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7화. 낡은 깃발 아홉 개
굉음과 함께 아홉 마리 화룡의 검붉은 배쪽 비늘에서 갑자기 빛이 밝아졌다. 그리고 빛이 용의 몸통을 따라 조금씩 목구멍을 거치더니 입으로 흘러 들어가 붉은빛이 번졌다.
훅!
굵기가 한 장 정도에 이르는 화염 기둥 아홉 갈래가 커다란 입 아홉 개에서 뿜어져 나와 사방팔방에서 한곳으로 모이자 크기가 수십 장에 이르는 고리 모양 화염 벽을 이루면서 석목과 풍리에게로 몰려갔다.
뜨거운 기운 파동이 공기 속에서 파도처럼 사방을 휩쓸었다.
“석 형, 이 화염은 매우 대단해 보이네.”
풍리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몸에 빛을 반짝이며 검붉은 갑옷을 둘렀는데 바로 조금 전에 획득한 그 갑옷이었다.
석목은 불 속성 공격을 뛰어나게 썼으며 불 속성 법칙의 힘도 깨우쳤기에 불을 풍리보다 훨씬 강력하게 다스릴 수 있었다.
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석목은 풍리보다 더욱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화룡들이 뿜어내는 화염 속에는 법칙의 힘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불의 힘이 매우 단단했으며 그 위력은 호천성염보다 훨씬 강력했다.
석목은 온몸이 불편하게 들끓었는데 혈액마저 함께 들끓는 것 같아 매우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화염 벽이 빠르게 밀려오자 석목은 눈에 불빛이 활활 타올랐다.
석목은 곧바로 호천현화번을 날려 그와 풍리의 주변에 떨구었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며 법결을 계속 바꾸자 현화번 세 개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휙!
세 고번에서 붉은 구름과 밝은 화염이 끊임없이 흘러나와 뭉쳐지면서 크기가 백 장 가까이 되는 화운을 이루더니 빠르게 맴돌았다.
화운은 몰려오는 화염 벽을 막아버렸다.
풍리는 탄복하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이 불을 다스리는 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쾅!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화운으로 만들어진 현화 공간 밖에선 고리 모양 화염 벽이 끊임없이 부딪쳐 대지마저 흔들렸다.
화염 벽이 다가가지 못하고 밖으로 밀리자 아홉 마리 화룡은 입을 크게 벌려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용은 콧구멍으로 굵직한 화염을 뿜어 냈으며 입속에 머금은 화염의 색깔은 더욱 짙어졌다.
검붉은 화염이 모여들자 화염 벽은 기세가 크게 흔들렸고, 석목이 만든 현화 공간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갔다.
쩍, 쩍,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현화 공간 바깥쪽에 순식간에 금색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거미줄처럼 갈라지는 균열은 곧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석목이 코웃음을 치며 법결을 다시 바꾸자 몸에서 붉은빛이 순식간에 번졌다.
석목의 손바닥에서 화려한 빛이 밝아지더니 무수히 많은 붉은 부문들이 날아 나왔다. 그리고 부문들이 펼쳐지자 원래 생겼던 현화 공간이 사라져버렸고, 곧이어 서른 장 정도 되는 붉은 공간으로 바뀌었다.
붉은 공간은 면적이 현화 공간보다 몇 배나 줄어들었기에 현화 공간이 막고 있던 화염 벽은 순식간에 날아와 붉은 공간과 부딪쳤다.
쿵!
붉은 공간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원래 모습대로 돌아왔다.
붉은 공간은 보기에 얇아 보였으나 현화 공간 보다 더욱 단단했다.
공간 속에는 빛이 맴도는 작은 화산 봉우리가 놓여있었고, 뜨거운 용암이 흘러 다녔다.
붉은 공간 속은 마치 작은 세계 같았다.
“석 형, 영역의 힘을 쓰는 건 어려울 텐데. 혹시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나?”
풍리가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몸속의 정혈이 끊임없이 사라지는 상황을 말하는 건가요? 이 화룡들이 내뿜는 화염은 아주 특별해요. 몹시 뜨거울 뿐만 아니라 우리 몸속에 흐르는 정혈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죠. 아마 정혈을 모두 잃는다면 신경 수련 경지라 할지라도 죽어버릴 거예요.”
석목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정면 돌파 할 수 밖에 없겠군.”
