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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788화 (788/916)

788화. 꿈속에서의 이별

석목은 간신히 차오르는 흥분을 억누르며 다시 깃발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아홉 깃발은 석목이 갖고있는 호천현화번과 매우 비슷했고, 풍기는 기운도 거의 똑같았다.

윙!

붉은 깃발 아홉 개와 호천현화번 세 개는 서로 이끌리더니 동시에 붉은빛을 뿜어냈다.

“어떻게 된 거지?”

석목이 놀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풍리도 놀란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 운이 정말 좋군. 이 아홉 고번과 네가 가지고 있는 세 화번이 한 묶음인 것 같아. 아주 흔하지 않은 묶음 법보지. 네가 자기고 있는 게 주번(主幡)이고, 이 아홉 개가 부번(副幡)이야. 열두 화번을 동시에 시전하면 십이도천현화대진(十二都天玄火大陣)을 펼쳐 강제로 진법 속에 들어온 강적을 연화할 수 있을 거야.

이 진법은 아주 대단해서 상고시대부터 유명했지. 진법을 시전하는 사람이 충분한 원기를 써서 버틸 수만 있다면 대진의 위력을 끝없이 끌어올려 신경 강자라 할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돼!”

수령자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매우 기뻐했다.

“아홉 부번은 많이 망가졌구나. 조금 전에 화룡 아홉 마리는 진법에 남아있는 영력으로 살아났을 텐데 이미 위력이 많이 꺾인 상태였어. 그렇지 않았더라면 너희 둘은 이미 시체가 되었을 테지.”

수령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군.”

석목은 여전히 놀라움을 멈출 수 없었다.

이어서 석목이 주문을 외우며 아홉 갈래 불빛을 날려 부번 아홉 개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부번이 가볍게 뽑혀져 나와 석목의 손으로 날아왔다.

부번 아홉 개를 바라보는 석목은 눈에 기쁨이 스쳤다.

아홉 부번은 처음 호천현화번을 봤을 때처럼 많이 파손되어있었고, 영력도 대부분 빠져나갔다.

하지만 부번의 본원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충분한 화염의 기운만 있으면 복구할 수 있어 큰 상관은 없었다.

“풍 형, 아홉 깃발은 제가 꼭 쓸 일이 있어요. 염치없지만 제가 챙기겠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돌려 풍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후, 조금 전에 받은 공격은 온전히 석 형의 힘으로 막아냈네. 그리고 전에 이미 약속하지 않았는가? 이번 시험을 치르고 받을 포상은 석 형이 챙기라고. 마음 편히 챙기게.”

풍리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곧바로 부번 아홉 개를 거두어들였다.

이때, 먼 곳에서 ‘쩍!’ 소리가 울렸다.

석목과 풍리는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단 꼭대기에 놓인 바닥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한 장 정도 되는 붉은 연못이 튀어나왔는데 그곳에서 핏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헌데 혈무는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고, 오히려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와 순식간에 정신이 맑아졌다.

“이건 뭘까?”

석목과 풍리는 피연못에서 신묘함을 느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고서 서로 눈치만 살폈다. 분명히 이 피연못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전에는 무턱대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좋아! 내 시험을 세 번이나 통과했으니 재능과 자질을 증명했군. 내가 지니고 있는 모든 걸 물려받기에 충분해.”

거친 목소리가 제단의 허공에서 울려 퍼졌다.

석목과 풍리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흠칫 놀랐다.

“혹시 현화 상인?”

석목이 말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

풍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달콤한 피연못이 다친 기혈을 빠르게 회복해줄 게다. 조금 전에 구룡현화대진(九龍玄火大陣)으로 인해 다친 기혈을 보충하려무나.”

현화 상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석목과 풍리는 그 말을 듣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석목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선 전음으로 수령자에게 확인을 하며 동시에 신식으로 피연못을 살폈다.

“맞아. 이게 바로 전설 속의 혈지감로(血之甘露)군! 세상에 사는 막강한 생령들 수백 종의 정혈을 수집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련해서 만든 연못이지. 다친 기혈을 치료해주는 보물이라 육신을 수련한 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지.”

수령자가 말했다.

신식으로도 피연못에 이상한 점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석목은 아무런 의심 없이 곧바로 피연못으로 풍덩 뛰어 들어갔다.

몸이 피연못에 담기자 따뜻한 기류가 흘렀다.

석목은 눈을 감고는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마치 메마른 대지에 맑은 물을 쏟아 붓듯 다친 혈기가 곧바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야위었던 몸도 빠르게 회복되었다.

