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43화 (743/916)

743화. 오행강역도(五行疆域圖)

백원왕이 손을 흔들자 누릿하고 오래된 서책이 석목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건 내가 예전에 갖고 있던 상고시대의 전집 잔본이란다. 그리고 내가 깨우친 내용도 적혀있지. 네가 육신을 단련하는 게 큰 성과가 없다고 생각해 집중력이 분산될까봐 우려되어서 너에게 주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꼭 잘 활용하기를 바란다.”

백원왕은 이미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석목은 서책을 받아들었는데 고작 서책 하나에 불과했지만 석목은 마음이 무거웠다.

백원왕이 번쩍이자 허영에서 하얀빛이 흩어져 나왔다.

백원왕은 가볍게 웃었으며 표정이 고요할 정도로 차분했다.

“선조님……”

석목은 안색이 굳었다.

백원왕은 석목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이 전례 없이 따뜻해보였다.

“내 시간이 다 되었구나…… 금색 상자에 든 또 다른 옥갑 두 개 중 하나는 미천거원 일족 족장의 신물이고, 또 하나는 구전현공을 대성에 이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물건이란다. 꼭 잘 챙겨두거라.”

“네. 선조님, 명심 하겠습니다!”

석목이 정중하게 말했다.

“한평생 세상을 휘젓고 다니다가 결국은 죽은 몸이 되었으나 일생 동안 나는 후회나 원망 따윈 하지 않았단다. 게다가 죽은 뒤에도 너 같은 후손이 생겼으니 충분히 만족스럽구나. 하지만 네가 앞으로 가야할 길은 아직 먼데 나는 더 이상 너를 도와줄 수가 없구나……”

백원왕이 큰소리로 웃자 그림자가 드디어 천천히 흘러가다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석목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으며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사존과 이별의 순간을 마주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석목과 백원왕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백원왕은 석목에게 있어서 유일한 사존이었다.

한참 후에야 석목은 길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백원왕이 완전히 사라졌으니 이제 남은 길은 혼자서 걸어야만 했다.

석목은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지었는데 변고를 겪으며 석목은 초심을 되찾아 더는 천정이 두렵지 않았다.

석목이 다시 눈을 깜빡거리며 백원왕이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옥갑 두 개를 꺼냈다.

석목이 옥갑 한 개를 열었다.

옥갑 안엔 손바닥만 한 원숭이 모양 조각상이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는데 마치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이 원숭이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원숭이 조각상은 붉은색이었으며 부드럽고 매끈한 촉감이었다. 그리고 은은하게 열기가 느껴졌는데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원숭이 조각상의 등에는 원숭이 모양 그림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림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석목은 한참 동안 조각상을 훑어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물건은 아마 백원왕이 말했던 미천거원 일족 족장의 신물일 터였다. 하지만 이 조각에선 아무런 영력 파동도 일어나지 않아 법보가 아닌 평범한 조각상 같았다.

미천거원 일족은 왜 이런 물건을 족장의 신물로 만들었을까?

석목이 고개를 흔들며 신물을 거두어들인 후, 나가서 대장로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석목은 또 다른 옥갑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눈을 반짝이며 옥갑을 열었다.

그 속에는 화권이 하나 들어있었다.

이 물건은 구전현공을 대성에 이를 수 있는 중요한 물건이었다.

화권을 열어보니 내용은 홍, 남, 금, 황, 녹 다섯 가마 모양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며 작은 오행 가마 부문들과 비슷해보였지만 완전히 일치하는 건 아니고, 오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오각형 모양의 가운데엔 동그랗고 검은 무언가가 있었으며 그 깊이가 유난히 깊어보였는데 마치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공간의 문 같았다.

화권 끝자락에는 ‘오행강역도’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석목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신식으로 여러 번 훑어보았지만 이 화권도 족장의 신물처럼 아무런 영력 파동이 일지 않았다.

또한 진기를 불어넣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구전현공을 대성에 이르게하는 중요한 물건이면 절대 평범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보아하니 이걸 깨우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군.”

