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2화. 호천성염(昊天聖焰)
“우와, 석두! 둥그런 전함은 처음이야!”
채아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대장로님, 전함의 모양새가 매우 특이해 보이는군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네요.”
석목은 전함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마름모꼴 전함은 천 년 전에 남겨진 전함이고, 둥그런 전함은 이후에 만든 전함이지요. 이런 모양으로 만든 이유는 천정이 포위해왔을 때, 더 수월하게 반격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모양은 괴상해도 전력은 평범한 전함 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대장로가 석목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군요. 그리고 이 둥그런 전함엔 특별한 기운이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이 전함은 특별한 재질로 만들었죠. 이 금속 재질은 영남성에만 있는건데, 영남성에 은둔을 하게 된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런 금속성으로 만든 전함은 평범한 전함들 보다 두 배는 더 단단하며, 수호 진법까지 더한다면 적진으로 빠진다고 해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제대로 사용하면 전쟁에서 예상밖의 힘을 발휘할수 있습니다.”
대장로가 말했다.
“누가 이런 기묘한 전함을 설계해냈답니까?”
방진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이 전함을 설계한 분은 백공입니다. 영남성을 미천거원 일족의 임시 거처로 지정한 분도 백공이시지요. 하지만 여기서 계획한 많은 일들을 진행하시기도 전에 그만……”
대장로가 한숨을 내뱉었다.
“백공……”
그 말을 들은 석목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 *
반 시진 후에 석목과 여러 신경 강자들은 나란히 금색 문 밑으로 다가갔다.
석목은 전투 복장으로 무장한 미천거원족 전사들 오천여 명과 요족 강자들 수백 명을 향해 외쳤다.
“등함!”
석목이 명령을 내리자 빛이 수천 갈래 밝아지며 채색 빛으로 변하더니 다시 전함으로 날아갔다.
대략 반각 후에 둥그런 전함 다섯 척이 굉음과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구름을 뚫고서 영남성 밖에 뜬 밤하늘로 향했다.
전함 가운데에 솟은 거대한 돌기둥에서 부문들이 번지며 금빛이 흘러나와 전함 전체를 감쌌다.
전함마다 미천거원족 천여 명과 요족 전사들이 타고 있었으며 그들은 몇몇 신경 강자들이 이끄는 가운데 전함 곳곳에 설치된 진법들을 익혔다.
석목은 가운데 있는 전함의 함교에 서서 눈에 빛을 반짝이며 별바다의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허나 이 와중에 채아는 석목의 어깨에서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 * *
며칠 뒤.
전함 다섯 척은 별바다에서 안정적으로 전진했고, 그동안 전함 내부에는 미세한 진동마저 없었다.
석목이 전함에 있는 넓고 화려한 방에 난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방 안에 놓인 탁자에는 먹음직스러운 다과가 놓여있었으며 채아가 탁자에서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었다.
석목은 채아가 그러거나 말거나 심각한 얼굴로 별하늘만 바라보았다.
삼대 종족이 처한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게다가 심지어 이미 패배를 당했을 수도 있었다.
종수와 얽힌 일 때문에 천봉 일족이 여간 탐탁지 않았지만 천정과 싸우려면 기필코 삼대 종족과 연합을 해야만 했다.
천정이 천하 성역으로 파견한 십이 선장들 중에 총 몇 명이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만약 남궁경 혼자라면 어떻게 해서든 맞서 싸우겠지만 다른 선장이 더 있다면 매우 위험해질 터였다.
석목은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거두어들이고는 한쪽 의자로 가서 앉았다.
“아, 이 물건을 잊어버릴 뻔했군!”
석목은 푸른 옥간을 꺼내들었다.
옥간에는 작은 글씨가 촘촘하게 적혀있었다. 바로 이 옥간은 붉은색 신후 조각상 속에서 꺼낸 과두(蝌蚪:올챙이) 문자가 새겨진 옥간이었다.
이 과두 문자는 석목의 머릿속으로 들어간 후에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석목은 미리 탁본을 남겨두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한 번에 몰려온 바람에 석목은 이 일을 깜빡 잊고 있었다.