뿐만 아니라 골격과 근육이 피연못의 힘을 빨아들이자 훨씬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육신의 경지도 또 다시 경계를 돌파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석목은 유화조석에서 수련을 거치며 육신의 원만 단계를 절반쯤 이루었다가 이내 수련을 멈추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경지를 돌파할 기회를 찾은 것이었다.

석목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평온하게 가다듬은 후, 공법을 시전하여 피연못 속에 깃든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천천히 <천화신체공>에 적힌 혈해를 수련하는 비법을 시전하였다.

풍리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다가 석목에게 아무런 이상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피연못으로 뛰어들어 공법을 시전하며 손상된 기혈을 회복하였다.

쾅!

석목의 혈해가 한참 동안 들끓더니 천지를 뒤엎을 변화를 일으켰다.

혈해에서 파도가 겹겹이 밀려나가 미친 듯이 들끓더니 곧이어 아홉 갈래의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방대한 흡인력이 혈해 속에서 흘러나오자 혈지감로가 밀물처럼 석목의 혈해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뿌드득!

석목의 몸에서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흘러나왔고, 육신이 더욱 단단해져 근육과 뼈에 투명한 빛이 한층 생기더니 원만한 느낌을 풍겼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점점 더 많은 혈지감로가 혈해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수련을 하며 깊게 빠져있던 석목은 몸과 마음이 점점 희미해졌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때, 석목이 번뜩 깨어났다. 하지만 석목은 피연못 속이 아니 희미한 별하늘에 나타났다.

지금 석목은 또다시 백원왕으로 변신해있었다.

백원왕 앞에는 몸집이 방대한 회색 원숭이인 주염이 서 있었다.

석목은 곧바로 다시 꿈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기분이 조금 이상했는데 꿈속에 너무 오랜만에 왔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속으로 들어온 이유를 생각해내지 못한 석목은 생각을 떨쳐버리고는 다시 회색 원숭이를 바라보았다.

순간 석목은 멈칫했는데 회색 원숭이가 입은 금색 갑옷이 바로 천정의 신장들이 입는 갑옷이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너무나 놀라 가슴이 쿵쿵 뛰었는데 꿈속에서 본 바와 보화가 석목에게 말해준 말에 따르면 주염은 백원왕의 벗이었다. 그런데 왜 천정의 갑옷을 입고 있을까?

백원왕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고, 회색 원숭이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회색 원숭이가 하는 말을 듣자 백원왕은 표정이 변하면서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회색 원숭이는 한숨을 내뱉으며 먼 곳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다시 고개를 돌려 망설이는 듯하더니 또 무엇인가 타이르는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허나 백원왕은 여전히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회색 원숭이는 깊게 숨을 내뱉으며 백원왕을 향해 손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빛으로 변하여 먼 곳으로 사라졌다.

백원왕은 허무해진 눈으로 사라져가는 회색 원숭이를 바라보았고, 얼굴에 복잡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고 백원왕은 한참 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석목은 더욱 의아한 기분만 들었다.

* * *

이때, 석목의 심신이 한참 동안 흔들리더니 다시 본체로 돌아와 피연못에 나타났다.

“조금 전에 꾼 꿈은 무엇이지?”

석목이 눈을 번쩍 뜨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남해성에서 청란성지로, 그리고 다시 천하 성역으로 오기까지 백원왕과 관련된 일들을 수도 없이 많이 겪었다. 또한 지금까지 수련을 하며 석목은 예전에 꿈속에서 겪었던 일들의 실마리를 하나하나씩 찾을 수 있었다.

석목이 꿨던 꿈들은 백원왕이 살아있을 때 겪었던 일들이며 백원왕의 기억 속에 있던 가장 인상이 깊은 조각들이었다. 기억들은 백원왕의 혈맥 속에 스며들어 백원왕이 이미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혈맥 속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런 기억들은 대물림을 받은 석목의 몸속에 스며들었다.

특별한 상황이거나 어떤 자극을 받게 되면 이런 기억들이 소환되어 석목은 여러 차례 꿈속으로 들어가 백원왕이 살아있던 시절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슨 연유로 백원왕이 석목을 꿈속으로 끌어 들였을까? 그리고 꿈속에서 본 백원왕과 회색 원숭이가 이별하던 장면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석목은 의아함을 품고서 옆에 있던 풍리를 바라보자 문득 무엇인가 떠올랐다.

하지만 석목이 더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혈해에 이변이 일어나더니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석목은 곧바로 잡념을 던져버리고는 신식으로 몸속을 들여다보았다.

혈해 속에 일던 아홉 갈래 소용돌이가 점점 커지면서 육신의 아홉 군데를 연결하였다.

