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51화 (751/916)

751화. 전방의 고급(告急)

광막에서 빛이 일렁이며 다양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어두운 하늘에 전함들이 백여 척 두 줄로 나란히 선 채 서로 포화를 던졌으며 금색과 은색 거대한 빛기둥이 하늘을 가로지르면서 허공에 수많은 구멍을 뚫었다.

이 장면은 청란성지에서 치른 전쟁보다 몇 배나 더 위엄이 있었으며 전함들이 갖춘 규모도 훨씬 컸다.

광막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폭발음이 들리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불러일으킨 놀라운 파동 때문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것은 삼대 종족 연합군과 천정이 교전을 하는 순간이 아닙니까?”

붉은 눈에 머리에 뾰족한 외뿔이 자라난 요족 족장이 광막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맞네요. 전쟁을 치르는 광경이에요.”

또 다른 족장이 답했다.

“삼대 종족 연합은 제가 예전에 들었던 소문과 달리 잘 이겨내고 있는 것 같군요.”

서유금이 침묵을 깼다.

“어떤 소문 말입니까?”

석목이 물었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천정이 전방에 지원병을 투입하여 연합이 간신히 막아내고 있다고 들었죠. 헌데 보아하니 아닌 것 같아요.”

서유금이 답했다.

이때, 푸른 광막에서 또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부서진 전함의 파편이 허공에 떠다녔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서로 다른 복식을 입은 수련자 수백 명이 서로 격렬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천하 성역 요족의 숫자가 더 많았고,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자는 적봉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장면은 적봉의 기억을 끄집어낸 것이라 적봉의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단지 법보에서 끊임없이 빛이 뿜어져 나오며 앞에 선 적들을 격살하는 장면만 보일 뿐이었다.

먼 곳을 둘러보니 천정이 투입한 인원수는 더 적었고, 또한 지금 삼대 종족 연합에게 밀리고 있었다.

광막에 펼치진 광경으로 유추해봤을 때 적봉은 그 당시 매우 조급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연합군의 부하들이 따라오기도 전에 성급하게 앞장서서 적군을 쫓아가고 있었다.

이때, 광막 깊은 곳에서 하얀색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놈이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얀 그림자는 바로 십이 선장에 중 한 명인 남궁경이었다.

남궁경이 허공에 서서 한 손가락으로 적봉을 가리키자 손끝에서 싸늘한 빛이 폭발하며 적봉에게로 날아갔다.

적봉이 몸을 날려 빛을 피하려 했지만 파란빛이 순식간에 적봉을 묶어버려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윽고 파란빛 속에서 부문이 줄줄이 나타났는데 그건 매우 특이해보였지만 법보는 아닌 것 같았다.

“또 다른 신경 강자가 있었어.”

석목의 미간에 파인 주름은 더욱 깊어졌으며 목소리도 더 심각해졌다.

단 한 번 공격을 날려 신경 강자를 제압할 수 있는 건 오직 신경 강자뿐이었다.

적봉이 미처 확인하지도 못한 순간 하얀빛이 날아와 적봉의 몸에 부딪쳤다.

이때 푸른 광막이 마구 흔들리며 펼쳐졌던 광경들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이 장면은 적봉이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었다.

허공에 드리운 푸른 광막이 서서히 흩어졌고, 석목이 손에 들고 있던 적봉의 성배도 한 줄기의 금빛으로 변하여 사라져 버렸다.

“여러분들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석목이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대전 속은 물을 뿌린 듯이 조용했다. 그리고 다들 안색이 어두워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들 자세히 봤는지 모르겠지만 적봉 장로님의 기억 속에 나타난 전함의 잔해는 전부 삼대 종족 연합의 전함이었어요.”

“그럴 리가……”

입을 쩍 벌린 교귀(蛟鬼) 부족 족장의 입에서 뾰족한 이빨이 드러났다. 미루어보건대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석 족장님이 말씀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거예요.”

암웅(巖熊) 부족의 족장이 말했다.

“삼대 종족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떠돌던데 전부 사실인 것 같군요. 천정과 비교했을 때, 실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이네요.”

서유금의 얼굴은 한 층 더 심각해졌다.

“신경 장로님마저 운명하셨어요. 삼대 종족 연합이 처한 상황이 매우 위급해 보입니다.”

뇌동이 말했다.

