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8화. 현화(玄火) 공간
석목은 고개를 흔들며 잡스런 생각을 떨쳐내고는 계속해서 공법들과 다양한 신통들을 시전하면서 화염의 기운을 삼켰다.
석목은 시간이 조금씩 흘러가자 도통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고번 세 개에선 들끓는 소리가 흘러나오더니 파손된 부분이 전부 사라져버렸으며 고번들은 마치 실재하는 듯한 붉은빛을 뿜어냈다.
강력하기 그지없는 위압감이 깃발 세 개에서 뿜어져 나왔는데 이건 석목이 가지고 있는 모든 영보들보다 훌륭했으며 번천곤마저 초월할 것만 같은 기세를 내비쳤다.
또한 수백 장 범위 안에 있던 모든 금색 화염이 전부 밀려나 커다란 진공이 형성되었다.
석목은 몸을 파르르 떨며 수련을 하다가 깨어났다. 그리고 고번 세 개가 완전히 복구된 것을 본 석목은 기뻐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석목은 멈칫하며 멍하니 고번들을 바라보았다.
망가진 상태일 때는 깃발에 수놓인 노란 그림이 희미하니 잘 보이지 않았는데 완전히 복구되니 그림이 뚜렷이 나타났다. 고번에 수놓인 그림들은 노란색 원숭이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 있는 세 마리 원숭이는 각각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한 마리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으며 다른 한 마리는 두 눈을 막고 있었다. 또한 또 한 마리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이 동작은……”
석목은 곧바로 미천거원 족장의 신물인 불청신후상을 꺼냈다.
불청신후상이 취하는 동작은 고번에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원숭이 그림자와 똑같이 생겼다.
“호천성염…… 역시 이 고번 세 개와 연관이 있었어!”
석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장로가 한 말에 의하면 불청신후상은 백원왕이 외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들었다. 과연 대장로는 백원왕이 어디에서 불청신후상을 가져왔는지 알고 있을까?
그리고 석목은 안화가 말했던 유적지도 시간이 나면 꼭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석목은 아마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석목은 잠깐 멈칫하다가 불청신후상을 거두어들이고는 고번 세 개를 손으로 잡았다.
“정말 보물이네!”
석목은 고번 세 개를 어루만지며 매우 아쉬워했다.
안화의 물건이라 아무리 맘에 들어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가서 안화에게 물어볼 수는 있지. 바꿀 수만 있다면 갖고 있는 모든 보물을 내놓더라도 이 고번 세 개와 바꿔야겠어.”
고번 세 개가 지닌 위력은 매우 막강했다. 게다가 호천성염와 같은 본원에서 나와 힘이 잘 어우러졌다. 만약에 석목이 이 고번을 가지게 된다면 실력 또한 크게 강해질 터라 천정과 전쟁을 치르며 이길 확률도 더 커질 터였다.
석목은 몸속에 깃든 호천성염을 고번 세 개에 불어넣었다.
윙!
고번 세 개에서 빛이 밝아지더니 찬란하고도 강렬한 붉은빛을 뿜어냈다.
호천성염은 고번의 가장 깊은 곳으로 쏟아져 고번이 지닌 본원의 힘에 닿았다.
쿵!
현묘한 상념이 본원 속에서 흘러나와 석목의 신혼으로 스며들었다.
석목은 순식간에 넋을 놓았는데 신혼으로 스며든 현묘한 상념은 불의 법칙이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눈을 감고서 탐욕스럽게 불의 법칙을 흡수했다. 혼원진화, 구전현공 불의 힘, 양의 화염, 호천성염을 비롯한 모든 불속성 신통들이 스스로 몸속에서 시전되면서 다양한 빛을 뿜어냈다.
호천성염이 뿜어내는 노란빛은 점점 밝아지더니 곧장 끝까지 다다랐다.
석목은 통쾌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몸에선 다양한 화염이 빛을 뿜었으며 호천성염은 순식간에 한계를 뚫어 드디어 원만 경지에 이르렀다.
석목이 천천히 눈을 뜨며 맑은 빛을 뿜어냈다.
“그렇군. 이게 법칙의 힘이었어…… 역시 아주 현묘해!”
석목이 한 손을 휘두르자 노란 화염이 손에서 날아 나와 화염 무지개로 변하였는데 그건 바로 호천성염이었다. 그리고 무지개 속에서 붉은 부문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화염 무지개가 스친 자리는 텅텅 비어버렸으며 금색 불바다엔 단번에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 수십 장이나 생겼다.
