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3화. 현화 비경
“석 형, 진기가 금제되서 우리도 저 금원족 놈들과 비슷해졌을 거야. 심지어 더 약해졌을 수도 있어.”
풍리가 말했다.
순간, ‘펑!’하는 소리가 함께 금원족 사내 한 명이 하늘에서부터 석목과 풍리 근처로 떨어졌다.
이 사내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보아하니 그리 큰 부상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황건 역사가 번개처럼 사내를 덮쳤는데 죽여 버리지 않는 걸 보니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금원족 남자는 겁에 질린 얼굴로 석목과 풍리를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사내의 눈에서 음흉한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사내는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허겁지겁 도망을 쳤고, 황건 역사가 사내를 뒤쫓았다.
금원족 사내는 순식간에 석목과 풍리에게로 다가와 둘을 스쳐 지나갔다.
황건 역사가 석목과 풍리의 앞에 나타났다.
황건 역사는 석목과 풍리를 보자 곧바로 공격 상대를 바꿔 두 주먹을 휘두르며 촘촘한 주먹 그림자를 날렸다. 그리고 놀라운 폭발음을 내며 석목과 풍리를 공격했다.
풍리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금원족 사내를 공격할 새도 없이 한쪽으로 피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금원족 사내를 한 번 쳐다보고는 전혀 발을 움직이지 않은 채 손바닥으로 황건 역사의 주먹을 받아쳤다.
이어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건 역사의 주먹이 석목의 손바닥과 부딪치자 허공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황건 역사가 아무리 주먹을 휘둘러도 석목을 공격하지 못했다.
풍리와 금원족 남자는 가까이서 그 광경을 보고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드러냈다.
석목은 손바닥으로 황건 역사의 주먹을 감싸고는 뒤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황건 역사가 석목에게 붙잡혀 허우적대며 벗어나려 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힘없는 어린 아이가 농락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석목이 눈빛을 반짝이자 또 다른 손이 희미하게 변하더니 황건 역사의 가슴을 내리쳤다.
쩌걱!
단단하기 그지없던 황건 역사의 가슴은 종잇장처럼 가볍게 뚫려버렸다.
황건 역사는 몸을 비틀거리다가 쓰러져버려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전부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처음으로 무너진 황건 역사였다!
나머지 황건 역사들도 공격을 멈추었다. 그리고 황건 역사 한 구가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전부 고개를 돌려 석목을 바라보았다.
순간 나머지 열일곱 황건 역사가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검은 그림자로 변하여 번개처럼 석목을 덮쳤다.
부타를 비롯한 금원족들은 그 틈에 한쪽으로 물러나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만 보았다.
“석 형, 조심해!”
석목이 황건 역사를 격살하는 모습을 보긴 했으나 열일곱 구가 동시에 날아오자 풍리가 걱정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석목은 아무 말 없이 몸을 날려 희미한 그림자로 변하더니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순간, 한 황건 역사의 앞에서 공기 파동이 일어나더니 석목이 나타났다.
황건 역사는 빠르게 멈춰 서서 곧장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주먹을 완전히 휘두르기도 전에 ‘펑!’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건 역사는 몸통이 마치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날아가 십 장 밖에 있는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두 번 정도 뒹굴다가 움직이길 멈추었다.
석목은 몸을 굽혀 다시 검은 잔영을 그리며 몇 장 밖에 있던 또 다른 황건 역사의 옆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황건 역사가 움직이기도 전에 석목의 주먹이 가슴을 뚫어버렸다.
석목은 연이어 번쩍이면서 수많은 잔영을 이끌고는 황건 역사들 사이를 오갔다.
펑, 펑, 펑!
황건 역사들의 몸통은 마치 광풍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아무 힘없이 날아갔다가 다시 무겁게 땅에 떨어지며 죽어버렸다.
풍리를 비롯한 일행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는 놀란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특히 황건 역사와 힘을 겨뤄봤던 부타와 같은 금원족들은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막강한 힘을 지닌 황건 역사들은 석목 앞에 서자 마치 바람에도 무너질 것처럼 약해보였다.
금원족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겁에 질린 표정을 드러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니.
만약 석목이 모든 걸 꿰뚫고 있기라도 한다면……
부타는 심장이 쿵 내려앉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때, 벽을 둘러싼 부문들이 다시 밝아지면서 공간 속에 흐르던 기이한 파동이 사라졌다.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어!”
“금제의 힘이 사라졌어!”
금원족은 기이한 파동이 사라지자 몸속에 흐르던 진기가 원래대로 돌아와 희색을 드러냈다.
부타는 긴장을 풀며 재빠르게 진기를 운용해보았다. 그리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을 하며 경계하는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부타는 진기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니 석목과 싸우게 된다면 겨뤄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석 형, 실력이 놀라울 정도군.”
풍리가 석목에게로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육신이 더 단단해졌을 뿐이죠.”
석목이 담담하게 웃었다.
이때, 돌문 맞은편에 있는 벽에서 붉은빛이 번졌다. 그리고 붉은 과두 문자가 나타났는데 이건 상고 시대의 문자였다.
그리고 벽 아래에 자리한 돌문이 천천히 양쪽으로 갈라지며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일행은 벽 근처로 다가왔다.
금원족들은 십여 명만 살아남았고, 모두 석목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이건 무슨 문자지?”
풍리가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한쪽에 서 있던 부타를 비롯한 금원족들도 막연한 기색을 드러냈는데 그들도 이 문자를 모르는 것 같았다.
“이것은 상고 시대의 문자입니다. 신문이라 하지요.”
석목이 말했다.
“석 형, 이 문자를 알고 있는가? 저 위에 뭐라고 적혀있는가?”
