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1화. 다시 만나다
세 시진도 채 날지 않았는데 석목은 이미 죽은 행성으로 내려왔고, 안화가 준 옥간에 적힌 표시를 따라 산골짜기로 들어갔다.
이미 죽은 행성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석목은 황량한 풍경을 보니 마음이 서늘했다.
죽은 행성에는 온통 갈색 암석들뿐이었고, 식물이나 동물은 물론 흔한 흙덩이조차 없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운석 웅덩이들이 마치 깊게 파인 상처 같아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석목이 서 있는 산골짜기는 운석 구덩이였고 구덩이가 유난히 길어 마치 산골짜기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석두, 이런 곳에 상고 유적지가 있다고?”
채아는 산골짜기를 훑어보며 실망했다.
“안화가 준 옥간에 적힌 기록에 따르면 여기가 맞아. 아마 금제로 은닉되어 있을 거야. 우리가 좀 더 찾아보자.”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채아를 데리고 산골짜기를 샅샅이 훑었다.
사람 한 명과 새 한 마리는 그리 크지 않은 산골짜기를 여러 번 뒤졌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상하네. 진법의 기운은 물론이고 영력 파동조차 없어. 안화가 말한 유적을 찾을 수가 없잖아.”
석목이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화가 장난친 게 아니야?”
채아가 말했다.
“아니야. 아마 다른 이유가 있겠지.”
석목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런데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채아가 하품을 했다.
“됐어. 가는 도중에 들른 거니 곧바로 주작성으로 가자.”
석목은 한참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이때, 석목의 저장 반지 속에 든 족장의 신물에서 이상한 파동이 일어났다.
석목은 곧바로 ‘불청후’ 조각상을 꺼냈다.
조각상은 나오자마자 마치 영성이라도 있는 듯이 빙글빙글 돌다가 석목의 손에서 벗어나 한 방향으로 번쩍이며 날아갔다.
석목은 조각상이 향하는 방향을 쳐다보았는데 시선의 끝에 걸린 파란 행성에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석목은 눈을 깜빡이며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조각상을 거두어들이고는 채아를 데리고 별하늘로 날아갔다.
* * *
반나절 뒤.
파란 행성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숲 위 하늘에서 빛이 스치더니 그대로 숲의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
빛이 떨어지면서 갈색 피풍의를 두른 석목과 채아가 나타났다.
석목은 손에 불청후 조각상을 들고 있었는데 조각상에서 빛이 반짝였다.
“석두, 정말 여기야?”
채아는 무성하게 자라난 고목들과 관목들을 바라보며 의아하게 여겼다.
석목은 아무 말 없이 앞에 있는 풀들을 옆으로 헤쳐 놓았다.
풀 속에서 넓이가 십 장에 이르는 검붉은 돌길이 드러나 만 리까지 뻗어 있었다.
돌길에는 푸른 이끼가 붙어있는데다가 잔흔이 널려있었고, 여기저기 파손된 자리마다 잡초가 무릎까지 자라나 있는 걸 보아 아주 오랫동안 방치해둔 것 같았다.
넓은 돌길을 따라 안쪽을 바라보니 수백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커다란 건물 유적이 서 있었다.
돌길은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뻗어있었고, 호성하(護城河)에 걸쳐있는 긴 다리를 가로질러 둥그런 돌문으로 통했다.
석목은 채아를 데리고 둥그런 돌문을 지나 돌길을 따라서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길 양쪽에 풀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아무도 가꾸지 않은 탓인지 본래 자라던 식물들과 잡초들이 뒤섞여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잡초 뒤편에는 커다란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고, 건물은 모두 삼 층으로 세모꼴을 이루며 우뚝 솟아있었다.
가장 높은 층에는 보탑이 세 개 서 있었고, 품(品)자 모양으로 늘어서 있었다. 또한 보탑 꼭대기에는 석후 조각상이 서 있었다.
석목은 석후 세 마리가 바로 전에 깃발에서 봤던 세 원숭이 모양과 똑같아 눈을 반짝였다.
