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5화. 첩자
석목은 대장로를 비롯한 이들에게 기다리라고 하고는 여인을 데리고 안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들 석목의 표정이 달라지는 걸 보고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석목이 말을 꺼내지 않았으니 다들 더는 캐묻지 않았다.
“백박 장로님, 맹주님이 저 사람과 단 둘이 들어가셨는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방진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괜찮을 것 같군요. 저 여인은 고작 성계 경지라 맹주님과 천지차이입니다. 별 일 없겠죠.”
대장로가 고개를 흔들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석목이 짓는 표정을 보니 회색 옷을 입은 여인과 알고지내는 사이 같았다. 과연 두 사람은 안에서 무슨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석목은 여인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 후에 손을 흔들어 빛을 수십 갈래나 방 곳곳에 날려 파란 진법을 펼치고는 돌아서서 회색 옷을 입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금 사저, 여기서 다 만나네요. 어떻게 이곳에 계십니까?”
석목은 웃는 얼굴로 물었다.
회색 옷을 입은 여인은 석목을 한 번 흘겨보고는 면사포를 거두었다. 그러자 중생들을 쓰러뜨릴만한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면사포를 쓰고 있던 여인은 다름 아닌 금소채였다.
“수련 경지가 신경에 도달했구나. 게다가 요족 연맹의 맹주가 되다니. 우리 설아가 널 걱정하고 잊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군.”
금소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석목은 눈썹을 치켜떴는데 눈에선 이채가 스쳤다.
“금 사저, 아직 제 물음에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어째서 천하 성역에 계십니까?”
석목은 마치 금소채가 한 말을 듣지 못한 듯이 계속해서 물었다.
“사저라고 부르니 부담스럽구나. 너는 신경에 도달했는데 나는 고작 성계 경지니, 그냥 내 이름을 부르면 된단다. 나야 물론 너를 찾으러 이곳까지 왔지.”
금소채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절 찾으러 오셨다고요? 무슨 일입니까?”
석목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천정 사람들을 찾고 있다며? 나는 천정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
금소채가 음흉한 웃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석목은 그 말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천하 성역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지금은 대체 어디에 속하신 신분이시죠? 그리고 왜 굳이 저에게 천정이 있는 곳을 알려주러 왔습니까?”
석목은 금소채를 바라보며 단숨에 질문을 여러 개 던졌다.
“흥, 널 도와주려 했는데 오히려 날 의심하다니. 됐다. 이 일은 나도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네가 알아서 하거라.”
금소채가 코웃음을 지으며 하얀 부적을 하나 꺼내더니 찢어버렸다.
그러자 하얀 기류가 허공에 나타났으며 별빛이 흐르면서 천천히 하얀 소녀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깜짝 놀랐다.
이 하얀 옷을 입은 소녀는 서문설이었다.
석목은 서문설을 보자 칠세 윤회를 했을 때 본 광경이 떠올라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석목은 지금 마음을 다스리는 단계가 매우 높은 수준이라 곧바로 요동치는 이상한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다.
석목은 금소채를 한번 쳐다보았다. 가만 보니 금소채는 지금 서문설과 함께 있는 것 같았으며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서문설이 금소채에게 이곳으로 오라고 시킨 것 같았다.
“서문 도우, 오랜만이군.”
석목이 입을 열었다.
“석 도우, 오랜만이야.”
서문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둘은 인사를 나누고는 한참 동안 무슨 말을 이어갈지 몰랐다. 이윽고 침묵이 흘렀으며 분위기는 매우 어색해졌다.
“하하 왜? 둘이 진심이라도 털어놓게? 내가 있어서 불편해? 그럼 피해있을게.”
금소채가 교활한 웃음을 내비치며 이제 막 밖으로 걸어 나가려했다.
“그만해!”
서문설은 비록 법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금소채는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며 웃었다.
“만리부혼술(萬裏附魂術). 서문 도우가 허공에 형체를 드러낸 걸 보니 수련 경지가 이미 신경을 돌파했군?”
석목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석목이 내는 목소리는 마치 고요한 우물 속에 담긴 물과 같았다.
서문설은 손가락을 파르르 떨며 눈꺼풀을 떨구고는 고개를 들었다.
