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5화. 상고구경
석목이 계속해서 서책을 읽어 내려가며 서책에 적힌 내용에 빠져버렸다.
반나절이 지나서야 석목은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눈에는 온통 존경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대범반무성체공>은 진정한 상고시대의 연체 전집이었는데 역시 생각대로 <대범반무진경>과 연관이 있었다.
아마 백원왕이 <대범반무성체공>을 기반으로 <대범반무진경>이라는 공법을 만들었을 터였다.
석목은 잔편이라는 말을 듣자 상고 연체 전집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다시 읽어보니 역시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이었다.
이 <대범반무성체공>이라는 서책은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어서 전에 읽었던 그 어떤 연체 전집보다 의미가 있었다.
신체를 단련하는 법문이 수도 없이 많이 적혀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체를 이루는 각 부위, 예를 들면 손만 해도 족히 수십 가지에 달하는 단련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른 부위를 단련할 다양한 법문 공법들이 수두룩했다.
뇌전의 힘을 빌려 신체를 단련하는 방법인 뇌광단체법.
얼음과 불의 힘을 빌려 몸의 혈공을 여는 방법.
특별한 호흡법으로 오장육부를 단련하는 방법.
특수한 전신 비술을 수련하여 마음을 맑게 만들어 육신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방법등 신기한 단련 법문들을 보자 석목은 감탄만 나왔는데 또 다른 수련의 세계를 펼쳐준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상고 연체 비술이 이렇게 오묘하다니……”
석목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서책은 잔편이라 앞부분에 적힌 다양한 연체 법문은 온전했지만 어떻게 기혈을 운용하여 혈해의 정화 부분을 수련해야할지는 없었다.
백원왕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뒷부분을 메우려했지만 아쉽게도 끝을 맺지 못했다.
백원왕이 시도했던 다양한 과정과 결과만 적혀있을 뿐이었는데 그 중엔 성공한 것도 있고, 실패한 것도 있었으며 심지어 결과가 없는 것도 있어서 체계가 잡히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원왕은 혈해를 열지 못했기 때문에 무작위로 수련을 시도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석목이 다시 혈해를 열고서 백원왕의 깨우침을 그대로 시도해보니 혈해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그는 백원왕의 깨우침을 물려받아 더 많은 성과를 얻어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석목이 이 서책에서 얻은 가장 큰 건 백원왕이 표시해둔 부분이 아니라 상고 시대에 육신을 수련했던 무사들이 육신의 수련 수준을 온전한 경계를 따라 분리해 놓은 부분이었다.
서책에 따르면 상고시대의 수련자들은 육체 수련을 총 아홉 단계로 나누었는데 이는 단련 입문, 피부를 소처럼, 뼈를 쇠처럼, 오장의 기운 흐름, 골수를 수은처럼, 금강의 육신, 육신의 원만, 불사신이었다.
총 아홉 단계였지만 이 서책은 여덟 번째까지만 기록이 되어있었다.
아홉 단계는 매 단계마다 경계를 구분하는 특이점과 기준을 명시해두었다.
생각해보니 석목의 육신은 아마 여섯 번째 단계 정상일 터였고, 이제 곧 일곱 번째 단계인 육신의 원만에 이를 수준이었다.
이 육신의 단계마다 각각 어떻게 수련을 해야 하는지 서책은 명확하게 알려주었다.
석목은 서책에 적혀있는 ‘불사신’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미 일곱 번째 단계인 ‘육신의 원만’을 깨우쳤으니 수련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불사신’이야 말로 크게 넘어야할 산 같았다.
일곱 번째 단계인 ‘육신의 원만’을 수련하게 되면 육신의 힘을 극한까지 발휘할 수 있을 터였고, 여덟 번째 단계인 ‘불사신’은 육신의 한계를 돌파하는 것이었다.
서책은 ‘불사신’에 대해 많은 소개를 하지 않았는데 다만 이 경계를 수련하고 나면 육신을 자유자재로 분리하거나 합칠 수도 있으며 크기를 조절할 수도 있다고 적혀있었다. 이 정도에 도달하면 약점이 사라질 테니 가히 불사신이라 불릴 수 있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는데 설명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책에 적힌 말에 따르면 상고시대엔 육체를 수련하는 게 성행하여 ‘육신의 원만’에 이른 수련자들이 많았다고 적혀있었으나 ‘불사신’에 이른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석목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는 <대범반무성체공>을 다시 한번 읽었다.
