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46화 (746/916)

746화. 수임 축전

“이게 뭐야?”

채아가 중얼거리며 두 눈에 채색 빛을 뿜어내며 오행강역도로 보냈다.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그림 같은데 아무것도 없어.”

채아가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채아가 고개를 흔들고는 불청신후상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참 후에 채아는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뭐 보이는 게 있어?”

석목이 다급하게 물었다.

역시 평범한 조각상이 아니었다.

“깊은 곳이 조금 이상해. 시선을 연결해봐.”

채아가 말했다.

석목은 곧바로 채아와 시선을 연결했다.

처음부터 연결하지 않았던 이유는 채아에게 방해가 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시선을 연결해보니 조각상의 깊은 곳엔 작은 하얀 빛점이 있었다. 그건 마치 하얀 옥석 알갱이 같았는데 알갱이에선 아무런 파동도 일지 않았다. 그것이 석목이 신식으로 빛점을 보지 못한 원인이였다.

석목은 곧바로 다시 신식을 조각상 안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신식이 하얀 알갱이에 부딪치는 순간, 형태가 없는 힘이 밀어내어 가까이에 다가갈 수 없었다.

석목은 오히려 기뻐했는데 이 하얀 알갱이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모든 신식의 힘을 써서 뾰족한 모양으로 만든 후에 하얀 알갱이를 힘껏 뚫었다.

쩍!

종잇장이 찢어지듯이 알갱이 주변을 막던 힘이 뚫려버려 석목의 신식이 하얀 알갱이에 닿았다.

윙!

하얀 알갱이에서 수많은 글씨가 나타나 석목의 신식을 타고서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석목은 머리가 묵직해지더니 망치에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석두, 괜찮아?”

채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석목이 머리를 흔들었는데 눈에선 기이한 빛이 반짝였다.

머릿속에 하얀 종이가 나타났는데 그 위에 작은 글자가 가득 새겨져있었다.

하지만 이 작은 글씨들은 성역 대세계에서 통용하는 문자가 아니라 이상한 올챙이 모양이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상고 문자인가?”

석목이 추측했다.

알아보지 못하니 읽을 수도 없어 기회가 되면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 누군가가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목 족장님, 대장로님이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석목이 눈썹을 치켜뜨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동부 밖에 미천거원족 한 명이 공손하게 서 있었다.

“족장님께 인사 올립니다.”

석목이 나오자 미천거원족이 다급하게 인사를 올렸다.

“인사할 필요는 없다. 가자.”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얀빛으로 변하여 먼 곳으로 날아갔다.

* * *

대장로님이 정한 수임 축전 날이 다가왔다.

미천거원 일족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바뀌었다. 길 양옆에 늘어선 나무엔 붉은 비단이 걸려 있었으며 대전과 건물에는 붉은색 초롱이 걸려있었다. 또한 종족 곳곳이 화려한 빛깔들로 가득 찼다.

잠시 후에 석목과 몇몇 장로가 종족의 제단이 놓인 대전 앞에 나타났다.

수임 축전은 이곳에서 열린다.

제단 대전의 높은 벽을 붉은색으로 칠했고, 늘어선 수십 개의 둥그런 금색 기둥이 불빛 아래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전 안은 붉은빛으로 가득했고, 자단나무로 만든 탁자에는 다양한 제사 용품이 있었다. 소박한 청동 향로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뒤편엔 영패가 수십 개 걸려있었는데 연기가 피어올라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중 백원왕의 이름이 새겨진 영패도 있었다.

석목은 피어오르는 향연으로 드리워진 선조의 영위를 바라보았다. 그건 마치 구름 속에 묻힌 큰 산처럼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참 바라보던 석목은 다시 시선을 돌려 광장을 바라보았다. 산 아래 숲 속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대장로님, 초대 손님들을 접대하는 일도 전부 지시를 내리셨나요?”

석목이 물었다.

“이미 지시를 내렸네. 백강에게 사람을 데리고 전송대전에 가서 영접하라고 했으니 별 문제 없을 걸세.”

대장로가 말했다.

“족장님, 이번 축전의 초대장은 몇 달 전에 이미 전송했습니다. 그 뒤로 준비해야 할 모든 세부 사항들을 완벽하게 준비해놓았죠.”

둘째 장로 백장이 말했다.