“여봐라!”
석목이 소리를 질렀다.
“족장 어르신!”
방문이 열리며 미천거원족 한 명 걸어 들어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대장로님을 모셔오너라.”
석목이 지시를 내렸다.
대장로는 견식이 높아 아마 이런 과두 문자를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잠시 후에 대장로가 문밖에 나타났다.
“족장님, 찾으셨습니까?”
대장로가 인사를 올렸다.
“사사로운 공간에서는 인사를 올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석목이 손을 흔들며 말했지만 대장로는 여전히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긴장을 풀지 않았다.
석목은 쓴웃음을 찟더니 특별히 신경을 더 쓰진 않았다.
“대장로님이라면 이 물건을 알아보시리라 생각했습니다.”
석목이 대장로에게 옥간을 건넸다.
대장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옥간을 받아 신식으로 훑어보았다.
“음, 이것은…… 상고신문!”
대장로가 작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이 과두 문자의 이름이 상고신문이라는 말씀입니까?”
석목은 그 말을 듣자 매우 기뻐했다.
“그렇죠. 이건 상고시대의 수련사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특별한 문자인데 상고시대에도 그리 보편화된 문자는 아니었습니다. 오래전에 백원 족장과 함께 유적지를 떠돌다가 우연히 이런 문자를 배웠죠. 그리하여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대장로가 한참 침묵을 하다가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장로에게 옥간의 내용을 계속 읽어보라고 말했다.
허나 이런 문자를 읽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대장로는 매우 느리게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문자를 읽고 있는 대장로의 얼굴는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했다.
이 문자에는 어떤 대단한 내용이 있는 걸까?
한참 후에야 대장로는 옥간에 적힌 내용을 다 읽었다.
“족장님, 이 옥간은 어디서 가져온 겁니까?”
대장로가 기쁜 얼굴로 물었다.
석목은 있는 그대로 문자를 구한 출처를 대장로에게 말했다.
“족장의 신물에 이런 보물이 숨어있었다니.”
대장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장로님, 이 문자에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석목은 참지 못하고 다그쳤다.
“이건 상고 신통이에요. 호천성화를 수련하는 법문이지요.”
대장로가 말했다.
“호천성화?”
석목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마도 어떤 비경이나 보물이 기록되어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공법 신통이 적혀있었다.
석목은 이미 많은 공법을 익혀서 그동안 죽인 신경 강자들의 저장 반지만 보아도 공법 전집을 수십 권씩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석목에겐 공법을 깨닫고 수련을 할 시간이 없었다.
“족장님, 이 신통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호천성염은 상고시대의 유명한 신통이죠. 그 위력은 빙백신광보다 뛰어납니다. 그리고 이 신통은 족장님에게 매우 적합한 신통입니다.”
대장로는 석목이 실망스러워 하는 걸 눈치 챘는지 곧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대장로가 입을 벌리고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한 마디로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제가 이 문자를 지금 통용되는 문자로 바꿔드릴 테니 한번 읽어보십시요.”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로는 빈 옥간을 하나 꺼내 손가락 끝에 하얀빛을 만들어내더니 이내 빠르게 써내려갔다.
“석두, 둘이 뭐해?”
채아가 볼록 나온 배를 받쳐 들고선 비틀거리며 날아와서는 트림을 하며 물었다.
“먹보야, 대장로님을 방해하지 마.”
석목은 채아의 입을 잡고는 심신으로 전음을 보내며 호천성염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뭐! 호천성염!”
채아는 몸이 굳더니 표정마저 얼어붙었다.
그리고 곧바로 그 자리에서 통통 뛰었다.
“석두, 잘못 들은 게 아니지? 정말 호천성염이라고?”
채아가 흥분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왜? 넌 들어봤어?”
석목이 물었다.
“와하하! 나 대박 났나봐. 대물림이 끊긴 호천성염을 내가 찾았다니. 와하하!”
채아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좀 해!”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채아를 덥석 잡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입이 붙어버린 채아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석목은 대장로를 쳐다보았다.