이번에 석목은 구절마다 자세히 읽어 내려가며 처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일일이 찾아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석목은 서책을 덮었으나 여전히 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백원왕이 서책에 남긴 표시에 의하면 백원왕도 ‘육신의 원만’까지만 수련했을 뿐, 혈해를 열어 ‘불사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 ‘불사신’의 단계가 얼마나 현묘한지 봐야겠어!”
석목은 속으로 꼭 ‘불사신’까지 수련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육신의 아홉 단계 중에 수련할 마지막 단계가 무엇인지도 매우 궁금했다.
하지만 석목은 마지막 경계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기에 우선 ‘불사신’부터 달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석목은 서책을 거둬들이고는 한 손을 평평하게 펼친 후에 다른 한 손을 몸 앞으로 세워 손가락을 굽히더니 기괴한 동작을 취했다.
하얀빛이 석목의 몸에서 번졌는데 이 빛은 대범반무진기였다.
그는 눈썹을 치켜떴다.
무엇 때문인지 대범반무진기가 예전과 달리 열 배는 두터워진 것 같았다.
만약 예전의 진기가 나무였다면 지금은 마치 강철과도 같았다.
석목은 처음 이런 변화를 발견하여 흠칫 놀랐는데 예전엔 비경에서 신겁을 피하느라 신경에 진입한 후로 어떻게 달라졌는지 자세히 변화를 음미하지 못했다.
그는 공법을 시전하며 흥분된 기색을 그대로 내비쳤다.
진기뿐만 아니라 천지 영기를 다스리는 것도 예전보다 열 배는 더 수월해진 것 같았다.
석목이 천천히 주변에 감도는 천지 영기를 끌어당겼다.
“이거야말로 신경 강자의 신통이구나…… 어쩐지 신경이 움직이면 날씨까지 바뀌더라니.”
석목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막 신경에 진입했으니 경지가 안정되지 못하여 시간을 들여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석목은 한 편으로 공법을 운용하며 최대한 신경에 익숙해지려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백원왕이 서책에 남긴 방법대로 자신의 기혈을 움직였다.
쏴아아!
파도 소리가 혈해 속에서 흘러나왔다.
붉은빛이 석목의 가슴에서 밝아지며 혈맥을 이루고는 천천히 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하얀빛과 붉은빛은 부딪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가 되는 기미가 보였다.
<대범반무성체공>과 <대범반무진경>은 한 가지 맥을 이어가고 있어 상부상조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실로 흔한 일이 아니었다.
두 공법이 서로 도움을 주면서 끝없는 가치를 창출했다.
석목은 이 두 가지 공법을 물려준 백원왕을 향한 감격스러운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 * *
이 시각, 미천거원 일족에 자리한 한 대전에는 문이 닫혀 있었고, 그 안에는 백비와 백홍 둘만이 있었다.
백비가 어두워진 얼굴로 대전에서 서성거렸다.
백홍은 한쪽에 서서 화가 난 얼굴로 이리저리 걸어 다니는 백비를 바라보았는데 백비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셋째 장로님,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고 석목이 족장 자리를 차지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겁니까?”
계속 대전 안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만 하던 백비를 본 백홍은 참지 못하고서 입을 열었다.
백비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석목이라는 자는 이미 신경에 도달했으며 비경에서 족장의 신물을 꺼내왔지. 대장로와 둘째 장로가 지지를 하고 있는데 내가 반대를 한다면 셋은 힘을 합쳐 날 제압할 게야.”
백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우리 머리 꼭대기에서 날뛰는 꼴을 보고만 있을 겁니까?”
백홍의 목소리가 커졌는데 호통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닥쳐라!”
백비가 소리를 질렀다.
백홍은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인정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지만 낙심할 필요는 없지. 석목을 끌어내릴 기회는 여전히 있으니.”