석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때, 주변이 흔들리며 하늘에 커다란 공간 균열이 나타났으며 비경 곳곳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지더니 균열은 줄줄이 찢어졌다.

“큰일이다. 공간이 무너진다!”

석목은 안색이 굳은 채 곧바로 모든 물건을 거두어들이고는 몸을 날려 입구 쪽으로 날아갔다.

* * *

비경 밖, 비석이 있는 산 중턱 속.

대장로, 둘째 장로, 채아가 이곳에 있었다.

채아는 심심했는지 큰 돌 위에 서서 눈이 풀린 채 졸고 있었다.

대장로는 묵묵히 서서 뚫어져라 검은 비석만을 바라보았다.

둘째 장로는 그리 차분하게 있지 못해 매우 초조하게 여기저기 서성거렸다.

이때, 검은색 비석이 격하게 흔들리며 검은빛이 뿜어져 나와 ‘쩍, 쩍!’ 소리와 함께 균열이 일었다.

대장로와 둘째 장로는 안색이 바뀌었다.

채아도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서 비석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채아가 날개를 펄럭이며 소리를 질렀다.

“비경이 무너지기 시작했구나.”

대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석목 장로……”

둘째 장로가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때, 비석에서 검은빛이 크게 번지며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빛이 반짝이며 그림자가 속에서 날아 나와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 그림자는 석목이었다.

검은 비석에서 한참 동안 빛이 번쩍이며 소리가 울려 퍼지다가 결국 철저히 무너져 버려 부서진 돌들이 바닥에 수북이 쌓였다.

하지만 아무도 비석이 무너지는 걸 바라보지 않았다.

“석두!”

채아가 소리를 지르며 석목에게로 날아갔다.

“석목 장로, 드디어 나왔군.”

둘째 장로 백장이 기뻐하며 다가왔다.

대장로는 침착하게 자리에 서 있었으나 긴장이 많이 풀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대장로는 석목을 훑어보고는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걱정 끼쳐드렸습니다.”

석목이 채아를 잡아다가 어깨에 올려놓으며 두 장로를 올려다보았다.

“괜찮네. 별 탈 없이 나왔으면 됐네.”

백장이 웃으며 말했다.

“석목 장로, 수련 경지가…… 신경에 도달했는가?”

대장로가 앞으로 두 걸음 다가와서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백장과 채아도 표정이 전부 바뀌었다.

그들은 너무 흥분한 탓에 석목의 수련 경지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일부러 내뿜지 않았음에도 석목의 기운이 매우 흉흉하게 차고 넘쳐 끊임없이 부딪치는 파도와도 같은 걸 보아 이미 신경에 도달한 것이었다.

“비경에서 많은 일을 겪으며 드디어 신경을 돌파했습니다.”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 석두! 너무 대단해!”

채아가 소리를 질렀다.

석목의 실력이라면 채아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 텐데 성계 경지일 때도 큰 부담 없이 신경 강자들을 격살했었다.

이제 신경에 도달했으니 천정의 신경 강자들 따윈 그냥 가볍게 이길 수 있을 터였다.

석목의 실력이 막강해질수록 채아에게도 유리한 점이 많아졌다.

“석목 장로……”

백장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 석목 장로의 수련 경지가 이렇게 크게 성장했으니 이건 우리 미천거원 일족의 복이구나. 우리 종족이 중흥할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대장로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대장로님, 과찬이십니다.”

석목이 담담하게 웃었다.

“석두, 비경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비석마저 무너졌잖아?”

채아가 물었다.

대장로와 둘째 장로도 궁금한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별 일 아니야. 선조님이 내리신 시험을 치르면서 싸움이 격해져 공간을 지탱하던 기반이 무너졌어.”

석목은 공간 속에서 겪은 일을 가볍게 말해주었으나 천형신겁을 겪은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렇군, 안전하게 나와서 다행이네.”

둘째 장로가 말했다.

“아, 석 장로, 족장의 신물을 가져왔는가?”

