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화. 전쟁 후
“맹주님, 천정 놈들이 패배했습니까?”
방진이 물었다.
“그래. 선장 한 명을 잃었지. 지난 번 축전에서 훼방을 부렸던 남궁경이 죽었어. 그래서 천정 놈들이 철수를 하게 되었고.”
석목이 말했다.
“그 선장 놈 실력이 엄청 뛰어났는데 나랑 석두가 힘을 합쳐서 죽여 버렸지.”
채아가 얼굴에 빛을 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대장로 일행은 기뻐하며 또 놀라워하기도 했다.
천정의 십이 선장이 갖춘 실력은 고만족과 같은 신장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리고 대장로는 천 년 전에 선장들과 격전을 치렀던 사람이라 그 실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대단한 자를 석목이 죽여 버렸다니. 대체 석목이 갖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석목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장은 한참 동안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대장로 일행의 눈에는 온통 흥분된 기색이 가득해 모두 한참 뒤에야 진정했다.
규모가 작은 몇몇 종족의 사람들은 마음이 벅차올라 요족 연합에 합류한 걸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석목처럼 대단한 수련 경지에 오른 맹주가 이끌고 있으니 머지않아 천정을 천하 성역에서 내쫓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면 이런 작은 종족들은 이번 전쟁에서 뜻밖의 혜택을 받을지도 몰랐다.
“맹주님, 이제 어떻게 움직일까요?”
잠시 후에 대장로가 침묵을 깨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석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눈에는 여전히 흥분이 가득한 기색이었으며 다들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우선 무암성으로 가서 삼대 종족과 만나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천정과 싸울지 논의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석목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 * *
천정의 대군이 무암성을 떠난 지 반시진이나 흘렀다. 하지만 육규종을 비롯한 신경 강자들은 여전히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얼굴에는 희열은커녕 오히려 심각한 표정만 드리웠다.
“진법사는 어디 있는가? 빨리 대진을 복구하라!”
육규종의 우렁찬 목소리가 전장에서 울려 퍼졌다.
반귀족 진법사 수십 명은 몸을 날려 뚫려버린 현무반운대진으로 다가갔다.
이때, 하늘에 뚫린 구멍에서 몇 갈래 빛이 반짝이더니 전함 몇 척이 날아 들어왔다.
삼대 종족 연합의 대군들은 천정의 대군이 다시 돌아온 줄 알고 순간 깜짝 놀라 들끓기 시작했다.
“놀랄 필요 없다!”
육규종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눈에 분노를 가득 채우더니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세를 보면 조금 전에 천정 놈들을 내쫓아 사기가 차오르고 있으니 또다시 전투를 치른다면 기필코 천정의 대군을 몰살해버릴 수 있었다!
“육 족장님, 우리 편입니다. 공격하지 마세요.”
이때, 우렁찬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한 전함에서 빛이 날아오더니 육규종 앞에 석목이 나타났다.
“석 도우……”
육규종은 흠칫 놀라며 의아하게 여겼다.
“육 족장님. 미천 요족연합이 지원군이 되어 왔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이때, 둥그런 전함 다섯 척이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오자 대장로와 방진을 비롯한 몇몇 신경 강자들이 걸어 나왔다.
그 말을 들은 육규종은 기쁨에 벅차올랐다.
조윤과 적안도 활짝 웃는 얼굴로 다가오다가 석목이 하는 말을 듣고는 얼굴이 굳어버렸다.
“석 도우님, 미천 요족연합은 무엇입니까?”
적안이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비천서, 염호, 자정마우를 비롯한 요족 수십 곳이 이미 우리 미천거원 일족과 연합을 맺었죠. 그리고 석목 족장을 맹주로 내세워 연합을 미천 연합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함께 천정과 싸울 계획이었는데 삼대 종족이 천정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석 맹주님이 이렇게 우리를 이끌고서 지원을 하러 왔습니다.”
대장로가 말했다.
조윤과 적안은 흠칫 놀라더니 서로 한 번 마주 보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육규종도 표정이 살짝 변하여 놀라는 듯했다. 하지만 놀라운 감정 말곤 별다른 뜻은 없어 보였다.
