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50화 (750/916)

750화. 선장

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안색이 어두워졌는데 우아한 기품은 온데간데없었다.

게다가 아직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로 하얀 한기를 몸에서 빙글빙글 피워내더니 주변에 주먹만 한 얼음들을 만들었다. 남자가 만든 이 얼음들은 마치 순식간에 얼음 구체로 변한 것 같았다.

얼음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부문이 나타났다. 이것들에선 둘째 장로의 공격을 막을 때 만들었던 얼음벽보다 더 삼엄한 한기가 감돌았는데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얼음 구체가 이제 막 만들어졌을 때, 석목의 주먹이 그 위에 떨어졌다.

쩍!

하얀 얼음 구체는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뚫려버렸다.

석목의 주먹엔 끝없는 힘이 들어있었고, 계속해서 하얀 옷을 입은 남자에게로 떨어졌다.

남자의 몸통은 석목의 거대한 주먹에 부서져 주변으로 튕겨져 나갔다.

석목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찢어진 시체는 얼음으로 변하여 부서졌으며 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석목이 신식을 보내어 주변을 훑어보다가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얀빛 속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 남자가 나타났다.

“역시! 백문불여일견입니다. 석 족장의 실력은 역시 대단하군요.”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당신도 나쁘지 않네요.”

석목은 하얀 옷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며 힘을 줘 말을 내뱉었다.

“또 봅시다.”

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깊은 눈으로 석목을 한번 바라보고는 하얀빛으로 변하여 멀리 날아가 버렸다.

석목은 남자가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눈에 빛을 반짝였다.

“족장님, 괜찮으세요?”

대장로가 다가와서는 놀라움과 희열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석목은 대장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종족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온통 동경하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보여준 실력은 현장에 모인 모든 신경 강자가 힘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석목이 남자를 내쫓은 게 아닌가.

요족은 자고로 강자를 우러러 높이 모셨는데 이 점은 천하성역에서도 다를 바가 없었다.

예전에 백원왕은 팔황고족 중에서도 제일가는 강자였다. 백원왕이 이끄는 팔황고족과 천하 백족들은 천정이 전혀 두렵지 않았으며 천정과 싸우면서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하지만 석목이 이렇게 수련 경지가 자신보다 높은 천정의 신경 강자 앞에서도 차분하게 대응을 한 다음에 중요한 시기에 혼자서 둘째 장로를 구했으며 상대와 힘을 겨루다가 상대가 도망가게 만들었다.

이 담량과 실력은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석목을 인정했다.

다시 말해, 이제야 석목은 진정으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산 셈이었다.

석목을 바라보는 백비의 눈에서 두려움이 스쳤다. 그리고 곧바로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바뀌었다.

“대장로님, 혹시 저 자가 누군지 압니까?”

석목이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들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미천거원 일족은 비록 천 년 동안 은거를 했지만 대장로는 예전에 백원왕을 따라 천하를 누볐던 자라 종족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망이 꽤 높았다. 그러니 대장로가 알고 있는 건 아마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을 터였다.

대장로의 흐릿해진 눈에서 빛이 스쳤다. 그리고 한참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아마 천정의 십이 선장(仙將) 중에 십일 위인 빙왕 남궁경(南宫景)일 게다!”

“십이 선장이요?”

석목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막연한 표정을 지었는데 다들 소위 ‘천정의 십이 선장’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위기였다.

“천정의 십이 선장에 관한 소문은 저도 전해 듣기만 했죠. 듣기로 천정의 제왕인 제준 밑에는 실력이 막강한 신경 강자가 열두 명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준이 선위(仙位)를 물려줘 십이 선장이라 불렸죠. 그들은 모두 엄청난 실력을 지녔으며 고만족 같은 보통 신경들과 그들을 절대 나란히 놓고 논할 수 없을 정도였죠. 그런데……”

“그런데요?”

안화가 물었다.

“천 년 전에 벌어진 절세 대전 뒤로 십이 신장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죠. 아마 전쟁에서 죽었다고 들었는데…… 보아하니 소문에 불과한 것 같군요.”

서유금이 깊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놀랐다. 그러니까 천정에는 하얀 옷을 입은 남자처럼 막강한 인물이 열한 명이나 더 있다는 말이 아닌가.

“제가 알기로 천 년 전에 벌어진 전쟁에서 십이 선장 중에 몇몇이 죽어버려 이미 열두 명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걱정 마시지요. 십이 선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한들, 천정이 이렇게 여러 성역을 한 번에 공격하고 있으니 천하 성역에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할 겁니다. 아무리 강력해다 해도 필경 한 명뿐이지요.”

대장로가 두려워서 떨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옳습니다. 우리에게는 석 맹주도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 두려운가요?”

방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안색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게 석목이 조금 전에 열 한 번 째 선장을 쫓아내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전부 석목을 바라보며 기대에 찬 눈길을 보냈다.

석목이 짓는 표정은 담담했으나 머리는 매우 복잡해졌다.

조금 전에 치른 결투에서 석목과 하얀 옷을 입은 남자는 둘 다 온 힘을 다하지 않아 승부를 가릴 수 없었다. 하지만 석목은 몸속에 깃든 진기를 꽤 많이 소모해 잘 휴식하고 회복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상대는 홀로 와서 미천거원 일족의 수호 금제를 걱정하여 빨리 떠난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정말로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누가 살아남을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십이 선장은 마치 커다란 산처럼 석목에게 다가왔다.

신경에 들어서면 천정의 신장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예전에 다퉈본 놈들은 전부 천정의 전력 중에 말단들이었다.

석목은 깊은숨을 내뱉으며 표정을 차분히 바꾸었다.