좌우에선 거센 불바다가 거친 파도처럼 넘실거렸지만 이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다.
족히 시간이 반주향이나 흘러서야 공백은 천천히 채워졌으며 불바다가 일던 흔적도 사라졌다.
석목은 심장이 쿵 내려앉아 놀라기도 했지만 기뻐하기도 했다. 이것이야말로 호천성염이 지닌 진정한 위력이었는데 세간에서 빛나는 모든 불들은 호천성염 앞에서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화염 무지개 한 방에는 불의 법칙의 힘이 조금 깃들어 있었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석목은 마침내 불의 법칙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석목은 남궁경의 빙백신광이 왜 그토록 대단했는지 철저히 깨달았다. 그리고 남궁경이 다루던 얼음이 거의 모든 공격을 막아낸 것도 전부 법칙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남궁경도 분명 법칙을 터득했을 터였다.
석목이 다시 남궁경을 만나게 된다면 더는 그날처럼 막연히 밀리지는 않을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석목은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리고 석목은 다시 큰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붉은색 화염이 날아 나왔는데 그건 구전현공 불의 힘이었다.
화염 속에도 붉은 부문들이 어렴풋이 보였으며 부문들은 똑같이 무지개로 변하여 금빛 불바다 속으로 향했다.
화르륵!
금빛 불바다에 다시 긴 자국이 드리웠다.
석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전현공 불의 힘에 법칙의 힘을 섞자 그 위력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했다. 비록 호천성염과 비교하면 아직 많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많이 강력해졌다.
석목은 또 다른 몇몇 화염 신통을 시전했다. 화염 신통에 법칙의 힘을 섞기만 하면 그 어떤 화염이든지 놀라울 정도로 위력이 강해졌다. 마침내 석목은 법칙의 힘의 현묘한 점을 깨달은 것이었다.
석목은 시선을 돌려 깃발 세 개를 바라본 후에 공법을 시전하여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깃발이 빠르게 불어나 ‘윙!’ 소리를 내며 석목의 주변에서 돌아갔다.
무지개와 화염이 고번 세 개에서 흘러나오더니 서로 연결되며 순식간에 크기가 수백 장에 이르는 붉은색 화운으로 변하여 빠르게 맴돌았다.
밖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화운 속에서만 묵직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져 심장이 쿵쿵 거렸다.
화운 속은 환한 노란 불바다였는데 전부 호천성염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화염이 들끓는 사이에 화운 속에서 불덩이가 줄줄이 날아 나왔다. 그리고 불덩이들은 한참 일그러지다가 커다란 화룡이나 불새로 변하였다.
화룡과 불새가 두 날개를 펄럭이며 현란하게 날아다녔다. 그러자 두 짐승이 스친 자리에선 화염이 들끓었으며 불바다가 하늘로 치솟아 모든 것들을 태워버릴 듯이 일렁였다.
석목은 불바다 가운데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석목은 고번이 지닌 본원의 힘을 깨우치며 불의 법칙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고번 세 개를 완벽히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 고번 세 개는 이름이 호천현화번(昊天玄火幡)이었다. 그리고 호천현화번은 최상급 영보였으며 보기 드물게 온전한 영보였다.
호천현화번 세 개를 동시에 시전하면 현화대진(玄火大陳)이라는 대신통을 시전할 수 있었다.
현화대진이 형성되면 안과 밖이 완벽히 분리되어 몇 배나 더 큰 대진을 설치하는 게 아니고서는 절대 뚫고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무궁무진한 호천성염의 힘 때문에 타버려 재가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현화대진과 멸선곤법은 유사한 점이 많았는데 둘 다 공간과 영역의 힘까지 도달하여 쓰는 공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멸선곤법은 아직 완전히 깨우치지 못했으니 위력으로 따지자면 지금 제대로 쓸 수 있는 현화대진이 더욱 강했다.
석목은 몸속에 깃든 모든 법력을 움직여 현화대진을 시전했다.
그러자 현화 공간은 즉시 몇 배나 커졌으며 호천성염이 들끓어 공간 안에 무수한 붉은 부문들이 떠다녔다.
쿵!
대진 속을 메운 열기는 순식간에 몇 배나 더 뜨거워 졌으며 불길이 꿀렁거리자 모든 것들이 허무로 돌아갔다.