주변에 있던 다른 신경 강자들도 서로 눈을 마주치며 알 수 없는 표정을 드러냈다.
“석 도우님…… 아니, 석 맹주님, 이렇게 대군을 이끌고 지원을 하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석 맹주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반귀 일족은 아마 천하 백족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육규종이 감격하며 말했다.
“육 족장님, 괜찮습니다. 우리 모두 천하 백족의 일원이고, 또 함께 천정을 공격해야하니 우리 모두 성역을 위해 싸웁시다.”
석목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예전에 천봉 일족에서 석 맹주님을 난감하게 했었는데 이렇게 따지지도 않고 의리를 지키면서 도와주시다니 정말 면목이 없군요.”
육규종은 갑자기 무엇인가를 떠올리며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지난 일은 떠올리지 마세요. 지금 시급한 건 서둘러 재정비를 하여 천정의 대군이 다시 공격해오는 걸 대비해야 합니다.”
석목이 말했다.
“이미 진법사들을 불러 대진을 복구하게 했습니다. 허나 원래대로 회복되려면 적어도 열흘은 걸리겠죠.”
육규종이 말했다.
석목은 반귀 일족의 수호 대진이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고, 심하게 파손된 만큼 복구할 때 시간이 오래걸리리라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삼대 종족은 전투가 벌어진 현장을 정비하며 공간 통로를 막았다.
이번엔 간신히 천정을 내쫓긴 했으나 이런 대규모 전쟁을 치른 무암성이 큰 재난을 맞은 셈이나 다름이 없어 정리해야할 부분도 많았다.
석목도 연합에 지시를 내려 다급하게 복구에 참여했다.
* * *
며칠 뒤.
진법사 수십 명이 허공에 앉아 다양한 진기 법결을 날렸다.
진법사들이 지속적으로 복구를 하자 노란 구름이 뚫려버린 구멍으로 몰려들어 메꿔지려는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복구 속도가 느려 완전히 봉쇄하려면 적잖은 시간을 써야할 터였다.
그리고 훼손된 진추 두 곳에 새로 세울 비석이 도착했으며 신경 진법사가 부문을 새기고 있었다. 덕분에 사흘 뒤엔 온전한 비석을 세울 수 있게 되어 그때면 현무반운대진이 처음처럼 복구가 될 예정이었다.
하늘에는 전함이 수십 척 날아다니며 부상을 입은 요족들을 반귀 일족 안쪽으로 이동시켰다.
땅에 널브러진 천정의 전사들과 요족 수련자들의 시체도 따로 분리하여 묻거나 태워버린 후에 바닥에 널려있는 전투 법보도 전부 회수했다.
일련의 준비를 마친 후, 무암성에서 벌어진 전쟁의 상흔은 점차 원래 모습대로 돌아왔다.
무암성의 전망대에서 석목과 삼대 종족의 족장들이 나란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석목과 족장들 뒤로는 다른 종족 사람들도 서 있었다.
“석 맹주님, 거의 정리를 다 마쳤습니다. 우선 우리 종족으로 돌아가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육규종이 석목의 앞으로 다가와 열정을 담아서 말했다.
“좋습니다.”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육규종은 기뻐하며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조윤과 적안에게 말했다.
“두 족장님도 같이 들어가시죠.”
말을 마친 육규종은 둘을 쳐다보지도 않고선 석목 일행을 데리고 몸을 날려 반귀 일족 방향으로 날아갔다.
조윤과 적안은 육규종에게 버려진 느낌이 들어 기분이 언짢았다.
전쟁이 끝난 후로 며칠 동안 육규종이 석목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니 적안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조윤은 천천히 적안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화를 가라앉히라고 하고는 반귀 일족으로 날아갔다.
금봉과 조주명을 비롯한 천봉 일족의 장로들도 조윤을 뒤따랐다.
적안은 한참 망설이다가 두 주먹을 꽉 쥐고는 종족 사람들을 데리고선 그 뒤를 따랐다.