그리고 두 먹을 꽉 쥐며 눈빛을 단단하게 내비쳐 투지를 불태웠다.

놈은 언젠가는 올 테니 두려워해도 소용이 없었다.

석목은 꿋꿋이 맞설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선장들을 해치워야만 천정과 맞설 수 있었다.

“맹우 여러분, 이렇게 강적이 소리 소문 없이 침입하게 한 건 우리 미천거원 일족의 책임입니다. 여러분들을 당황하게 만들어 너무 죄송하군요.”

석목은 사람들을 훑어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서유금도 조금 전에 천정이 침입한 걸 많이 걱정했다. 그러나 곧바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돌발 상황이었죠. 게다가 저놈은 굉장히 비범한 놈이니 미천거원족을 탓할 이유가 없네요. 그리고 석 형이 아니었더라면 저놈이 쉽게 물러서지 않았을 테죠.”

서유금이 하는 말은 석목에게 말하는 것 같았으나 실은 현장에 모인 여러 요족의 족장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광장에 모인 미천거원족들은 석목이 차분히 대응하는 모습을 보고는 전부 불안한 마음을 물리치며 냉정을 되찾았다.

대장로는 둘째 장로의 몸 상태가 가볍지 않아 종족 사람 두 명을 데리고서 둘째 장로를 부축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여러분, 천정이 이렇게 훼방을 놓는 건 우리가 연합하는 게 두려워서 짐짓 위세를 부려 연합하길 방해하려는 겁니다.”

석목이 족장들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천정 놈들이 보여주는 이런 행동은 실로 음흉하군요. 조용히 우리가 연합하는 걸 방해하려는 수작이지요. 석 형이 아니었더라면 정말 천정이 원하는 대로 될 뻔했습니다.”

안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정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않겠죠. 우리는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 의사대전으로 자리를 옮겨 함께 대책을 마련합시다.”

석목이 제안을 했다.

“그러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제 연합이 막 결성되었으니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워야겠어요.”

방진이 말을 이어갔다.

“네, 자세하게 논의를 해봅시다.”

서유금도 말을 덧붙였다.

다른 천하성역의 요족들도 아무 이견이 없었다.

그리하여 각 종족에서 온 다른 사람들을 잘 배치해둔 후에 석목은 족장들만 데리고서 의사대전으로 향했다.

* * *

모두가 착석하자 석목은 상자를 하나 꺼냈는데 그 속엔 하얀색 얼음이 놓여있었다.

“살릴 수 있겠습니까?”

서유금이 눈살을 찌푸리며 얼음 속에 갇힌 성배를 보면서 말했다.

“이 한빙은 남궁경의 신통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본체도 대항할 수 없었는데 성배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석목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방진이 단단한 얼음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양의 화염으로 이 얼음을 녹일 수는 있네. 목숨을 구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없애줄 수는 있지.”

석목이 말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얼음 속에 갇힌 적봉 성배가 일그러져서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고통을 없애지 않는다고 해도 수십 일이 지나면 이 얼음은 영력이 소진되어 자연스레 사라질 테지. 그때면 똑같이 죽음을 맞이할 텐데 괜히 수십 일 동안 더 고통을 감내하도록 둘 필요는 없지 않겠나?”

석목이 멈칫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빨리 벗어나게 하는 편이 좋겠어요.”

서유금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요.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세요……”

전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석목은 몸을 굽혀 하얗고 투명한 얼음을 받쳐 들고는 ‘훅!’하며 얼음을 화염으로 감쌌다.

단단한 얼음은 타오르는 화염 아래에서 물안개를 날리며 천천히 녹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하얀 얼음은 드디어 얼음물로 변하더니 석목의 손가락을 타고서 흘러내렸다.

“석두, 이 얼음은 정말 대단한데. 양의 화염으로도 완전히 증발시킬 수 없다니.”

채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전음했다.

남궁경이 소리소문 없이 잠입했기에 석목은 채아의 안전이 걱정되어 다급하게 채아를 불러들였다.

“이 십이 선장 녀석들은 너무 지독해. 예전에 만났던 놈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야. 앞으로 조심해야 해.”

석목이 전음으로 전했다.

얼음이 녹자 적봉의 성배가 다시 풀려났다.

하지만 성배가 녹는 순간, 성배에서 하얀 균열이 생기더니 곧 터져버리려 했다.

다들 결과를 예상했지만 여전히 표정은 어두워졌다.

이때, 대전 밖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기이한 영력이 흘러나와 흩어질 것 같은 성배를 감쌌다.

“대장로님.”

석목은 대전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비술로는 이 자를 살릴 수는 없지만 예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볼 수는 있소.”

대장로가 말했다.

“둘째 장로님은요? 상태가 어떻습니까?”

석목이 다급하게 다가가 물었다.

“좀 심각했죠. 하지만 많이 안정되어 생명에는 지장이 없더군요.”

대장로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석목은 긴장을 풀었다.

대장로가 앞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 법결을 날리자 허공에 별빛이 푸르게 반짝였다.

빛들은 평평하게 흩어지며 은하수처럼 사람들 앞에 펼쳐졌다.

“개(開).”

대장로가 한 글자를 내뱉자 푸른 별빛이 반짝이면서 옅은 광막으로 연결됐다.

이어서 대장로는 지팡이 끝으로 적봉의 성배를 톡톡 쳤다.

윙!

적봉의 성배를 둘러싼 빛들은 물결이 일렁이듯 사방으로 퍼져 푸른 광막과 부딪쳤다.

그러자 각 종족에서 온 족장들이 전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푸른 광막으로 시선을 모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