세 보탑은 서로 거리가 멀었고, 그대로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또한 건물 주변에는 층마다 회랑이 둘러서 있었고, 회랑 아래쪽은 가파른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계단들은 전부 세 척 정도 높이였는데 평범한 사람이라면 손과 발을 사용해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
“석두, 여기가 안화가 말했던 상고 유적지인가봐. 그런데 왜 안화가 말한 곳과 다르지?”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 서서 고개를 들어 건물 꼭대기의에 선 석후 조각상을 보며 말했다.
“이 상고 유적지는 한 곳에 고정되어있는 게 아니고 계속 움직이는 것 같아.”
석목이 추측했다.
“이 유적지가 그렇게 신기하다고? 그럼 엄청난 보물들이 가득 있겠네. 빨리 들어가자.”
채아가 눈에 빛을 뿜었다.
“급하게 굴지 마. 보물이 있다고 해도 훤히 보이는 곳에 두지는 않았을 거야. 안화가 그랬잖아, 이 유적에는 비경이 있다고. 아마 보물은 비경 속에 있을 거야.”
석목이 말했다.
“그럼 빨리 비경을 찾으러 가자.”
채아가 들뜬 얼굴로 다급하게 말했다.
“이 속물.”
석목은 채아의 머리를 가볍게 튕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야, 석두 내 머리 좀 그만 때려!”
채아가 날개로 머리를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가자.”
석목은 채아를 잡고는 건물 꼭대기로 날아갔다.
그리고 보탑 꼭대기에 서서 아무 생각 없이 뒤를 쳐다봤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백 리 안에 선 건물들은 전부 순수한 돌로 만든 탑들이었고, 시선의 끝까지 뻗어있었다.
건물들은 온전한 상태로 우뚝 서 있는 것도 있었고, 폐허 더미로 무너져 울창한 녹색 식물들 속에 뒤덮여 있는 건물들도 있었는데 무너진 건물들이 오히려 신비스러움을 더했다.
자세히 바라보니 온전하게 서 있는 건물들은 표면에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이토록 여러 해가 지났어도 깎여나가지 않아 매우 정교했고, 마치 살아서 숨을 쉬는 것만 같았다.
석목은 시선을 거두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이 유적지는 한때 휘황찬란하게 번성했던 게 틀림없었다.
석목은 다시 시선을 건물을 뒤쪽으로 던졌다. 하지만 비경의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이제 막 신식으로 찾으려던 참이었다.
이때, 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두, 그만 봐. 누가 오고 있어.”
석목도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먼 하늘에서 빛이 수십 갈래 나타나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석두, 저 사람들도 보물을 찾으러 온 걸까?”
채아가 물었다.
“우선 영수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
석목은 눈에 빛을 드리우며 채아를 영수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이때, 다가오는 사람들도 석목을 발견했는지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날아왔다. 그러자 훤칠하고 사나워 보이는 사내 수십 명이 동시에 나타났다.
사내들은 몸에 털이 수북하게 자라나 있었고, 털에서는 옅은 금색이 뿜어져 나왔다. 또한 낮은 콧대에 들창코가 돋보이는 이 사내들은 미천거원과는 다른 원숭이 요족 같았다.
그 중 우두머리는 금색 옷을 입은 중년 사내였는데 표범 같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고, 얼굴에는 긴 수염이 험상궂게 자라나 성계 정상에 이른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다른 동료 십여 명도 대부분 성계 경지였고, 몇 명만 천위 경지였다.
사내들은 석목이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긴장을 풀었다. 그 중에는 심지어 법보를 꺼내든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는 왜 왔는가?”
금색 옷을 입은 우두머리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석목은 이미 기운을 성계 후기로 낮췄기 때문에 사내들의 수련 경지와 신식으로는 석목의 진정한 수련 경지를 알 수 없었다.
“때마침 여길 지나가던 참이었는데 유적지가 있기에 들어왔소.”
석목이 말을 하며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인족? 이곳에 인족이 웬일이야?”
