 희망을 품고 있지 않았단다. 천정이 너무 막강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구나. 네가 혈해를 열었으니 육신을 수련하는 길은 끝이 없을 게다. 그러니 꼭 이 부분을 신경 쓰거라.”

백원왕이 미소를 지으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선조님, 걱정 마십시오.”

석목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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