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56화 (756/916)

756화. 고번(古幡)

그리고 석목은 곧장 금소채에게로 다가가 서문설과 천정 사이에 얽힌 일을 캐내려 했다.

금소채는 실력이 석목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매우 간교하고도 교활했다.

석목은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속내를 들켜버릴 뻔하여 금소채의 의심을 받으며 허겁지겁 그 방에서 나와야만 했다.

석목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무암성에 도착하려면 아직 열흘이나 넘게 남았으니 석목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 후에 석목의 몸에선 노란빛이 한 층 떠올라 밝고 노란 화염으로 변하더니 호천성염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호천성염은 석목의 몸을 둘러싼 채로 회전하고 있었는데 마치 부드럽게 흐르는 물과도 같았다.

그렇게 여드레 동안 앉아있던 석목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손을 튕기자 호천성염이 크기가 몇 장이나 되는 화염 구렁이로 변하여 방 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뾰족하게 튀어나온 구렁이의 이빨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석목이 낮게 소리를 지르며 손을 내밀자 화염 구렁이가 뒹굴더니 화염 호랑이로 변하여 하늘에서 뛰어다녔으며 입에서는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게 마치 진짜 호랑이 같았다.

석목은 두 눈에 금빛을 반짝이며 끊임없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러자 손가락 끝이 허공에 닿을 때 마다 호천성염이 매번 새로운 형태로 변하였다.

그 모습은 용, 호랑이, 곰, 표범을 비롯한 흉악한 맹수들처럼 생생하게 보였다.

호천성염은 석목의 손에서 뜨거워졌다.

석목이 손을 흔들자 화염을 둘러싼 거대한 곰이 점점 불어나다가 이내 터져버렸다. 그리고 다시 호천성염으로 변하더니 석목을 감싸고 있는 화염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하지만 석목은 기뻐하기는커녕 미간에 주름만 더 깊어졌다.

오랜 고생을 한 끝에 호천성염은 훨씬 강력해져 이미 대성 정상에 이르렀으며 반보만 더 나아가면 대원만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반보는 마치 하늘과 땅 사이처럼 멀게 느껴져 아무리 애를 써도 나아갈 수가 없었다.

석목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만약 채아가 폐관 수련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쌍생극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처음 호천성염을 수련했을 때, 실력이 강해지는 수준이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호천성염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극변을 이루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수련을 하는 쪽보다는 훨씬 빨랐다.

석목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석목은 여러 번 고민한 결과 그래도 대장로님께 다른 방법이 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정과 치를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온 지금, 상대 진영은 십이 선장 중에 한 명이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또한 지난번에는 상대가 보수적으로 다가와 진정한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만나게 되면 반드시 끝을 봐야만 했다.

선장이 도망을 가 축하를 해주러 왔던 천하 성역의 요족들이 잠시나마 안도를 했지만 진정한 싸움을 펼치게 된다면 석목은 전력을 다해 상대가 날리는 일격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석목은 가능한 빨리 호천성염을 원만의 경지로 끌어올려 필살기를 하나 더 늘려야 상대와 제대로 겨룰 수 있었다.

이때, 전함이 갑자기 멈춰버렸다.

“어떻게 된 건가?”

석목이 멈칫했다.

혹시 천정 놈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쏜살같이 날아가 순식간에 전함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석목은 아래를 쭉 훑어보고 나서야 전함이 멈춰선 이유를 알아차렸다.

앞쪽에는 빨갛게 타오르는 화염이 끝없이 펼쳐져 거대한 강줄기처럼 모여서 물 흐르듯 들끓고 있었다.

강줄기는 칠흑같이 어두웠던 별하늘을 붉게 비추며 석목 일행의 앞길을 꽉 막아버렸다.

석목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긴 강에선 붉은 화염이 일렁였는데 마치 깊은 바다에서 파도가 출렁이는 것과 같았으며 화산에서 용암이 터지듯 화염은 다양한 형태를 만들었다.

이 붉은 화염은 만 리를 비추는 태양처럼 화산을 이루었다가 이내 다시 무너졌다. 그러자 그 흐름 속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출렁이는 화염이 허공을 가볍게 찢자 공간의 요동치는 힘 때문에 화염 강줄기가 더욱 크게 흔들렸다.

“족장님, 이건 천하 성역에만 있는 유화조석(流火潮汐)입니다. 전함으로는 뚫고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운이 너무 따라주지 않네요. 이런 걸 다 만나다니.”

대장로가 석목의 옆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돌아서 갈 방법은 없습니까?”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마 안 될 겁니다. 이 유화조석은 규모가 매우 큰데다가 규칙도 없이 흘러 돌아가면 도리어 시간만 낭비할 뿐이지요. 여기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유화조석은 속도가 매우 빠르니 이삼 일이면 사라질 겁니다.”

대장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 온힘을 다해 속도를 내도 모자랄 판에 이런 별바다 난류를 만났다니.

이때, 전함마다 모인 다른 신경 강자들도 날아와 이 일을 논의했다.

그러나 반나절씩 토론을 했지만 결국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연합을 이루는 대군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런 별바다의 기이한 현상을 본 적도 없었기에 전부 전함에서 날아 나와 보기 드문 광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허나 맹주인 석목은 남들처럼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또한 무암성에서 펼쳐질 전쟁을 생각하니 애간장이 탔다.

이때, 붉은빛이 전함에서 빠져나와 흐르는 불길을 향해 날아갔다.

석목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빛은 안화였다.