대장로는 집중을 하고 있어서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석목은 눈치를 살피며 채아를 옆방으로 데려갔다.
“채아, 호천성염이 뭐야?”
석목이 채아를 놓아주며 물었다.
채아는 조금 전보다 차분해진 것 같았지만 눈에 어린 미칠 듯한 희열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석두,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이 호천성염은 우리 건앵 일족에겐 매우 중요한 거야. 건앵 일족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계속 상고 신통인 호천성염을 찾아다녔어.”
채아가 말을 마치고는 큰소리로 웃었다.
“건앵 일족과 호천성염이 무슨 관련이 있어?”
석목이 물었다.
“석두, ‘쌍생지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
채아가 물었다.
“물론 들어봤지.”
석목이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계에는 화염의 종류가 무수히 많은데 때로는 완전히 상반된 성질을 지닌 두 가지 화염이 나타나 상생상극(相生相剋)하여 서로 융합하면서 신기한 극변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다만 이런 쌍생지화는 매우 희소하여 지금까지 나타난 것도 몇 쌍 정도뿐이었다.
“호천성염은 양의 화염 중에 하나야. 그리고 우리 건앵 일족의 몸속에 깃든 본명 요화(妖火)는 건원요화(乾元妖火)라고 부르지. 호천성염과 우리 건원요화는 쌍생화염이라 서로 융합하면 음양 극변을 일으킬 수 있어. 만약 호천성염이 있다면 나는 곧장 신경을 돌파할 수 있다고!”
채아가 들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대장로가 다가왔다.
“족장님, 끝냈습니다.”
대장로가 옥간 두 개를 석목에게 건네줬다.
채아가 눈에 빛을 반짝이며 두 옥간을 바라보았지만 석목은 채아를 꽉 붙잡고 있었다.
“대장로님, 감사합니다.”
석목은 신식으로 옥간을 훑어보고는 곧바로 희색을 드러냈다.
호천성염은 역시 정교한 신통이었다. 하지만 수련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몸속에 양의 화염이 깃든 사람들만이 수련을 할 수 있었다.
호천성염을 원만 경지까지 수련하면 모든 물체를 태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보도 녹일 수 있는 굉장한 신통이었다.
그러나 이 화염 신통을 시전하면 진기를 많이 소모하며 신체에 큰 부담을 줘 체질이 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성염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석목은 신식을 거두어들이고는 미소를 지었다.
수련 조건이 까다롭긴 했지만 다행히 석목에겐 매우 적합한 공법이었다. 이러니 대장로가 석목과 어울리다고 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대장로님, 역시 안목이 좋으시군요. 이 신통은 제게 아주 유용할 듯 합니다.”
석목이 말했다.
“우리 신경들은 이런 적합한 신통을 여러 가지 수련해야하지요. 적과 싸우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이런 신통을 수련하면 현묘한 법칙의 힘을 깨우칠 수도 있으니까요.”
대장로가 말했다.
“법칙의 힘을 깨우칠 수 있다고요! 정말입니까!”
너무 벅차오른 나머지 석목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석목은 ‘법칙의 힘’이라는 말을 이미 귀가 닳도록 들었으며 오랫동안 동경해왔다. 하지만 ‘법칙’은 워낙 현묘한 영역이었기에 계속 입문하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법칙을 깨닫는 방법을 듣게 된 것이었다.
“후후, 족장님은 이제 막 신경에 도달했으니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신경 강자는 이 세계에서도 가장 강한 수련자로 다양한 공법들과 신통을 최고 단계까지 수련할 수 있습니다. 하여 자연스럽게 이런 천지대도(天地大道) 본원의 법칙을 깨우칠 수 있지요.”
대장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요. 대장로님께서 가르쳐주시지요.”
석목은 곧바로 겸손한 태도를 내비쳤다.
석목은 미천거원 일족의 족장이며 연맹의 맹주라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그러니 대장로도 수련을 하면서 깨우친 것들을 석목에게 가르쳐주는 편이 좋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