풍리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검은색과 붉은색을 번쩍이며 화염 벽을 덮치려고 했다.
“잠깐만요.”
석목이 풍리를 멈춰 세웠다.
석목의 손에서 법결이 살짝 바뀌자 뒤편에 자리한 영역의 광막에서 어두워진 부분이 드러났다.
그러자 영역의 맞은편에 있던 화룡이 어두워진 곳을 덮쳐왔다.
화룡을 본 석목은 법결을 시전하여 법력과 화염을 영역 안에 불어넣었다.
붉은 공간은 순식간에 두 배로 커져 단번에 화룡을 가둬버렸다.
석목의 영역에 들어온 화룡은 순식간에 몸이 무거워지면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려버렸다.
그러자 석목이 곧바로 번천곤을 꺼내들어 곤봉을 휘두르며 화룡을 내리쳤다.
석목이 팽이처럼 돌아가면서 곤봉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멸선곤법.”
석목의 주변에서 흑백 빛이 찬란하게 폭발하였다.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두운 흑백 빛이 순식간에 수십 배나 불어나 마치 커다란 맷돌 두 개처럼 위쪽과 아래쪽에서 짓누르며 순식간에 화룡을 삼켜버렸다.
순간, 용이 울부짖는 소리가 흑백 빛에서 흘러나왔다.
붉은 화염은 부스러기가 되어 부서져 흑백 공간에서 흩날렸다.
검붉은 비늘이 끊임없이 흑백 맷돌에서 떨어지자 화룡의 커다란 몸집은 계속 허우적댔다. 이어서 화룡이 조금씩 분리되더니 흑백 빛 속으로 묻혀버렸다.
그 광경을 본 풍리는 얼굴에 희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때, 이미 부서져버린 용의 몸통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붉은 빛 덩어리로 변하였다.
쾅!
그리고 빛 덩어리가 마저 터져버렸다.
화염과 섞인 막강한 기운 파동이 사방팔방에서 밀려와 단번에 석목과 풍리를 백 장 밖으로 튕겨내 버렸다.
석목은 하늘과 땅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고,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피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몸속에 흐르던 혈액은 미친 듯이 들끓었고, 뜨거운 느낌이 점점 강렬해졌다.
석목은 다급하게 법결을 시전하여 간신히 요동치는 혈액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호천성염을 영역 속으로 불어넣어 강렬한 충격을 받은 영역을 안정시켰다.
“석 형, 괜찮은가?”
풍리는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석목에게 걸어오면서 물었다.
풍리는 석목보다 화염에 약해 만약 갑옷으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심각하게 다쳤을 터였다.
“괜찮아요. 영역이 단단해졌으니 한 마리씩 잡아서 전부 죽여 버리죠.”
석목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래!”
풍리는 눈에 빛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석목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법결을 바꿔 영역을 다시 작게 만든 후에 화룡이 다가올 때 쯤 곧바로 영역을 키워 화룡을 붙잡았다.
그러자 풍리가 몸에 빛을 번쩍이며 화룡을 향해 덮쳤다……
* * *
반시진 후.
석목과 풍리는 이미 같은 방법으로 화룡 두 마리를 더 잡았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나머지 여섯 마리 화룡은 더욱 난폭하게 변했고, 화염으로 달궈진 몸통을 날려 석목의 영역에 끊임없이 들이박았다.
석목의 집중력이 흐트러져 실수로 화룡 두 마리를 동시에 영역 속에 가둬버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안간 힘을 쓰면서 화룡 두 마리를 간신히 죽여 버려 지금 석목과 풍리는 몸속에 깃든 진기가 대부분 털려버렸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의 정혈도 화염 때문에 많이 소모되었다는 점이었다.
석목의 영역이 이전보다 훨씬 약해져 풍리의 눈에는 초조한 기색이 짙어졌다.
쾅!
붉은 영역이 흔들리며 부서져 버렸다.
그렇게 생긴 막강한 충격의 여파로 석목은 간신히 참고있던 피를 뿜었다.
영역이 찢어지자 나머지 세 마리 화룡은 한곳으로 모여 입을 크게 벌리고는 검붉은 화염을 뿜어냈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불의 파동이 밀려와 석목은 이를 악물고 법결을 시전하였다.
퍽!
석목의 가슴에 파란색 가마가 나타나자 그는 두 손을 앞으로 나란히 밀어내 손바닥으로 차가운 한기를 뿜어냈다.
