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0화. 채아의 기연
천하 성역의 칠흑 우주에서 커다랗고 노란 행성 하나가 천천히 돌아가며 밝은빛을 뿜어냈다.
이 구역은 노란 행성을 빼면 주변 수십만 리 안에 아무런 행성도 없어서 매우 외로워 보였다.
이 별은 팔황고족 중 하나인 반귀족의 거점 행성인 무암성이었다.
무암성에 왔던 사람이라면 의아해할 터였는데 왜냐하면 원래 이 행성은 노란색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는 걸 보니 행성 밖에 두터운 노란색 성운이 덮여있는 게 틀림없었다.
노란색 성운은 평범한 행성들이 자연스레 만들어낸 성운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본질적으로 차이가 났다.
평범한 성운은 성체가 천지의 원기를 흡수하여 운화한 후에 만들어내는 것이라 산만하게 흩어져 있지만, 무암성 밖에 드리운 구름층은 마치 고체처럼 우뚝 솟은 채 움직이지 않았으며 조금도 흘러 다니지 않았다.
이 밖에도 행성 밖에 자리한 별바다에는 커다란 전함의 파편들이 떠있었고, 그 속에는 훼손된 요족들의 시체가 섞여있었다.
무암성보다 더 먼 곳에는 거대한 전함 백여 척이 커다란 산맥처럼 반호 모양을 이루며 진을 이뤄 무암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전함들은 둥글둥글한 모양이었으며 양 끝이 좁고 길쭉한 걸 보니 마치 긴 북과 같았는데 찬란한 은빛을 뿜어내어 별하늘마저 하얗게 물들였다.
이 화려한 은빛 속에는 금빛 무늬가 촘촘히 박혀있었고, 촘촘한 무늬들이 온 전함을 굽이굽이 관통하더니 전함의 앞머리에 달린 이상한 짐승의 머리가 새겨진 굵고 둥그런 기둥들로 몰려들었다.
이 은빛 산맥의 뒤편에는 누런 옷을 입은 거인 백여 명이 서 있었다.
이 거인들은 허리춤에 아주 긴 검은 띠를 두르고 있었고, 띠가 허리춤에서부터 발밑까지 쭉 늘어져 있었다.
이 밖에도 거인들은 어깨부터 허리까지 굵고 긴 비단 띠를 걸치고 있었는데 띠는 양끝이 매우 굵었다. 그리고 가운데엔 얇고 긴 북을 걸고 있었다.
금빛으로 장식된 북엔 다양한 부문들이 새겨져 있었고, 북 한가운데에는 기괴한 모양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짐승이 그려져 있었다.
천막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자 모든 누런 옷을 입은 거인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커다란 손으로 굵직한 북채를 쥐고는 옆구리에 달린 거대한 북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쿵!
북채 백여 개가 동시에 떨어지며 매우 정확하게 북의 가운데에 그려진 짐승 그림 위를 내리쳤다.
금빛 북이 안으로 움푹 파였다가 다시 튀어 오르자 형태가 없는 파동이 진동을 일으키며 퍼져나가 앞에 놓인 은색 전함으로 흘러갔다.
파동이 층층이 퍼져나가자 은빛 전함에 새겨진 부문들도 밝아졌다.
전함의 앞단에 선 둥그런 기둥 위에 새겨진 짐승의 입에서 찬란한 금빛이 밝아졌다.
은빛 전함은 마치 큰 산처럼 흔들렸고, 굵은 금빛 백여 갈래가 거대한 창처럼 짐승의 입에서 뿜어져 나와 무암성을 향해 날아갔다.
우르릉!
하늘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자 무암성 밖을 감싼 두터운 노란색 구름이 격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구름 겉면에 소용돌이가 백여 개 생기더니 시계 방향으로 끊임없이 불어났다.
소용돌이에 난 구멍을 통해 보이는 노란 구름 아래쪽에는 황토색 수정 광막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에 마름모꼴 무늬가 촘촘히 수놓아져 있었으며 현묘한 부문이 그 위에서 빛을 뿜었다.
허공에서 들리는 굉음이 잦아들자 묵직한 황색 성운은 다시 고요함에 빠져들었고, 탁 트인 거대한 소용돌이도 조금씩 봉합되어 사라져버렸다.
쿵, 쿵, 쿵!
북소리는 끊이질 않았고, 금빛 긴 창 수백 갈래가 전함에서 잇따라 터져 나와 곧장 노란 성운 속으로 찔러 들어가 성운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전함들이 아무리 공격을 날려도 노란 성운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부대 한가운데 있던 전함에는 은색 갑옷을 입은 전사들 천여 명이 함교 위에 일렬로 선 채 무암성을 지키는 수호 대진이 뚫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전함 한 가운데 자리한 밀실 속, 긴 줄무늬가 그려진 탁자 위에 고풍스러운 청동 향로가 하나 놓여있었다.