석목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현화대진이 갖춘 위력은 신경 중기 강자가 온다고 하더라도 불의 법칙의 강력한 힘 때문에 쉬이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적은 결국 잿더미로 변하고 말 터였다.
석목은 현화대진을 시전하며 머릿속에서 멸선곤법이 지닌 오묘한 점을 떠올렸다. 그러자 석목은 또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석목이 손을 흔들자 수많은 붉은 법칙 부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석목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온힘을 다해 공법을 시전했다.
손바닥에 적힌 법칙의 부문들은 마치 화염처럼 끊임없이 들끓었으며 점점 불어나 입체적인 영역이 생기려는 기미까지 보였다. 하지만 영역이 조금씩 커질 때마다 유지되는 시간은 더 짧아졌다.
“아직은 안 돼…… 불의 법칙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해서 그럴 거야.”
석목은 여러 번 시도했다가 결국 포기하고는 손에 적힌 부문들을 지웠다.
법칙을 깨달은 다음엔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야 했다.
영역을 수련하여 그 속에 몸을 넣기만 하면 모든 공격이 영역에서 통제를 받아 적은 절대 석목을 다치게 하지 못할 터였다.
영역 안에서는 무적이었다. 물론 신경에 이르지 못한 수련자들에게 무적의 경지인 영역은 마치 멀고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테지만 신경에 도달하면 보편적인 능력이 되었다.
일단 일정한 수련 경지에 도달하면 두 강자 사이에 치러지는 대결은 법칙의 힘, 즉 영역의 힘이 강한지 약한지 비교를 하는 것과 같았다.
흑마 성역에서 연나가 신경에 도달한 후에 영역의 힘을 깨우치자 천정의 두 신장은 곧장 도망을 가버렸다. 또한 석목의 분신도 홍루마조의 파손된 영역의 힘을 물려받아 신경 강자들과 싸움을 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그러니 영역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영역의 힘을 수련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데다가 신경 후기가 되어야만 영역의 힘을 깨우칠 수 있었다. 그런데 석목이 갖춘 실력으로는 아직 조금 부족했다.
“됐다. 호천현화번을 복구하러 온 것이니 그거로도 충분해.”
석목이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더는 도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법결을 날려 현화대진을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호천현화번 세 개는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호천현화번은 화운으로 변하더니 석목의 몸을 감싸고는 다시 되돌아갔다.
복구된 현화번은 불을 피할 때 가장 좋은 보물이었다.
화운이 나타나자 모든 화염들은 전부 흩어졌다.
석목은 가능하다면 정말 유화조석 안에서 몇 년간 수련을 하고 싶어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지금은 연합을 한 상황이니 석목에겐 그럴 시간이 없었다.
유화조석에서 수련을 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걱정할 수도 있어 석목은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 * *
유화조석 밖, 대장로를 비롯한 신경 강자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석목을 기다리고 있었다.
석목이 유화조석에 들어간 지 하루 밤낮이 흘렀는데 여전히 아무 소식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석목을 끝없이 신뢰하던 대장로라 할지라도 초조한 기색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안화는 미친 듯이 후회가 되었다. 만약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안화는 절대 깃발을 꺼내지 않았을 터였다.
만약 석목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이 연합은 끝장이 나는 셈이었으며 심지어 천하 성역의 운명도 이로 인해 바뀔 터였다. 그렇게 천정이 성역을 지배하는 시국을 돌려놓을 수 없다면 염호 일족이 몰락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 맹주님에게 앵무새 영총이 한 마리 있지 않습니까? 그 앵무새와 맹주님은 아마 연결이 되어 맹주님이 괜찮은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때, 신경에 오른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규모가 중간 정도 되는 종족의 족장이었는데 이제 막 신경에 도달해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안화를 비롯한 몇몇은 그제야 채아를 떠올렸다.
“맹주님의 영총은 줄곧 폐관 수련을 하는 중입니다. 맹주님께서 하신 말에 의하면 이제 막 신경을 돌파하려고 한다던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대장로가 망설였다.
“그런 일까지 고려할 때가 아닙니다. 천하 성역의 존망이 얽힌 일이에요. 맹주님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중년 남자가 다급하게 말하며 전함으로 날아가려 했다.
이때, 유화조석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화운이 유화조석 속에서 날아 나왔다.
화운은 빙글빙글 돌며 작아지더니 그 후에 석목이 나타났다.
화운은 붉은색 깃발 세 개로 변하더니 다시 석목의 손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