보라색 옷을 입은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그게 뭐가 중요해?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여기 숨겨진 비밀을 흘려보내서는 안 돼.”
성계 후기에 이른 얼굴이 동그란 사내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석목의 눈에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비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녀석들은 이 유적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은 것 같았다.
금색 옷을 입은 사내가 흉악한 눈빛으로 입을 열려고 할 때, 마른 체형에 날카로운 눈빛이 돋보이는 남자가 사내를 말렸다.
“부타(浮坨) 족장님, 이놈은 절대 수련 경지가 약하지 않아요. 게다가 여긴 귀안자독주(鬼眼紫毒蛛)의 소굴과 매우 가까우니, 전투를 벌이면 아마 독거미들이 몰려오겠죠. 독거미들은 수가 많은데다가 맹독까지 품고있어 엮이면 일이 번거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인족 놈을 데리고 비경으로 들어가죠. 나중에 방패처럼 쓸 수 있을지도 모르니.”
중년 남자는 입을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전음을 보냈다.
그 말을 들은 금색 옷을 입은 사내는 눈에 빛을 띠었다.
“구탑(丘塔), 너 이 녀석 아주 영리한데? 비경 속은 위험천만하니 저 자식을 앞장세우면 되겠군.”
석목은 둘을 바라보며 싸늘한 눈빛을 내비쳤다.
석목의 신식은 둘보다 훨씬 뛰어났기에 둘이 전음을 보내며 나누는 말이 뚜렷이 들렸다. 그래서 석목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표정으로는 드러내지는 않았다.
부타라 불리는 사내가 터벅터벅 석목에게로 걸어와 입을 열었다.
“인족 도우님, 우리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그런 미련한 사람들이 아니오. 그러나 도우님은 우리가 탐색하고 있던 비경에 잘못 들어오셨으니 우리는 소식이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 도우님을 그냥 내보낼 수 없소. 그러니 우리가 비경으로 들어가 보물을 꺼내기 전까지는 우리와 함께 움직여야하겠소.”
부타는 그리 말을 하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수십 명이 우르르 다가와 석목을 둘러쌌다.
“그러지요.”
석목은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석목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자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법보 영기를 꺼내들었던 사람들도 다시 무기를 거두어들였다.
긴장했던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도우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개의치 마시오. 이제 출발하자. 저쪽에도 아마 준비가 다 되었을 테니.”
부타가 웃는 얼굴로 석목에게 말을 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다가와 석목을 붙잡고는 폐허 속으로 날아갔다.
* * *
잠시 후에 일행은 유적지의 깊은 곳에 도착했다.
폐허가 된 담장과 절벽 사이에 지름이 십 장이나 되는 검은 구덩이가 있었는데 그 안에선 몇몇 사람들이 힘차게 굴착을 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이미 검은 흙이 몇 장이나 될 정도로 수북이 쌓여있었다.
“어때? 찾았어?”
부타가 구덩이 변두리에 서서 큰소리로 물었다.
메아리의 울리자 구덩이 밑의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석목은 아무 말 없이 부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아래에 있는 몇몇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구덩이에는 푸른 옷을 입은 차분해 보이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석목과 함께 남해성에서 나온 풍리였다.
흑마 성역에서 헤어진 후로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석목은 단 한 번도 풍리와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이 별에서 다시 만났다.
풍리가 풍기는 기운은 석목과 같은 성계 후기였다. 그런데 석목이 신식으로 훑어보니 풍리도 어떤 방법을 써서 기운을 조절한 것이라 풍리의 진정한 실력은 신경 초기일 터였다.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신비스럽게 나타났던 터라 석목은 오히려 풍리가 나타난 게 많이 놀랍지는 않았다.
“풍리 형. 이곳에서 다 만나다니요.”
석목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 석목!”
풍리는 석목을 보자 깜짝 놀라 몸을 날려 반갑게 석목의 옆으로 다가갔다.
“풍 형, 둘이 아는 사이인가?”
부타가 눈에 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 석 형은 내 오랜 친구네. 이곳에서 다 만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