연기가 향로 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자 온 밀실이 은은한 자작나무 향으로 가득 찼다.
탁자 왼쪽에 놓인 의자엔 중년 남자가 하얀 옷을 입은 채 앉아있었다. 그 남자는 푸른색 두루마리를 한 권 들고선 초조한 기색으로 들여다보았다.
“비로 선장님, 남궁 선장님, 우리 전함이 이미 연이어 몇 시진이나 공격을 했는데 여전히 무암성을 지키는 수호 대진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삼대 종족은 무암성에 숨어서 나오지도 않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몸에 딱 맞는 금색 갑옷을 입은 여인이 앞을 향해 몸을 굽히며 말했다.
이 여인은 미모가 뛰어났으며 피부는 눈처럼 하얀 서문설이었다.
“반귀 일족은 원래 수비를 잘 하기로 유명하지. 반귀족은 육신이 다른 요족들보다 훨씬 강할 뿐만 아니라 방어 대진을 만드는 기술도 뛰어나. 예전에 미천거원 일족이 다스리던 주요 행성들을 지키는 방어 대진도 반귀 일족이 만들었지. 그래서 나중에 제준 존상께서 직접 나선 후에야 뚫을 수 있었고. 그러니 지금 가하는 공격에 뚫리지 않을 것도 이미 예상했다.”
쉰 목소리가 비밀 석실 한 구석에서 흘러나왔다.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검푸른 갑옷을 두른 몸집이 거대한 중년 남자였다. 남자는 피부색이 어두운 편이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선 굳센 의지가 돋보였다. 그리고 남자의 몸 곳곳에서는 강력한 기운이 풍겼다.
남자는 목덜미에 오래된 검붉은 흉터가 귀까지 찢어졌는데 그 모습이 매우 흉악스러워 보였다.
“비로 형, 어떻게 마음이 이렇게 차분할 수 있소? 무암성을 부숴버리지 못하면 어떻게 존상에게 보고를 하겠소?”
하얀 옷을 입은 남궁경이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검푸른 갑옷을 입은 중년 남자는 조극에게 규룡역린을 주었던 비로 선장이었다.
“하하하…… 남궁 아우, 걱정 마시오. 이 무암성의 대진은 수일 안에 뚫릴 테니.”
비로 선장이 우렁찬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마치 쇠끼리 부딪치듯 듣기에 매우 거북스러웠다.
“음? 수일 안에 뚫리다니 무슨 말씀이오?”
남궁경은 그 말을 듣자 기뻐하며 다급하게 물었다.
하지만 비로 선장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쪽에 서 있던 서문설의 눈에 이채가 스쳤지만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일전에 미천거원이 다른 요족들과 연합하는 걸 막지 못하여 화근이 남았소. 놈들이 난장판을 만들면 삼대 종족을 멸하려는 계획은 틀어질 것이오.”
비로 선장이 말했다.
“미천거원과 요족 연합은 골칫거리가 확실하오. 특히 연합의 맹주인 석목은 절대 가볍게 볼 수 없소.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아마 아직도 전쟁터 근처에서 서성거릴 것이오. 그러니 짧은 시간 안에 이곳으로 오지 못하겠지.”
남궁 선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오. 서문설, 명을 내리거라. 계속해서 무암성의 대진을 공격하고, 조금도 지체하지 말라고 전하라.”
비로 선장이 곧바로 명을 내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서문설이 대답을 하고는 비밀 석실에서 걸어 나갔다.
* * *
유화조석 속, 석목은 심각한 표정으로 화염 깊은 곳을 노니는 채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채아를 감고 있던 건원요화가 파란 화염을 삼키며 빠르게 불어나 크기가 한 장에서 네다섯 장으로 변하였다.
채아가 풍기는 기운도 점점 강력해져 곧 임계점에 닿을 듯했다.
채아는 여러 번 경지를 돌파하려 했으나 여전히 뚫지 못했다.
“순조롭지 않은가 보군……”
석목이 미간을 찌푸렸다.
채아가 신경을 돌파하지 못하면 사나흘은 더 머물러야 할 텐데 석목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도와줄 테니 돌파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 깨달음에 달렸다!”