“천하 성역에 천정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삼대 종족이 알아서 성역을 지키리라 막연하게 생각만 했죠. 하지만 현실은…… 휴……”

요족 족장 하나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의 말을 듣자 다른 족장들도 전부 고개를 떨궜다. 아마도 다들 요행을 바랬던 모양이었다.

“여러분, 천 년 전에 천하 성역이 갖춘 실력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하지만 백공 족장님이 진두지휘하시는 가운데 힘을 합쳐 막아낸 결과, 천정은 끝내 천하 백족들을 정복하지 못했죠. 그리고 오늘, 백공의 후손이 여기에 계시며 우리는 다시 연합을 맺었어요.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반격할 때인데 다들 한탄만 하면서 포기하실 겁니까?”

방진이 침울한 분위기를 깨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석 족장님이 우리를 이끌고 있으니 천정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죠.”

안화의 목소리가 대전에서 울려 퍼졌다.

요족 족장들은 떨궜던 고개를 조금 들어올리긴 했으나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기색이었다.

“족장님들, 제 얘기를 한 번 들어보세요. 오늘 만난 선장의 뛰어난 실력을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그러니 그 놀라운 실력에 여러분들이 걱정을 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흑마 성역의 상황을 떠올려 보십시요. 우리가 만약 저항을 포기하게 된다면 천하 성역은 반드시 몰락할 겁니다.”

흑마 성역을 정복한 고만족은 행성들의 자원을 마구 채굴했다. 그리하여 풍요롭던 행성들은 황사만이 감도는 죽은 별들이 되어버렸고, 심지어 성핵마저 뽑힌 채 무너졌다.

“삼대 종족이 천정의 공격을 막을 수 있든 없든, 우리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야 합니다. 천하 성역의 모든 힘을 합쳐야만 천정 이 도둑놈들을 성역에서 내쫓을 수 있습니다. 하물며 천봉 일족을 비롯한 삼대 종족은 천정을 공격하는 중요한 세력이죠. 때문에 그들이 지금 긴급한 상황에 처해있으니 우리가 힘을 합쳐 지원해야합니다.”

석목이 말했다.

“하하, 석 형은 이제 우리 천하 성역 요족 연합의 맹주이시니 말씀만 하십시요. 삼대 종족을 어떻게 지원해야하는지 명령만 내리신다면 바로 따르겠습니다.”

안화의 목소리였다.

다른 요족 족장들도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서 형, 서 형은 계략에 능한 사람이니,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석목이 서유금을 바라보며 물었다.

“삼대 종족을 지원하려면 우선 우리 연합부터 단단하게 뭉쳐야하겠죠. 우리 연합은 미천거원 일족이 있는 영남성을 기지로 정한 후, 여기에 대형 전송진법을 만들어 다른 종족과 연결되어야합니다. 그리고 힘을 합쳐 삼대 종족을 지원하여 함께 천정을 공격해야합니다.”

서유금은 물이 흐르듯이 말했다.

“유문돈 일족(幽紋豘族)이 그 일에 능하다고 들었습니다. 월 족장님, 이 일을 맡는 건 어떠신가요?”

석목이 흑백 무늬 옷을 입은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석 족장님, 걱정 마십시오. 이 일은 우리 유문돈 일족이 맡겠습니다. 숨어서 참고 산 지 어언 천 년입니다. 드디어 우리가 필요한 일이 생겼군요.”

노인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월 족장님, 걱정 말고 진행하십시요. 필요한 모든 자원은 우리 비천서 일족에서 지원하겠습니다.”

서유금이 웃으며 말했다.

“외세를 물리치려면 우선 안쪽부터 안정시켜야합니다. 이제 우리 종족을 기지로 정했으니, 여기에 설치한 방어 대진을 더욱 강화해야겠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이 일을 맡으실 분이 계십니까?”

석목이 물었다.

“우리 종족에는 대대로 물려받은 방어 진법 도권이 있습니다. 전에는 자원이 부족한데다 몇몇 장로들도 대진을 잘 알지 못해서 간단하게 진법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진법을 펼치면 남궁경뿐만이 아니라 선장이 몇 명이나 더 온다고 해도 절대 쉽게 우리 종족에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대장로가 말했다.

“그렇다면 후환은 없겠군요. 그럼 바로 선봉에 설 부대를 조직하여 삼대 종족을 지원합시다.”