풍리가 희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금원족들도 전부 석목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조금만 알죠. 전부는 못 읽어요.”
석목이 말했다.
예전에 대장로가 호천성염의 공법을 해석해준 뒤에 석목은 따로 대장로에게 이런 상고 신문을 배운 적이 있었다.
대장로도 이런 문자를 완벽하게 익히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석목도 전부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눈앞에 적힌 문자는 전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익혔다.
벽에는 한 현화 상인이 평생 걸어온 행적이 기록되어있었는데 이 사람은 상고 시대의 수련자였다. 그리고 신통력이 끝에 이르렀지만 성격이 괴팍하여 제멋대로 일평생을 살아왔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말년에 이르러 수원이 다 하였을 때, 온몸으로 익힌 통천 신통을 물려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려 이 비경을 남겨놓았다는 내용이었다.
이 비경은 시험을 치르는 곳이며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대물림을 받는 동시에 남겨둔 보물들을 가질 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비경에서 치르는 시험은 총 세 단계로 나뉘며 각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비밀스런 보물을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상고 시대의 강자가 남긴 보물이라고!”
부타를 비롯한 금원족들은 흥분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여기가 첫 번째 시험이겠지?”
풍리도 가슴이 뜨거워졌지만 애써 냉정을 찾으며 말했다.
“아마도 그렇겠죠.”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이 말을 마치자 ‘찌이익!’ 소리가 울리더니 땅이 갈라지면서 굵기가 몇 척에 이르는 돌기둥이 서서히 땅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돌기둥 꼭대기에는 검은 석합이 하나 있었다.
부타를 비롯한 금원족들은 눈에 불을 켜고 석합을 가지려 했지만 석목이 돌기둥 옆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걸음을 멈추었다.
퍽!
석합은 자동으로 열렸다.
모두가 석합으로 시선을 던졌으나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석합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비어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보물을 포상으로 준다며?”
풍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석목, 일부러 잘못 번역한건 아닌가?”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금원족 중에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은 눈살을 찌푸리며 싸늘한 눈으로 금원족들을 한 번 쳐다봤다.
금원족들이 비경 입구로 데려와주지만 않았더라면 석목은 진즉에 이들을 해치웠을 터였다.
“석 형, 저놈들이 지껄이는 건 신경 쓰지 마! 이 시험을 치른 후에 받을 포상은 이미 누가 가져간 것 같아.”
풍리가 말했다.
“누군가 먼저 왔었다는 건가?”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안화의 모습을 떠올렸다.
혹시 이 포상이 안화가 지난번에 가져갔던 그 호천현화번인가?
하지만 안화에겐 붉은 석후 조각상이 없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을까?
“어찌 됐든 헛된 짓을 했군.”
풍리가 말했다.
“갑시다. 다음 시험에는 뭐라도 나오겠지요.”
석목이 통로로 걸어갔다.
풍리가 그 뒤를 따랐고, 둘은 금원족을 거들떠보지도 않고선 안으로 들어갔다.
금원족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부타 족장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계속 들어갈까요?”
금원족들은 전음을 보내며 논의를 했다.
“어렵게 들어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부타는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이를 악물고는 전음을 보냈다.
“그런데 석목이라는 자가…… 우리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구탑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석목이 황건 역사를 죽이는 순간을 떠올리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석목이라는 자는 실력이 그리 강하지 않을 거야. 내가 봤을 때, 그 녀석은 육신을 단련했어. 그러니 힘으로 황건 역사를 죽일 수 있었던 거고.”
부타가 차갑게 웃으며 전음을 보냈다.
“부타 족장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 자는 운이 좋았을 뿐이죠.”
“맞습니다. 여긴 우리 선조님이 발견한 곳이니 절대 남에게 좋은 일을 해서는 안 되겠죠.”
“그럴 테죠. 석목은 고작 성계 인데다가 우리 쪽 머릿수가 많으니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다들 한 마디씩 보태며 부타 족장에게 힘을 실었다. 하지만 구탑은 여전히 망설였다.
“앞으로 치를 시험에선 아마 이런 금제 진기가 나타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우리가 힘을 합치면 절대 석목과 풍리에게 밀리지 않아. 게다가 돌문이 닫혀버려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어.”
부타가 말했다.
“네. 그럼 계속 뚫고 나가 봅시다!”
구탑이 꽉 닫힌 푸르스름한 돌문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원족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빠르게 석목과 풍리를 쫓아갔다.
석목과 풍리는 나란히 걸어가면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리자 서로 한번 쳐다보고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에 눈앞에 또 다른 돌문이 하나 나타났는데 이전과 같이 가운데에 움푹 파인 원숭이 모양이 있었다.
부타는 원숭이 윤곽을 한참 바라보다가 앞으로 다가가서는 입을 막고 있는 조각상을 파인 부분에 밀어넣었다.
그러자 푸른 돌문 속에서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 * *
돌문이 열리자 또 다시 검은 동굴이 나타났는데 마치 입을 벌린 채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삼킬 듯한 놀라운 기운을 풍겼다.
금원족들은 한 번 경험을 해봤기에 더욱 신중하게 움직여 동굴의 문이 열렸는데 아무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석목의 실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에 이제 석목에게 앞장서서 들어가라고 으름장도 놓지 못해 금원족들은 조심스럽게 안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석목과 풍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 안쪽에는 드넓은 공간이 펼쳐졌는데 멀리 있는 벽에서는 옅은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위에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었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부타는 석목과 풍리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더니 잠깐 머뭇거리다가 사람들을 이끌고선 따라 들어갔다.
너무 빨리 들어가면 공격을 당할까봐 두려웠고, 너무 늦게 들어가면 석목과 풍리가 보물을 몽땅 챙길까봐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