“네 수련 경지도 만만치 않아. 역시 백원왕의 후손은 남다르군.”
서문설이 담담하게 말했다.
“후후, 내 일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석목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서문설은 미간을 찌푸렸다 풀었다.
“만리부혼술은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도 형태를 드러낼 수 있지만 신경 중기 강자도 성역을 넘나드는 건 어렵다고 하지. 그러니 서문 도우도 천하 성역에 있는가?”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계속해서 물었다.
“그래. 나는 천정의 어천(禦天) 신장이야.”
서문설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천 신장?”
석목이 실눈을 떴다. 석목은 비록 짐작을 하긴 했으나 이렇게 직접 말을 전해 들으니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슬픈 감정이 치솟았다.
“내 신분은 알고 있을 테지. 그리고 너와 나는 지금 대립하는 입장이야. 나중에 본체로 만나게 되면 전투를 벌여야할 텐데 왜 나를 보자고 한 건가?”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하지만 서문설의 대답을 듣자 석목은 멈칫했다.
“천정의 대군이 있는 곳을 알려주려고 너와 만나자고 했어. 한 달 전에 삼대 종족과 천정은 묵운성 근처에서 격전을 치렀지. 그리고 삼대 종족이 패배해서 반귀 일족이 머무는 무암성(武巖星)으로 도망갔어. 그래서 천정의 대군도 이미 쫓아가고 있지.”
석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서문설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한참 뒤에야 평정심을 찾았다.
석목은 서문설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천정의 신장이라며? 왜 이런 일을 나에게 말해주지?”
서문설은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원래도 가뜩이나 아름다웠는데 저렇게 웃고 있으니 마치 꽃이 만개한 것만 같아 석목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석목이 짓는 표정을 살피던 서문설의 눈빛 깊은 곳에는 기쁨이 스쳤다.
“나도 다 계획이 있지. 너를 속인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줘.”
서문설이 천천히 말했다.
“네가 나를 속이는지 아닌지는 난 알 수 없지. 너희가 온 게 천정의 음모일 수도 있는 일이고.”
석목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서문설은 눈살을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삼대 종족이 이렇게 천정에게 무너지는 꼴을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이라면 내 말을 믿지 않아도 좋아.”
말을 마친 서문설은 몸에 하얀빛을 반짝이며 순식간에 흩어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호호, 석목 이 녀석,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설아는 너를 도우려 했는데 이렇게 화만 나게 만들다니.”
금소채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석목은 금소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자리에 서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족히 일각이나 지나서야 석목은 흔들리던 눈빛이 단호해졌다.
서문설이 말하는 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삼대 종족이 천정에게 멸망당하는 꼴을 빤히 보고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석목은 이 위험천만한 도전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서문설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니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금 도우님, 알려주셔서 고맙군요. 하지만 천하 성역과 관련된 일이니 이렇게 그냥 보낼 수는 없어요. 번거롭더라도 여기에 계속 있어주시죠.”
석목은 금소채를 향해 말을 던지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만, 무암성으로 갈 건가? 가기로 결정을 했다면 설아가 전해줄 말이 있다고 했어. 너희 연합에 천정의 첩자가 있으니 네 일거수일투족을 천정에 보고할 거라고 했어.”
금소채가 다급하게 말하여 옥간을 하나 꺼냈다.
석목은 옥간에 신식을 보냈다.
“고마워요.”
석목은 그리 말을 하고는 법결을 하나 펼쳤다.
그러자 파란 광막이 양옆으로 펼쳐지며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석목이 걸어 나가자 파란 광막이 다시 닫혔다.
금소채는 마치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조급해하거나 화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금소채는 입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을 흔들어 하얀 침상을 하나 펼쳤다. 그리고 침상에 부드러운 비단을 잔뜩 깔고는 그 위에 편안하게 누웠다.
* * *
석목은 빠르게 대청으로 갔다. 그러자 근처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전부 일어섰다.
“맹주님, 저분이 천정과 삼대 종족이 향한 곳을 알려주었습니까?”
대장로가 가장 먼저 다가와서 물었다.
석목은 사람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눈에서 이채를 뿜어내며 말했다.