석목이 큰소리로 말했다.

“석 족장님, 이번에는 축전에 참여하러 온 거라 우리 종족은 몇몇 장로님들만 모시고 왔습니다. 만약 대군을 조직하려면 인원수가 턱없이 부족할 겁니다.”

암웅 일족의 족장이 말했다.

“그리고 전방으로 가서 작전을 펼치려면 전함도 있어야하겠죠. 그렇지 않다면 절대 천정과 싸울 수 없습니다. 헌데 우리 종족에는 원래 전함이 많지 않은 데다 이번에 전함을 가져온 것도 아닌지라……”

한 요족 족장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지금 삼대 종족이 처한 상황도 긴박해 보입니다. 천천히 힘을 모으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전함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종족에 전쟁을 치른 후에 남은 전함이 몇 척 있습니다. 그리고 천 년간 반격을 준비하며 추가로 전함들을 만들었죠. 그 전함들은 전부 부두에 있으니 언제든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장로가 말했다.

“네! 그럼 각 종족의 신경 강자들은 대전 오른쪽으로 모이세요.”

석목이 말했다.

안화가 일어서서 대전의 오른쪽으로 걸어가자 그 뒤로 열 몇 명이 뒤를 따랐다.

석목은 신경 강자들을 일일이 훑어보고는 천천히 유문돈 일족의 족장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월 족장님, 전송진법을 만드는 일이 우선입니다. 이번 전쟁엔 참여하지 않는 편이 좋으실 것 같군요.”

월 족장이 잠깐 망설이다가 대전 왼쪽으로 걸어갔다.

“대장로님, 종족에서 일어날 일을 맡아서 처리하셔야하니 대장로님은……”

석목이 말을 끝나기도 전에 대장로가 손을 흔들며 말을 끊어버렸다.

“이번 전쟁은 미천거원 일족이 복귀 후에 치르는 첫 번째 전쟁이죠. 어떻게 해서든 참여해야합니다. 종족에서 일어날 일들은 백비 장로에게 맡기면 됩니다.”

대장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석목은 이미 결심을 내린 대장로를 막을 수 없었다.

신경 강자들 말고도 천하 요족의 여러 성계 강자들도 전부 참전하겠다며 나섰다.

석목이 그 숫자를 세어보니 족히 수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족장님들, 지금은 긴급한 상황이라 선발 주자들이 전방에 가서 지원하는 겁니다. 천정과 치를 전쟁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겠죠. 각 종족의 장로님들은 우선 각자 머무는 행성으로 돌아가 전력을 모은 후에 빨리 전방으로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물자는 비천서 일족에서 책임지는 편이 좋겠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맹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족장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 * *

모든 일이 질서 정연하게 진행되었다.

사람들은 대장로를 따라 미천거원 일족의 서쪽에 자리한 한 산골짜기로 향했다.

골짜기 입구에는 백 장이나 되는 금색 문이 하나 서 있었으며 그 위에 ‘함항(艦港)’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편액이 가로놓여 있었다.

문틈에서는 옅은 금빛 막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대장로가 문 앞으로 다가가 마름모꼴 영패를 꺼내 허공에 내밀었다.

그러자 영패에서 빛이 번득이며 곧장 날아가 금빛 광막 속으로 떨어졌다.

금빛 광막에서 한바탕 빛이 출렁거리더니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사람들은 즉시 대장로를 따라 입구로 들어갔고, 잠시 후에 끝없이 넓은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는 모양이 다양한 전함 백여 척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석목은 전함들을 훑어보며 속으로 의아하게 여겼다.

광장에 전시된 전함들은 석목이 봤던 전함들과 달리 몇 척만 마름모꼴이었고, 대부분은 둥그런 전함이었는데 크기는 마름모꼴 전함보다 작아 마치 거대한 원판과도 같았다.

둥그런 전함 위, 가운데에는 거대한 금색 기둥이 하나 서 있었고, 그 위에는 각종 기괴한 부문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둥그런 진법과도 같았다.

그 주변에는 군사를 배치할 수 있는 함교(艦橋)가 서 있었고, 함교 밖에는 둥글게 뚫린 기둥이 전함 주변에 촘촘히 배치돼 있었다.

기둥에는 붉은 화염 무늬와 어두운 금빛 무늬가 새겨져 있어 몹시 기이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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