안화는 순식간에 유화조석으로 다가가 멈춰 섰다. 그리고 끝없이 치솟는 화염을 바라보는 안화의 눈에는 기쁨이 어렸다.

안화는 입으로 무엇인가를 외우며 몸에 빛을 반짝였다. 그러자 작은 붉은색 깃발이 나타났는데 그 깃발에는 구명이 몇 개 뚫려있어 보기에도 매우 너덜너덜했다.

안화가 법결을 날리자 붉은색 깃발에 빛이 한층 나타나더니 쭉쭉 불어나 곧 사람만한 깃발로 변하였다.

크게 늘어난 깃발은 더 심하게 망가져 보였으며 곳곳에 구멍이 뚫려 언제 찢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깃발에는 노란 그림이 한 폭 수놓아져 있는데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그 형태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안화는 표정을 굳히더니 두 손으로 끊임없이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깃발의 붉은빛이 점점 밝아졌다.

안화는 매우 힘겹게 깃발을 흔들었다.

안화가 입으로 주문을 외우자 법결이 끊임없이 깃발로 날아갔다. 깃발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빛은 그제야 서서히 응집되어 크기가 수 척에 이르는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안화가 손가락으로 앞을 짚자, 붉은 깃발이 앞으로 날아가 유화조석 속으로 향했다. 하지만 깃발은 멀리 가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깃발에 이는 붉은색 소용돌이가 갑자기 윙윙거리더니 유화조석에 깃든 무궁무진한 화염의 힘을 삼켰다.

커다란 깃발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은 순식간에 밝아지며 뚫렸던 구멍이 조금씩 복구되었다.

다만 복구되는 속도가 너무 느려 완벽히 복구되려면 적어도 몇 년은 걸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화의 얼굴에는 여전히 희색이 역력했다.

“안 형.”

안화는 그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법결을 흐트러뜨릴 뻔했다.

석목이 안화의 옆에 나타났다.

“석 형…… 아니, 맹주님.”

안화가 웃는 얼굴로 석목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손은 계속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람들 앞에서만 맹주라고 부르게. 지금은 우리 둘뿐이니 편하게 불러도 되지. 안 형,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석목이 붉은색 깃발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건 제가 얼마 전에 얻게 된 망가진 법보죠. 신통이 담긴 법보라 복구할 수 있을지 시도해보고 있었어요.”

안화가 말했다.

“그래, 안 형, 이 법보를 한번 보여주겠는가?”

석목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안화는 조금 의아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깃발이 화염을 흡수하길 멈추었다.

붉은색 깃발이 유화조석에서 날아 나왔다. 그러자 깃발에서 나던 빛이 사라지며 원래 크기로 변한 후에 석목의 손에 떨어졌다.

“안 형, 고마워.”

붉은색 깃발을 손에 들자 몸속의 호천성염이 막 움직이며 깃발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윙!

깃발은 곧장 몇 배나 커졌다. 그리고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던 그림에서도 빛이 번쩍이며 노란 불길을 뿜어냈다.

“음! 이 고번(*古幡: 낡은 깃발)이 석 형의 손에 들어가니 달라지는군요. 저는 엄청 힘겹게 시전했는데 석 형은…… 매우 가볍게 시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안화가 놀라며 말했다.

석목은 안화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허나 안화의 표정은 놀라는 것 같기도 했으며 좋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석목이 전함에 서 있을 때,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속에 깃든 호천성염과 이 고번이 기이하게 연결되는 것 같아서 이곳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안 형, 이 고번은 어디서 얻었나?”

석목이 안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유적지에서 발견했죠. 석 형이 호왕성을 떠난 후로 종족에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출타했을 때, 호왕성 근처에 자리한 한 행성에서 유적지를 발견했어요. 이 깃발은 거기서 얻었죠.”

안화가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선 작은 깃발만 어루만졌다.

“왜요? 석 형, 이 깃발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안화가 물었다.

“아니야. 이 고번은 매우 비범해. 하나는 아니겠지?”

석목이 물었다.

“역시 대단하네요. 고번은 모두 세 개 구했지요.”

안화가 손을 흔들어 망가진 깃발을 두 개 더 꺼내 석목에게 건네었다.

석목은 나머지 두 깃발도 손에 쥐었다. 그러자 호천성염이 또다시 그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나머지 깃발 두 개도 몇 배나 더 커졌다.

세 고번은 품(品)자를 이루며 석목을 안으로 드리우고는 천천히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본 안화는 표정이 계속 변하였다.

“안 형, 아까 이 깃발을 복구하던데 어떻게 한 건가? 유화조석에 있는 화염의 힘을 빨아들이면 되는 건가?”

석목은 놀라운 눈으로 주변에 드리운 고번 세 개를 바라보며 안화를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그 선배는 그렇게 했어요. 이 깃발에 본원의 힘이 있어서 충분한 화염의 힘만 빨아들이면 완전히 복구할 수 있다고 말했죠.”

안화가 대답했다.

“선배?”

석목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아, 실은 그때 함께 유적지에 들어간 사람이 있었는데, 신경 강자 선배님이셨죠. 그 선배님 덕분에 이 깃발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안화가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 고번은 호천성염과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이상하게 끌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 만약 복구할 수 있다면 호천성염을 수련할 때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럼 내가 도와줄게. 이 유화조석의 변두리는 화염의 기운이 강하지 않으니 이 법보를 빨리 복구하려면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할 거야.”

석목은 말을 마치고는 곧장 유화조석 속으로 날아갔다.

안화가 깜짝 놀라서 말리려 했지만 석목은 이미 끝없이 펼쳐진 화염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때문에 안화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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