* * *
사람들은 전부 반귀 일족의 의사 대전에 모였으며 육규종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종족 사람들은 이미 대전에 도착했고, 석목 일행이 들어오자 전부 그쪽을 바라보았다.
“석 맹주님, 앉으시죠.”
육규종이 주좌를 가리키며 말했다.
“육 족장님, 아닙니다. 족장님이 주인이고 제가 손님인데 제가 어찌 감히 주좌에 앉겠습니까?”
석목이 흠칫 놀라며 다급하게 사양했다.
뒤에 서 있던 조윤과 적안은 과할 정도로 친절한 육규종을 바라보자 안색이 다시 굳었다.
“석 맹주가 없었더라면 제가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주좌는 석 맹주가 앉기에 충분한 자리죠.”
육규종이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 석목이 주좌에 앉지 않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 사양하다가 결국 육규종이 주좌에 앉았고, 석목은 육규종의 옆에 앉았다.
조윤과 적안은 육규종 옆 다른 한쪽에 앉았다.
두 사람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는데 순서를 따른다면 둘이 앉은 자리가 석목보다 낮은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반귀 일족이었기에 주인이 안내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빠르게 자리에 착석했다.
혼란스런 전투를 거친 후, 천정이 다시 기습을 할까봐 급하게 재정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이렇게 다 같이 모인 자리는 처음이었다.
석목이 남긴 성대한 전적은 이미 삼대 종족에 소문이 퍼져 다들 석목을 바라보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지난번에 천봉 일족에서 석 맹주를 봤을 때만해도 고작 성계 경지였는데 이렇게 빨리 신경에 진입했다니. 수련 속도가 거의 미친 수준이잖아.”
“그래! 천정의 선장과 격전을 치를 때 봤어야했는데. 저런 실력은 신경 강자라 해도 쉬이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우리는 꿈도 꿀 수 없어.”
석목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수군거리는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들 자리에 앉은 후에 육규종이 전세와 전후 처리에 대한 몇몇 사항들을 선포했다.
천정이 선장을 한 명 잃어버렸으니 이번 전투는 천정의 참패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아군도 적잖이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다행히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였다.
이어서 육규종이 일어서서 석목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석 맹주가 도와주셔서 우리 반귀 일족이 멸족을 당할 위기를 벗어나 반격을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종족을 대표해 다시 한 번 석 맹주와 미천 연합 여러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합니다. 앞으로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천정을 물리치려는 맹우들이죠. 육 족장님,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석목이 일어서서 정중하게 답했다.
“석 맹주님이 우리를 맹우라고 여기신다면 제가 제안을 하겠습니다. 우리 삼대 종족 연맹과 석 맹주의 미천 연합을 합쳐 천하 성역을 아우르는 대연맹을 만드는 건 어떻습니까?”
육규종이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적안은 안색이 어두워져 옆에 앉아있는 조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윤은 적안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는데 안색이 조금 이상해져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다시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삼대 종족의 다른 신경 강자들도 전부 다양한 기색을 내비쳤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석목은 그 말을 듣자 매우 반가웠다.
이번에 삼대 종족을 도와주러 온 건 지원을 해주려는 목적만 있던 게 아니라 삼대 종족과 연합을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지금은 천정의 세력이 커져서 천하 성역이 위기에 몰렸으니 천정을 철저히 물리치려면 꼭 모두 마음을 모아야만 조금이라도 성공을 할 수 있었다.
석목은 언제 그 말을 꺼낼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육규종이 먼저 말을 꺼내니 더할 나위가 없었다.
대장로를 비롯한 일행들도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육 족장님, 제가 하고 싶었던 말입니다. 천정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실력은 여전히 부족해요. 그러니 연합을 하지 않는다면 승산이 없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석 맹주님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면 다행이군요. 조 형과 적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육규종은 큰소리로 웃으며 조윤과 적안을 바라보았다.
“하하하, 만약 두 연합을 합친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없지요. 허나……”
조윤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육규종이 물었다.
조윤은 적안을 한 번 쳐다봤다.
“두 연합을 합치면 어느 쪽을 우두머리로 정하겠습니까?”
적안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눈에 이채를 띠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장로 백박을 비롯한 이들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