둘째 장로가 하는 말을 듣자 석목이 멈칫했다. 그는 족장이라 불리는 게 영 불편했다.

“둘째 장로님, 그냥 석목이라 불러주세요.”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오늘 정식으로 수임을 하는 것이니 이제 호칭을 바꿔야하겠죠.”

백장이 엄숙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족장님, 둘째 장로가 하는 말이 맞아요. 이제 족장의 신물을 지니셨고, 게다가 신경까지 돌파하셨으니 이제 아무도 그 자리를 의심할 수 없습니다.”

셋째 장로는 몸이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아 말을 꺼내는 게 조금 힘이 부치긴 했으나 아주 공손했다.

석목이 비경에서 나온 후로 백비의 태도가 정반대로 바뀌어서 석목은 아직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석두, 미천거원 일족은 세상에서 오랫동안 은거하며 지냈는데 정말로 체면을 살려주는 사람들이 참석할까?”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 앉아 전음하며 물었다.

“걱정 마. 올 사람들은 다 올 거야.”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전음했다.

석목의 왼편 뒤쪽에 서 있던 백비는 석목의 미소를 보고는 얼굴에 경멸을 하는 기색이 스쳤다.

대략 반시진이 지나자, 동쪽 하늘에서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미천거원 일족들도 시끌벅적하게 길을 따라 제단 대전의 광장에 모였다.

“오늘은 네가 수고 좀 해줘. 종족의 곳곳을 감시하면서 천정이 무슨 짓을 벌이지 않는지 봐줘야 해.”

석목이 어깨에 앉아있는 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히히, 걱정 마.”

채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날개를 펼치고는 광장을 지나 산 밑으로 날아갔다.

* * *

미천거원 일족의 비경 밖, 영남성에 자리한 유일한 전송대전 밖에는 은색 갑옷을 입은 미천거원 열 몇 명이 나란히 두 줄로 서서 축전에 참여하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 이들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서 꼿꼿이 선 채 기다리고 있었지만 태양이 서서히 높아져도 손님들이 나타나지 않자 온통 피곤한 기색을 드러냈다.

“백강 형, 그런데 다른 종족들이 정말 축전에 참여할까요?”

나이가 어려보이는 푸른 거원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바닥의 나무 그림자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만 있던 백강은 푸른 거원이 묻자 흠칫 놀라더니 한참 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실은 조금 전부터 백강도 계속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백강이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전송대전에서 빛이 밝아지더니 강력한 기운 수십 갈래 흘러왔다.

백강은 눈썹을 치켜뜨며 대전의 문으로 향했다.

머리가 보라색이며 얼굴이 각진 한 사나이와 콧대가 높고 등 뒤에 날개가 자라난 한 남자가 나란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들 뒤로 같은 종족 사람들 수십 명이 걸어 나왔다.

백강이 다가가 이들을 훑어보고는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먼 곳에서부터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후배 백강입니다. 명을 받고서 이곳으로 영접을 하러 나왔습니다.”

백강의 몸집은 그들보다 훨씬 컸기에 허리를 굽혀도 내려다봐야할 정도였다.

“아녜요. 아녜요.”

머리가 보라색이며 얼굴이 각진 한 사내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너희 족장은 인족이라며? 왜 안보이지?”

등에 날개가 자란 남자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예의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이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백강은 화가 치밀어 올라 눈살을 찌푸렸다.

“족장님은 종족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두 분을 모시겠습니다.”

백강은 간신히 화를 짓누르며 말했다.

“좋군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보라색 머리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백강이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가 곧바로 산 같은 몸을 돌려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보라색 머리 사내와 등에 날개가 자란 남자는 종족 사람들을 데리고 두 줄로 나란히 서 있는 미천거원의 몸에서 풍기는 전사의 기운을 느끼자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전송대전에서 백 장 가까이 멀어지자 보라색 머리 사내가 갑자기 입을 열고는 작은 목소리로 날개가 달린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계 형, 미천거원 일족의 실력은 절대 약하지 않소. 그리고 족장 자리를 수임 받는 사람도 엄청난 실력자요. 종족 사람들까지 데리고 나를 따라왔으니 내 체면을 봐서라도 무례한 짓은 하지 마시오.”

“뇌 형, 실은 이번에 미천거원 일족이 망신을 당하는 꼴을 보려고 왔소. 천년 동안 잠적해 있다가 인족을 족장으로 내세우다니. 우리 천하 성역의 요족들 체면은 어디로 갔소?”