석목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러자 옅은 붉은빛이 석목의 손가락 끝에서 날아가 푸른 화염 속으로 들어갔다. 석목이 날린 붉은 빛은 석목이 신경을 돌파하며 알게 된 깨우침과 화염 법칙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석목과 채아는 주인과 종으로서 계약을 맺은 사이라 심신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시도할 수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이리 할 순 없었다.
채아가 푸른색 화염 속에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채아의 머리에 화염의 현묘한 점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렇군. 그렇군!”
채아는 순간 막히던 부분들이 뚫려 드디어 신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자 채아의 몸에서 강력한 기세가 폭발하였다.
채아를 중심으로 주변 수백 장 안에서 타오르던 파란색 화염이 흔들리더니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어 가운데로 몰려들었다.
푸른 화염이 점점 커지면서 화염구로 변하였다.
석목은 기쁜 기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함 위에 있던 다른 신경 강자들도 먼 곳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푸른 화염구는 빠르게 음의 화염을 흡수하여 마침내 작은 산만큼 커졌다.
화염구 속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는 걸 보니 마치 어떤 격변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쾅!
푸른 화염구가 격하게 흔들리고, 줄줄이 균열이 나타나면서 곧 터져버리려 했다.
채아는 화염구 속에서 날아 나와 하늘로 치솟았다.
채아의 몸은 크게 달라졌는데 몸집이 전보다 훨씬 길어졌고, 특히 꼬리 깃털은 몇 배나 길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머리에 채색 깃털이 아홉 개나 자라나 구색채관(九色彩冠)을 이루었다.
허공에서 날아다니는 채아는 마치 전설 속의 신수인 봉황처럼 우아하고도 고귀해 보였다.
하지만 한참 동안 춤을 추던 채아가 입을 벌리고 울어대는 순간, 감돌고 있던 우아하고도 고귀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신경! 맞아. 신경! 이 어르신이 신경에 도달했어! 와하하! 나는 건앵의 왕이야! 이 세상의 모든 새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할 거야! 오늘부터 모든 영광과 눈부심은 전부 고귀하고 위엄 있는 이 신성한 왕자에게 주어졌어. 세간의 비천한 녀석들아, 본좌의 끝없는 위엄 앞에 무릎을 꿇어라! 내가 너희들을 이끌고…… 아야!”
재잘대던 채아의 목소리가 멈추자 화염으로 만든 큰 손이 채아를 붙잡은 채 허공에서 끌어내렸다.
“많이 늦었어. 빨리 가자.”
석목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합의 요족들은 서로 한 번씩 쳐다보며 멋쩍은 표정을 드러냈다.
전함에 드리운 붉은색 화운은 한참 동안 빛을 흘려 보내고는 계속해서 앞으로 날아갔다.
석목은 전함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법결을 날리며 붉은 화운을 조종했다.
채아는 석목의 어깨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채아의 크기는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변화된 모습은 그대로였다.
“석두, 간만에 기분이 좋았는데 왜 나를 끌어내렸어.”
채아는 투덜대고 있었지만 얼굴엔 흥분된 기색이 역력했다.
“시간이 없어. 네가 쓸 때 없이 소리나 지르는 것까지 들어줄 수 없다고.”
석목이 담담하게 말했다.
채아가 입을 벌리고는 석목을 향해 괴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와하하, 나도 드디어 신경이 됐어! 신경 건앵. 건앵 일족의 만 년 역사 중에도 몇 없는 신경이라고! 석두, 우리 빨리 천봉 일족으로 가자. 동두 그 녀석이 내가 신경 강자로 변한 걸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너무 궁금해!”
채아가 흥분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석목의 어깨에서 뛰어다녔고, 석목은 깊은 숨을 내뱉었다.
“됐어. 이제 막 신경에 들어섰으니 그만 놀고 돌아가서 경지부터 안정시켜. 무암성에 도착하면 큰 전투를 치러야 할 거야.”
석목이 말했다.
“그래. 그럼 나는 폐관하러 갈게.”
채아는 곧바로 표정을 바꾸며 아래로 날아갔다.
석목은 채아가 사라지자 드디어 주변이 조용해져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법결이 줄줄이 날아가자 붉은 화운이 움직이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눈앞에서 타오르는 화염의 색깔이 다시 바뀌더니 금색 불바다가 나타났다.
석목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금색 화염이 지닌 위력은 그 어떤 화염보다도 강력한데 이제 혼자가 아니라 전함 다섯 척을 끌고서 뚫고 지나가야 하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했다.
석목이 입으로 주문을 외우자 붉은색 화운은 빛이 점점 커지더니 화운 자체도 몇 배나 커져서는 전함 다섯 척을 감싼 채 금색 불바다 속을 뚫고서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