대장로가 눈에 빛을 반짝이며 석목에게 물었다.

석목이 손을 흔들어 붉은색 석후 조각상을 꺼냈다.

“이것은 불청신후상(不聽神猴象)!”

대장로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잘했네. 우리 종족의 신물이 드디어 다시 돌아왔군!”

둘째 장로도 희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불청신후상이요? 혹시 이 조각상의 이름입니까?”

석목이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이렇게 괴상한 이름이 다 있다니. 석목이 들고 있는 원숭이 조각상은 쪼그려 앉은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걸 보아 ‘불청후(不聽猴)’와 매우 흡사했다.

“그래, 석 장로가 우리 종족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이 일을 모르는 것도 당연하겠지. 이 신후상은 백원 족장이 지니고 다니던 물건이라 우리 종족 족장의 신물이 되었네.”

대장로가 말했다.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물건은 재질만 조금 특별한 걸 빼면 다른 것들은 매우 평범해보였다.

팔황고족 중에 하나인 염호 일족 족장의 신물만 해도 위력이 대단한 영보였다. 하지만 예전에 팔황고족 중에 우두머리였던 미천거원 일족이 이렇게 익살스러운 원숭이 조각상을 족장의 신물로 여겼다니.

그래도 백원왕이 그렇게 한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게다가 그 이유는 눈앞에 선 두 장로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대장로님, 석목 장로가 비경 속에서 족장의 신물을 찾은데다가 수련 경지도 신경에 진입했으니 이제 충분히 족장의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을 것 같군요.”

둘째 장로가 대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석목은 눈만 깜빡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석두는 이미 충분히 족장 자리를 차지해도 됐는데 지금까지……”

채아가 옆에서 재잘대자 석목이 채아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채아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석목 장로가 이미 족장의 신물을 받았으니 족장 자리를 이어받는 건 당연한 일이네. 하지만 종족의 규칙대로 우선 셋째 장로에게 알려 상의를 거쳐야하네.”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녀석과 상의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때 이미 상의했잖습니까? 석 장로가 족장의 신물을 받으면 곧바로 족장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셋째 장로가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둘째 장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래, 석 장로의 의견은 어떤가?”

대장로가 둘째 장로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석목에게 물었다.

“두 장로님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족장 자리를 이어받으면 최선을 다해 미천거원 일족을 이끌어 예전의 영광을 되찾아 천정의 세력을 천하 성역 밖으로 내쫓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이 정중한 투로 말했다.

석목은 미천거원 일족의 족장 자리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백원왕이 품은 뜻인데다가 자신의 실력을 끌어올리려면 족장 자리를 이어받아야만했다. 그래야 천정과 싸울 수 있을 것이며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을 지킬 수 있었다.

“석목 장로, 꼭 해낼 수 있을 거라 믿네!”

둘째 장로가 확신에 찬 투로 말했다.

미천거원 일족은 지금까지 천 년이나 쇠락이 이어졌으며 오늘날에 와서야 드디어 일말의 희망이라도 생겼다. 물론 이 희망은 석목이 가져온 것이었다.

대장로의 고정불파(古井不波)인 두 눈에 희망이라는 것이 생겼다.

“족장의 자리를 수임하는 건 우리 종족에 천 년 만에 생기는 큰일이지요. 거대하게 수임 축전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종족은 천정의 공격을 받아 종족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무거워졌는데, 이 일로 민심을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기를 북돋을 수 있겠습니다.”

둘째 장로가 흥에 겨워 말했다.

“둘째 장로 말이 맞네. 석 달 뒤에 좋은 날이 있지. 그때 수임 축전을 여는 건 어떤가?”

대장로가 석목에게 물었다.

“수임 축전을 열면서 널리 초대장을 보내 많은 종족들에게 참여하도록 청하시지요. 그리고 이 기회에 우리 미천거원 일족이 천하 성역에 다시 복귀하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천정과 맞서 싸우리라는 걸 알리는겁니다!”

석목이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대장로와 둘째 장로는 전부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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