“저 아씨는 천정과 삼대 종족이 격전을 치르는 걸 보긴 했으나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모르는 것 같군요.”
그 말을 듣자 사람들은 전부 실망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어찌됐든 계속 여기서 머물 수는 없겠죠. 수색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전부 불러들이세요.”
석목이 말했다.
다들 대답을 하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대 장로님, 잠시만.”
석목은 밖으로 나가려던 대장로를 불러 세웠다.
“족장님, 무슨 일입니까?”
대장로는 자리에 서서 모두가 나간 후에야 석목에게 물었다.
“대장로님이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석목이 대장로의 곁으로 다가가 입만 움직이며 전음을 보내 첩자와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었다.
대장로는 깜짝 놀랐다.
“족장님, 걱정 마십시요. 제가 잘 해결하겠습니다.”
대장로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반나절 뒤에 모든 사람들이 돌아왔다.
연합에서 중요한 몇몇 인물들이 대청에 모여 석목이 명을 내리길 기다렸다.
하지만 석목은 두 눈을 감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들 이상하게 여겼지만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선 한쪽에 앉아있었다.
시간이 조금씩 흘러 또 반 시진이 지났다. 그러자 발걸음 소리와 함께 대장로가 들어왔다.
석목이 눈을 번쩍 뜨며 대장로를 바라보았다.
대장로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쪽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석목은 긴장을 풀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천정과 삼대 종족의 격전을 목격했다는 아씨가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제 추측으로는 반귀 일족의 거점 행성인 무암성으로 갔을 것 같군요.”
“무암성이요? 무암성은 여기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반귀 일족의 수호 대진은 천하 성역에서도 유명하지요. 만약 삼대 종족이 패했다면 거기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크겠네요.”
비천서 일족의 신경 노인이 입을 열었다.
다들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암성으로 갑시다!”
석목이 명을 내렸다.
“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전함 다섯 척은 곧바로 방향을 틀고는 무암성으로 날아갔다.
* * *
일각 후.
석목과 대장로는 전함 밑에 자리한 한 비밀 석실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서 들어갔다.
석실 안은 어두웠지만 석목과 대장로는 방 안에 있는 모든 걸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방에는 나무 의자 세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으며 의자에는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세 사람이 풍기는 기운으로 봤을 때, 모두 성계 존재였다.
하지만 외모와 복장만 보면 이들 중 한 명은 원요(猿妖), 또 한 명은 서요(鼠妖),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마요(馬妖)였다.
이들은 머리가 전부 검붉은 고리에 묶여있었으며 눈빛이 텅텅 빈 채 의식을 잃어 비술로 신혼을 통제받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두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죽이지는 말고 통제만 하면 되겠죠.”
석목은 세 사람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 명은 금소채가 건넨 옥간에 적혀있는 천정의 첩자들이었다.
“천정이 우리 연합에 첩자를 심어두었다니.”
“예상한 일이죠. 남궁경이 온 목적은 훼방을 놓으려는 것이었는데 일이 성사되지 않았으니 첩자를 둬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미 어떤 음모를 꾸몄을지도 모르지요.”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족장님, 천정이 우리 연합에 눈을 심어두었다는 걸 진즉에 알아차리셨나요? 그리고 오는 동안 그 첩자들이 이 세 사람이라는 걸 밝혔고요? 족장님, 정말 대단하시군요.”
대장로가 존경심을 드러냈다.
석목은 입을 파르르 떨었다.
“……뭐, 대충 그렇죠.”
석목은 우물쭈물했다.
“아, 이 녀석들이 어떻게 천정과 연락을 하고 있었는지 잘 알아보셨습니까?”
석목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이미 알아봤는데 전신진반(傳訊陣盤)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더군요.”
대장로가 손을 흔들어 하얀 진반을 세 개 꺼냈다.
“네, 대장로님, 그럼 장로님의 비술로 셋을 다스려 천정에 가짜 정보를 흘려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해요. 또한 절대 천정에 우리가 움직이는 걸 들켜서는 안 되겠지요.”
석목이 말했다.
“족장님, 걱정 마십시요.”
대장로가 대답했다.
“그럼 여긴 대장로님께 맡기겠습니다.”
석목이 다시 밖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