석목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한기는 백 장 가까이 되는 얼음벽으로 변하여 화염을 막아냈다.
구전현공의 여덟 번째 단계를 수련한 후로 석목은 물 속성 힘을 훨씬 수월하게 시전할 수 있게 되었고, 음의 힘까지 더한다면 상고 신통인 빙백신광 만큼은 아니지만 화염을 막아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검붉은 화염이 하얀 얼음벽에 부딪치는 순간, 화염이 얼음에 붙어버렸다.
이어서 하얀 물안개가 피어올랐고, 막강한 힘 때문에 석목의 얼음벽이 뒤로 밀렸다.
이때, 풍리가 두 손을 바퀴 모양으로 돌리자 몸에 붙은 근육이 몇 배나 불어났다. 그리고 풍리의 몸에서 검은빛이 번지더니 갑옷도 함께 늘어났다.
풍리가 몸을 날려 얼음 벽 뒤로 다가가 두 손을 위로 치켜들고는 얼음벽을 짓눌렀다.
그러자 얼음벽이 뒤로 밀리는 속도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수증기는 점점 더 강렬하게 들끓었다. 또한 얼음벽은 조금씩 녹아내리며 점점 얇아졌다.
풍리는 몸속 정혈이 전부 증발해버리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 때문에 몸 상태가 최악인 상황에 놓였지만 풍리는 온 힘을 다해 얼음벽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석 형, 부탁해.”
풍리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리를 질렀다.
석목은 혈해를 연 덕분에 정혈이 풍리보다 훨씬 강력한데다 몸 상태도 훨씬 괜찮았다.
석목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날려 얼음벽으로 향했다.
석목은 허공에서 번천곤을 높이 치켜들고는 몸을 날리더니 불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탱!
검붉은 불바다 속에서 금빛이 터지자 번천곤이 천기곤초에서 뽑혀 나와 길이가 백 장인 눈부신 금색 곤봉 그림자로 변하였다. 그리고 들끓는 불바다 속을 내리쳐 불바다에 구멍을 하나 찢어놓았다.
이어서 번천곤이 곧장 화룡 세 마리의 머리를 내리쳤다.
화룡들은 온 힘을 다해 벗어나려했지만 번천곤이 만들어낸 곤봉 그림자가 떨어지자 꿈쩍도 하지 못했다.
우르릉!
굉음이 울려 퍼졌으며 무수히 많은 빛이 찢어지면서 진동이 이는 가운데 폭우처럼 뿜어져나갔다. 그 순간, 검붉은 불바다는 무수히 많은 조각이 되어 찢어졌다.
한참 후에 모든 화염이 전부 꺼져버렸다.
그리고 석목이 시전한 얼음벽도 타오르는 화염 때문에 한 뼘 두께로 줄어들었다.
불빛이 전부 사라지자 석목과 풍리가 나타났다.
석목은 번천곤으로 몸을 지탱하며 바닥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한쪽에 있던 풍리는 얼음벽에 기대고 앉아있었는데 석목과 함께 기진맥진하여 녹초가 되었다.
석목과 풍리는 진기가 전부 빠져버린 데다가 몸속에 흐르던 정혈마저 타오르는 화염 때문에 반이나 말라버려 원기가 크게 상했다.
둘은 말할 힘도 없었기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각자 단약을 삼킨 후, 손에 영석을 쥐고는 천천히 기운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홉 마리 화룡이 전부 죽어버리자 공간을 비추던 불빛도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어둠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아 주변은 오히려 더욱 밝아졌고, 모든 것들이 뚜렷하게 보였다.
* * *
한참 후에 석목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의식을 하며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순간 석목은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면적이 매우 넓은 둥그런 제단 위에 놓여있었다.
제단의 바닥엔 육각형인 돌들이 깔려있었으며 저마다 울퉁불퉁하고 화려한 부문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석목은 바닥이 평평하지 않다는 걸 느꼈었는데 그건 바로 돌 위에 새겨진 부문들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석목은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기쁨이 차올랐다.
제단 외곽의 아홉 곳에는 붉은 깃발들이 하나씩 꽂혀있었는데 모두 색이 매우 어둡고 오래된 낡은 깃발들이었다.
깃발은 특별한 위치에 놓여있어 서로 호응을 하면서 은은하게 기이한 진법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