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2화. 신경 강자
서북쪽으로 가는 동안 수백 리를 사이 두고서 검은 비석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한절은 여섯 곳을 지나친 후에 일행들과 수비해야 하는 진추로 향했다.
“여러분, 진추를 지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니 정신 바짝 차려야합니다.”
한절이 말했다.
그러자 다들 대답을 하고는 흩어져서 비석을 지켰다.
한절은 고개를 들어 비석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비석에선 노란빛이 희미하게 흘러 다녔는데 모래판에서 봤던 모습과 똑같았다.
눈앞에 놓인 이 검은 비석은 높이가 십여 장 정도 되었다. 그리고 비석의 한쪽 면에는 현묘한 부문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으며 다른 한쪽 면에는 비석의 역사가 고대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비석에 적힌 기록에 의하면 이 현무반운대진은 반귀 일족의 첫 번째 족장이 만든 대진이었다. 반귀 일족의 족장은 무암성의 지하에 흐르는 영맥을 진원으로 산천하수의 기세를 모아 이런 단단하기 그지없는 수호 대진을 만들었다.
한참 비석을 들여다보던 한절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눈을 감았다.
하늘에선 굉음을 터뜨리며 천정의 전함들이 단 한 순간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날이 어두워졌다.
비석에서 나는 빛이 주변을 비춰 희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음……”
이때, 비석 주변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들었다. 그러자 한절이 두 눈을 감은 채 고통스럽게 바닥에 누워있었다.
“한절, 왜 그래?”
몇몇 영부 일족이 다급하게 몰려들었다.
“왜? 무슨 일입니까?”
반귀 일족의 장로도 놀라서 영부 일족들을 따라 쫓아왔다.
“괜…… 괜찮습니다.”
한절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눈에서 기이한 빛이 스쳤다.
이때, 하얀 물안개가 한절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주위에 모인 사람들에게 드리웠다. 그와 동시에 한절에게서 풍기던 기운도 크게 강해져 엄연히 신경을 돌파했다.
“미안해요, 다 죽어버리세요.”
한절이 싸늘하게 말했다.
퍽!
하얀 물안개가 곧바로 단단한 얼음으로 변하더니 가시처럼 뾰족한 얼음 수백 갈래로 자라나 사람들을 찔렀다.
“네가 왜……”
한절을 빼면 반귀 일족 장로의 실력이 가장 뛰어났는데 장로는 한절의 수련 경지가 크게 강해지는 모습을 보고는 의아하게 여겼다.
그러나 장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속을 뚫고 들어간 얼음 가시가 몸속에서 또 새끼를 치면서 더 많은 가시를 뿜어내며 몸통을 찢어버렸다.
한절은 일어서서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바라보며 뜨거운 화염을 날려 시체들을 전부 태워버렸다.
잠시 후에 불은 꺼졌으며 바닥에는 타버린 흔적 말곤 아무런 기운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절이 차갑게 웃으며 검은 비석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더니 연이어 법결을 날렸다.
한절의 손에 금색 무늬가 나타나 뜨거운 기운을 풍겼는데 조금 전에 시체를 태웠던 불보다 몇 배는 더 뜨거웠다.
훅!
한절의 두 손에서 동시에 붉은 화염이 나타났는데 비석이 내는 빛보다 훨씬 더 밝았다.
한절은 두 손으로 검은 비석을 눌렀다.
하지만 한절의 손이 비석에 닿기도 전에 비석에서 나는 노란빛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뿜어져 나와 밖으로 광막을 펼쳐 한절의 손을 막았다.
“흥!”
한절은 두 손에 화염을 더욱 활활 태우며 노란 광막을 녹여버리려 했다.
퍽, 퍽!
노란 광막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윽고 노란 광막이 화염과 닿자 광막은 마치 살아있는 듯이 맹렬하게 움직였고, 금색 무늬가 광막 밑에서 부터 뻗어 올라와 온 광막을 둘러쌌다.
뻗어 나온 금색 무늬들은 서로 연결되면서 현귀 토템 무늬를 그려냈다.
현귀 토템 무늬가 나타나자 광막에서 흘러나오던 소리가 사라졌으며 피어오르던 하얀 연기도 사라졌다.
한절은 미간을 찌푸리며 광막을 누르던 두 손에 힘을 꽉 주어 광막을 부숴 버리려 했다.