백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백홍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석목 이 녀석이 이상하게 머리를 썼구나. 각 종족 사람들을 축전에 초대하겠다니. 우리 미천거원 일족은 천 년 가까이 은거를 해 바깥과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라 아무도 안 올 게다. 석목은 요족과 인족이 얼마나 다른지 몰라도 너무 몰라. 허세를 부리려고 이렇게 멍청한 결정을 내리다니. 우리 종족들 앞에서도 망신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백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장로님이 축전에 적극 찬성하신 건 다 이유가 있었군요. 역시 현명하십니다.”
백홍이 존경하는 투로 말했다.
“우선 엎드려 주면서 지켜보자고. 그리고 석목이 천천히 종족의 믿음을 잃게 만드는 게지. 너도 꼭 열심히 수련해 반드시 신경에 진입해야 한다. 실력을 연마해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족장의 자리를 빼앗아 올 수 있으니.”
백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백홍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석목이 족장 자리를 수임한 후에 각 종족 사람들을 초대하여 축전에 참여시키겠다는 소식이 미천거원 일족에 퍼지자 종족이 소문으로 들끓었다.
젊은 제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짓눌린 감정으로 살았기에 석목이 족장 자리를 수임 받는 일을 매우 찬성했다.
하지만 연로한 종족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워낙 보수적인데다 고정 관념을 버리지 못했는데 석목이라는 인족이 족장 자리를 차지하는 게 매우 못마땅한 눈치였다.
비록 석목이 백원왕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이미 미천거원 혈맥을 각성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연로한 이들이게 석목은 여전히 인족에 불과했고, 또한 외부인에 불과했다.
게다가 석목이 일을 크게 벌여 다른 종족들을 초대한다고 하니 더 많은 불만이 생겼다. 연로한 이들은 석목이 스스로 명성을 쌓기 위해 이렇게 성대하게 축전을 연다고 생각했으며 이건 미천거원 일족을 모욕하는 일이라 여겼다.
한동안 미천거원 일족에서는 파문이 일어 보수적인 이들과 진보적인 이들 사이에 풍파가 끊이지 않았고, 심지여 여러 번 다투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 대장로가 국면을 평정하긴 했지만 종족 안에서 모순은 계속 되었다.
물론, 석목은 동부에서 폐관 수련을 하느라 이런 일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석목은 알고 있다고 해도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을 터였다.
* * *
시간이 빠르게 흘러 석 달이 지났다.
비밀 석실에는 도처에 붉은색과 하얀색이 번지고 있었고, 석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 갈래 빛이 마치 밀물처럼 부딪치자 매번 비밀 석실이 흔들렸다. 만약 강력한 금제가 없었더라면 석실은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한참 후에 빛들이 흔들리며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비밀 석실 가운데서 석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일어섰다.
석 달간 고생한 끝에 꽤 많은 수확을 이루었으며 수련 경지도 안정되었다.
육신도 꽤나 강화되었는데 육신의 원만 단계와 더욱 가까워졌으며 이제 이 년 정도만 더 수련하면 아마 원만에 도달할 터였다.
석목이 가볍게 숨을 내뱉었는데 만약 가능하다면 폐관하여 수백 년은 더 수련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장 천정이라는 적을 해결해야했기에 한가하게 수련만 할 수는 없었다.
석목은 옷차림을 한 번 만지고는 비밀 석실에서 나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틀 뒤면 족장 수임 축전이 열리는데 석목은 족장 자리를 수임받아야 했기에 당일에 나갈 수는 없었다.
“석두!”
석목이 비밀 석실에서 나오자 채아가 다가왔다.
“실패했지?”
석목은 채아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신경을 돌파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 채아가 실패를 할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휴, 역시 신경은 그리 쉬운 경지가 아니었어.”
채아가 힘없이 말했다.
“기 죽지 마. 네가 처음에 나를 만났을 땐 후천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했었잖아. 그런데 벌써 성계 정상이니 아주 빠른 거야.”
석목이 채아를 다독였다.
그 말을 듣자 채아는 기분이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아, 채아, 영목으로 이 물건을 좀 봐줘. 어떤 현묘한 점이 있는지.”
석목이 잠깐 멈칫하다가 불청신후상과 오행강역도를 꺼냈다.
백원왕이 불청신후상을 족장의 신물로 정했으니 절대 평범한 물건은 아닐 터였다.
채아의 시력은 매우 신통하고 특별하니 이 속에 감춰진 비밀을 알아낼 수도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