날개가 한 쌍 자란 사내가 큰소리로 말했는데 가까이에 있는 백강을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런……”

보라 머리 사내는 안색을 굳히더니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앞에서 걸어가던 백강이 그 말을 듣고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며 멈춰 섰다.

그 모습을 본 보라색 머리 사내가 놀라며 이제 막 말을 하려고 할 때, 백강이 입을 열었다.

“여긴 종족과 거리가 조금 있어서 손님께서는 비행 법기를 타고 따라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백강은 몸에 금빛을 반짝이며 몸을 날려 백 장 위까지 올라가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강풍이 휘몰아치며 눈앞이 희미해지자 백강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보라색 머리 사내와 날개가 자란 사내는 서로 한번 쳐다보고는 다급하게 각자 비주를 소환하여 백강이 날아간 방향으로 쫓아갔다.

만약 부하들에게 각자 날아오라고 했더라면 그들은 아마 대부분 따라오지 못했을 터였다.

예의 없이 그들이 뱉는 말에 불만이 생긴 백강은 본때를 보여주려 했지만 또 혼자 너무 멀리 떨어진 것 같아 멈춰 서서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손님들이 쫓아왔는데 백강은 아무 말 없이 계속 그들을 이끌고서 골짜기로 향했다.

* * *

대략 반시진이 지난 후에 일행 수십 명은 백강이 안내하는 가운데 미천거원 일족에 도착했다.

제단 대전이 있는 상공에서는 비행을 할 수 없기에 그들은 산꼭대기에 내려와서 산길을 따라 걸어갔다.

이 시각, 대전 앞 광장은 미천거원 일족들로 가득찼는데 전부 몸집이 거대해서 촘촘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기품이 넘쳤다.

광장 위에 놓인 제단 대전의 석대에는 이미 자단나무 의자 수십 개가 놓여있었다.

이 의자들은 넓이가 십 장이나 되는 게 있는가 하면 고작 몇 척 밖에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의자들은 모양이 똑같이 생겼지만 크기는 전부 달랐는데 다양한 손님들을 위한 자리였다.

허나 지금은 가운데에 있는 네 자리만 차있을 뿐, 다른 의자들은 전부 비어있었다.

“장로님들 인사 올립니다. 첫 번째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백강이 의자에 앉아있는 족장 석목을 비롯한 장로들을 바라보며 몸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석목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보라 머리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뇌동 사형,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석목이 인사를 올렸다.

“석 족장님이 저를 아직 기억하고 계시다니. 영광이군요.”

보라 머리 사내가 의외라는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뇌 형은 뇌마 일족의 장로님이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잊겠습니까?”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얼마 전에 우리 종족에선 변화가 좀 일어났는데…… 전 이미 뇌마 일족의 족장이 되었습니다. 석 족장님의 초대장을 받아서 얼마나 영광인지 모르겠군요. 그리하여 종족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뇌마가 말했다.

“뇌 형, 축하드립니다. 아, 기세가 비범해 보이는 이분은 누구십니까?”

석목이 뇌동의 옆에 선 얼굴이 어두운 남자를 보며 물었다.

“아, 소개해드릴게요. 이 분은 현준(玄隼) 일족의 족장인 계방응(季放鷹)입니다. 석 족장님이 수임을 하신다하여 함께 왔죠.”

뇌동이 말했다.

“계 족장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계방응은 안색이 여전히 어두웠으며 텅텅 빈 자리들을 둘러보다가 다시 석목에게 시선을 던졌다.

“후후, 석 족장님이 초대장을 보내 천하 백족들을 초대한다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 두 종족만 있는 것 같습니까?”

계방응이 좋지 않은 심보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뇌동은 안색이 변하며 불만이 가득한 시선으로 계방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계방응은 개의치 않으며 오만한 기색만 드러냈다.

“아, 축전이 열리려면 아직 한참 남았으니 계 족장님은 우선 앉아서 차부터 드시면서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석목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으며 답했다.

계방응이 입을 열고서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 했지만 뇌동이 그를 말렸다.

“그럼 석 족장님, 바쁘시니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뇌동이 다급하게 석목에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계방응을 끌고는 석대 왼쪽에 있는 두 의자에 앉았다.

미천거원의 세 장로는 산처럼 자리에 앉아서 손님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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