한절의 손가락 끝에선 얇고 붉은 화염이 줄줄이 뿜어져 나오더니 불꽃이 광막에서 흘러 다녔고, 광막 위에 그려진 현귀 무늬가 순식간에 흔들리며 ‘칙, 칙’ 소리를 냈다. 그러자 푸른 안개가 광막에서 피어올랐다.
잠시 후에 광막 위엔 동그란 구멍 열 몇 개가 뚫렸다.
한절은 열 손가락으로 광막을 뚫어버린 후에 화염을 뿜어내어 광막 안을 태우기 시작했다.
화염이 타오르자 구멍 열 개가 점점 커지면서 광막은 눈이 녹듯 사라져버렸다.
한절은 미소를 지으며 화염을 거두어들이고는 검은 비석 앞으로 다가왔다.
한절이 다시 손을 앞으로 뻗자 손바닥에서 하얀 얼음이 나타나 검은 비석으로 흘러들어갔다.
검은 비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얼어버렸다.
이어서 한절은 손가락을 굽혀 주먹을 쥔 다음 주먹에 화염을 감싸고는 맹렬하게 비석을 내리쳤다.
쾅!
극도로 뜨거운 열기와 극도로 차가운 한기가 부딪히자 비석은 순식간에 터져버렸다.
하얀 얼음이 뒤덮인 검은 비석은 산산이 부서져 주변으로 튕겨져 나갔다.
한절은 부서진 돌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검은 수정을 하나 꺼내서 검은 비석이 있던 자리에 놓았다.
검은 수정에서 노란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때, 반귀 일족의 오각형 대전에 자리한 모래판의 서북쪽 방향에서 금색 비석이 번쩍이다가 이내 불이 꺼졌다.
가부좌를 틀고 한쪽에 앉아있던 육규종은 기분이 이상해져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모래판 서북쪽을 바라보니 그 근처에 놓인 비석 몇 개는 여전히 전부 반짝이고 있었다.
“이상하네……”
육규종은 의문이 가시지 않은 듯이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 * *
무암성 밖에 뜬 한 전함 위.
남궁경과 비로는 나란히 서서 무암성 밖에 드리운 노란 성운을 바라보았다.
“시작하자.”
비로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남궁경의 얼굴에선 더는 우려하는 기색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남궁경은 노란 성운 한곳을 가리키며 서문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함을 끌고 저쪽으로 가서 공격해라.”
“네.”
서문설이 말했다.
서문설은 남궁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가리키는 곳에 자리한 성운의 외곽은 유난히 빛이 희미하게 났는데 마치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만약 시력이 뛰어나지 않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서문설이 뛰어 올라 대진 앞쪽에 있는 전함으로 날아갔다.
서문설은 날아가는 동안에 옷자락에서 무엇인지 모를 법결을 짚어 고리 모양 금빛을 번쩍이다가 이내 감췄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다.
* * *
망망한 별바다 위를 전함 다섯 척이 무암성을 향해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석목은 대장로와 함께 함교에 서서 대화를 나누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전함에 자리한 안방으로 들어갔다.
결계가 드리운 방으로 들어가자 금소채가 아리따운 자세로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그리고 가슴께엔 옷자락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왜 그러시죠?”
석목이 물었다.
“조금 전에 소식을 들었는데 반귀 일족의 수호 대진이 곧 뚫릴 거래.”
금소채가 말했다.
“반귀 일족이 설치한 대진은 단단하기로 유명하잖습니까? 왜 갑자기 뚫린다는 겁니까?”
석목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어쨌든 난 소식을 전했어.”
금소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석목은 잠깐 고민에 빠졌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방에서 걸어 나와 다시 함교로 올라갔다.
“족장님, 무슨 일입니까?”
대장로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반귀 일족의 대진에 문제가 생긴 것 같군요. 무암성이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은 듯하니 제가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네, 너무 조급하게 움직이지는 마세요. 곧 따라가겠습니다.”
대장로가 말했다.
“여긴 대장로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석목은 흑백 날개를 펼쳐 전함에서 날아가 망망한 별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석목의 모습은 별바다에서 사라져버렸으며 그 속도는 전함보다 몇 배나 더 빨랐다.
* * *
무암성 안.