혈해의 힘이 아홉 소용돌이를 통하여 곧바로 몸속 곳곳으로 흘러들어가더니 육신의 힘이 강화되어 완벽한 순환을 이루었다.

석목의 몸에서 ‘쩍, 쩍!’ 소리가 울려 퍼지며 아홉 소용돌이가 완벽하게 연결된 순간, 육신의 경지가 크게 강해져 석목은 신기한 경계에 이르렀다.

석목은 벅차오르는 기분으로 피연못 속에서 날아 나와 허공에 서 있었다.

어느새 피연못이 맑은 연못으로 변하였고, 아주 옅은 붉은 기운만 흘러 다녔다.

가까운 곳에 있던 풍리는 혈지감로를 매우 조금만 흡수하여 손상된 기혈을 조금밖에 회복되지 못했다. 때문에 혈지감로는 구할 이상 석목이 흡수해버린 셈이라 풍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풍리는 깊은 숨을 내뱉으며 공법을 시전하여 피연못에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전부 빨아들이고는 연못에서 날아 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석목을 바라보더니 눈에 빛을 반짝였다.

석목은 피연못의 힘을 빌려 실력이 크게 강해졌는데 그 속도를 보자 풍리는 혀를 내둘렀다.

석목은 허공에 서서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자 온 몸의 모공이 열려 마치 모공까지 호흡을 하는 것 같았다.

거센 바람이 석목의 모공에서 흘러나오더니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텅, 텅, 텅!

풍리도 이 막강한 위압의 여파로 온몸이 흔들려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그리고 석목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몸을 멈춰 세운 풍리는 얼굴에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석목은 진기를 운용하지 않았으나 주변에 감도는 방대한 기세는 엄연히 석목의 육신에서 흘러나온 힘이었다.

육신의 힘이 내뿜는 기운만으로도 풍리를 뒤로 밀려나게 할 정도라니, 석목의 육신은 대체 어느 정도로 강해졌을까?

석목이 허공에서 천천히 내려오며 눈을 떴다. 그리고 차오르는 힘을 느끼며 석목은 흥분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피연못의 힘을 빌린 석목의 육신 경지는 육신의 원만 단계에 이르러 몸속 곳곳에 흐르던 힘이 하나로 합쳐졌다. 덕분에 석목은 이전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해졌고, 육신도 훨씬 단단해졌다.

만약 이제 다시 아홉 마리 화룡을 상대한다면 석목은 육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을 터였다.

“석 형, 실력이 크게 강해졌군! 축하해!”

풍리가 웃으면서 걸어왔다.

“운이 좋았죠.”

석목이 담담하게 말했다.

풍리가 대화를 이어가려고 할 때, 하늘에서 붉은빛이 떨어지더니 붉은 빛기둥으로 변하였다.

빛기둥 꼭대기에서 붉은 전집이 하나 나타나더니 기둥을 따라 천천히 날아왔다.

“나는 반세기를 종횡무진 누비면서도 적수를 거의 만나지 못했지. 그러니 이 한 몸에 지닌 신통을 모두 현화비록에 기록해 두었다. 이것들을 너에게 전수하니 반드시 제대로 수련해라. 그리고 나중에 종파를 만들어 내 한을 풀어주고 현화 상인의 위명을 떨치길 바라마.”

현화 상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더니 제단에서 한참을 메아리치다가 사라졌다.

그러자 하늘에서 떨어진 붉은빛도 천천히 사라졌고, 석목은 다급하게 붉은 전집을 받았다.

“현화 상인, 걱정 마십시오. 이 신통을 완벽히 전수받지 못할 수도 있으나 꼭 후손들에게 상인의 신통을 전수받게 만들어 종파를 만들도록 하여 소원을 풀어 들이겠습니다.”

석목이 허공에 손을 굽히며 정중하게 말했다.

풍리는 석목을 방해할까봐 조용히 한쪽에 서 있었다.

우르릉!

이때, 이변이 생겼다.

제단이 놓인 공간이 격하게 흔들리면서 모든 빛이 한참 동안 번쩍이다가 사라지더니 벽에 굵은 균열이 생기면서 돌들이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큰일이군요. 여기가 곧 무너질 것 같으니 빨리 나가죠!”

석목이 소리를 질렀다.

“가자!”

석목과 풍리는 두 갈래 빛으로 변하여 빠른 속도로 밖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에 빛을 반짝이며 석목과 풍리가 나타났다.

둘은 허공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비경이 있는 곳은 땅이 계속 흔들리다가 석목과 풍리가 나오는 순간, 무너지면서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맷돌만한 돌들이 사방으로 튕기며 먼지가 자욱하게 흩날리더니 한참 뒤에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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