한절은 검은 수정에서 시선을 돌려 왔던 길을 따라서 돌아갔다.
한절과 수백 리 떨어진 깊은 천갱(天坑: 싱크홀) 속엔 또 다른 검은 비석이 하나 더 서 있었다.
비석 아래엔 머리가 하얀 노인이 앉아있었다.
주름진 얼굴엔 눈언저리가 깊게 파였으며 양쪽에 꺼진 볼 사이로 높은 콧날이 솟아있었다. 그런 노인의 무릎에 걸친 두 팔은 마치 뼈만 남은 듯이 수척했다.
노인은 비쩍 마른 몸집에 비해 걸치고 있는 금색 옷은 지나치게 커보였으며 특히 두 소매는 바닥까지 끌고 있었다.
문득 노인은 눈꺼풀을 움직이며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두 눈꺼풀 사이로 맑고도 깨끗한 빛을 쏟아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에서 한 줄기 빛이 스쳐 지나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누구야?”
노인이 거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육여(陸輿) 장로님, 영부 일족의 한절입니다.”
한절이 대답했다.
“진추 하나를 책임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여긴 무슨 일인가?”
육여가 물었다.
“장로님의 숨통을 끊으러 왔습니다.”
한절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순간, 한절이 풍기던 기세가 점점 강해지더니 신경 강자의 기운을 그대로 드러냈다.
“천정의 첩자군! 신경에 진입한지 고작 반 년 밖에 안 된 놈이 내 앞에서 행패를 부려? 우매한 건지 건방진 건지!”
육여가 일어서며 비웃듯이 말했다.
그리고 몸에 금빛을 반짝이더니 강력한 영력 파동을 흘려 보냈다. 그러자 원래도 많이 커보였던 옷자락이 불룩하게 불어났다.
노인은 신경 초기 강자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잘못 봤군요. 장로님께선 신경 강자셨네요. 어쩐지 혼자서 지키고 계시더라니.”
한절이 멈칫하다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청강등모(青鋼藤矛) 한 자루를 꺼내 들고는 창끝으로 육여를 겨누었다.
한절이 손목을 꺾자 청강등모가 허공에 몇 갈래 환영을 그려내더니 창끝에서 순식간에 꽃이 수백 송이 피어나 육여를 공격했다.
그러자 육여가 옷자락을 휘둘러 창꽃을 허공에서 지워버렸다.
“영보.”
한절이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하게 여겼다.
육여가 걸치고 있는 옷에선 빛들이 반짝였는데 마치 밤하늘에 뜬 별들처럼 화려한 게 등급이 높은 영보일 터였다.
육여가 소매를 앞으로 뻗자 부문들이 밝아지며 금색 뱀처럼 생긴 두 갈래 빛이 소매에서 뿜어져 나와 한절을 감싸려고 했다.
소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별빛은 끊임없이 반짝이며 한절을 가운데로 드리웠다.
한절은 마치 별바다에 빠진 것처럼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육여가 차갑게 웃으며 소매 속에 있는 손으로 다양한 법결들을 짚으며 입으로는 현묘한 구결을 외웠다.
윙!
기이한 파동이 육여의 소매에서 흘러나오자 소매에 찍혀있던 별들이 빛을 크게 드리우더니 춤을 추듯 한절을 짓눌렀다.
한절은 막대한 압력을 받아 미간을 찌푸렸다.
“성진의 힘을 맛보았나? 내 황금성라포(幌金星羅袍)에 들어온 이상, 살아서 나갈 생각은 마라.”
육여가 내는 거친 목소리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고작 영보로 나를 묶겠다고?”
한절은 미간에 주름을 짓더니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탱!’ 소리와 함께 청강등모를 땅에 박았다.
“청목삼라!”
한절이 소리를 지르자 가슴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푸른 가마 허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순수한 나무 속성 영기가 푸른 가마 속으로 흘러들어가 한절의 팔을 타고서 청강등모 속으로 스며들었다.
쩍, 쩍!
땅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팔뚝만한 푸른 덩굴이 바닥에서 튀어나와 한절 옆을 감싼 옷소매로 뻗어갔다.
푸른 덩굴은 얽히고설키며 푸른 숲을 이루다가 마치 수많은 팔이 양쪽에서 압박을 하듯이 별빛들을 그대로 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