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화. 실종된 성녀
잠시 후에 얼굴이 둥근 병사가 다시 건물의 입구에 나타났다.
병사는 전투 갑옷을 정돈하고선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띠며 대전의 문을 열고서 들어갔다.
대전 안에 놓인 탁자 옆엔 몸집이 웅장한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탁자에 놓인 향로를 바라보고 있는 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둥근 병사가 다가오자 사내는 고개를 들고는 곁눈질로 병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돌아왔어? 동쪽의 산골짜기를 순찰하라고 했잖아?”
사내가 귀찮은 듯이 말했다.
“어르신, 거긴 이미 다녀왔습니다. 별 문제 없었죠.”
얼굴이 둥근 병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빨리? 제대로 순찰한 거 맞아? 화도(火塗) 어르신 일행은 전부 주작성으로 가서 내게 이곳을 지키라고 했어. 그러니 꼭 정신을 차려야 해. 천봉족 패거리들이 따라서 들어오기라도 했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으름장을 놓았다.
“후후, 어르신, 과한 걱정인 것 같아요. 제가 이미 다 살폈습니다. 어르신, 걱정 마시죠.”
얼굴이 둥근 병사가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흥! 더 볼일 있는가?”
사내가 코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르신, 저희는 언제 다시 주작성을 공격합니까?”
얼굴이 둥근 병사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물었다.
“언제 공격할 지는 화도 어르신이 아직 말씀해주시지 않았어. 하지만 주작성의 전송 대진은 이미 망가진 데다가 수호 대진도 찢어졌으니 천봉 일족은 잡힌 물고기나 다름없지.”
사내는 몹시 귀찮았지만 자세히 대답해주었다.
“이미 잡힌 물고기라면 왜 단번에 해치우지 않나요?”
얼굴이 둥근 병사가 계속해서 물었다.
“윗분들 뜻은 나도 알 수 없어. 화도 선장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사내가 깊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럼 화도 어르신은 지금 무얼 하고 계십니까?”
얼굴이 둥근 병사도 깊은 숨을 내쉬더니 계속해서 물었다.
“선장 어르신과 신경 강자…… 음? 여석(余夕), 오늘 왜 이렇게 말이 많지? 너답지 않은데!”
사내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되물었다.
“어르신, 왜냐하면 저는 여석이 아니거든요.”
얼굴이 둥근 병사가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어서 빛이 반짝이더니 석목이 나타났다.
석목은 한 손을 굽혀 사내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뭐하는 놈이야!”
사내가 소리를 지르며 몸에 빛을 번쩍이면서 주먹을 들고는 석목을 내리쳤다.
훅!
석목의 손에서 붉은 화염이 타올랐다.
사내의 주먹은 석목의 화염에 닿는 순간 활활 타오르더니 뼈까지 재가 되어 불타버렸다.
“으악!”
사내가 짧고 다급하게 울부짖자 석목이 다시 그의 목덜미를 조였다.
사내는 너무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해. 화도는 주작성에 왜 갔지?”
석목이 계속해서 물었다.
사내는 대답을 하지 않고는 남은 손가락 하나로 앞쪽을 짚어 빛을 만들었다.
그러자 석목은 얼굴이 싸늘해지면서 한 손으로 사내의 팔을 잡고는 또다시 화염을 뿜어내 나머지 손도 태워버렸다.
“전신하겠다고? 비술로 수혼을 하는 수밖에 없겠군.”
석목이 말했다.
“꿈…… 깨!”
사내가 간신히 두 글자를 내뱉은 순간, 미간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퍽!’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이건 사내의 신식에 설치한 금제였는데 석목은 신경 강자였지만 여전히 막을 수 없어서 성배가 터져버리는 광경을 볼 수밖에 없었다.
석목은 이곳에서 폭발음이 울렸으니 주변 전함의 천정 병사들이 다가올 터라 더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석목은 다시 빠르게 기운을 거두어들이고는 건물에서 숨어 나와 전함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정의 전함이 모인 부지에서 나와 멀리 날아가 버렸다.
* * *
석목은 기분이 착잡해졌고, 심지어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무암성을 공격했던 두 선장 말고도 이곳에 또 다른 선장이 있다는 건 전혀 생각지 못한 바였다.
아직 이 선장이 갖춘 실력을 알 수는 없었으나 선장 밑으로 신경 강자도 여러 명 있을 터였다. 게다가 주작성을 공격하는데 대대적으로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라 걱정이 되었다.
주작성이 뚫렸는데 전함 부대에 붙잡힌 천봉족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화도 선장과 모든 신경 강자들도 전함 부대에 없는 것이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걸까?
천봉 일족의 중요한 인물들을 추살하고 있는 걸까? 종수와 관련이 있을까?
석목은 생각을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져 곧바로 하늘로 몸을 날렸다.
석목은 다시 주작성에 도착했고, 곧바로 한 손을 흔들어 채아를 소환하였다.
“석두,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채아가 나오자마자 날개를 펄럭이며 석목의 어깨에서 툴툴거렸다.
“채아, 이 수호 대진에서 뚫린 곳이 어딘지 봐줘.”
석목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채아는 석목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고서 눈에 빛을 반짝이며 주작성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 채아가 눈에 빛을 반짝이며 날개로 앞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쪽이야.”
석목은 채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붉은 결계 위에는 열 장 정도 되는 검은 틈이 찢어져 있었으며 대진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가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석목은 신식으로 주변에 천정의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틈을 비집고서 들어갔다.
수호 대진을 뚫고 들어간 석목은 두터운 성운을 질러 들어가자 막강한 흡인력을 느껴 몸이 주작성으로 떨어져 버렸다.
* * *
반각 후에 별똥별이 하늘을 가르며 파란 바다로 빠졌다.
풍덩!
바다 위에 열 장 높이 거대한 파도가 솟아올랐다가 주변 백 장 밖으로 퍼져나갔다.
파도 가운데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석목이 다시 바다에서 날아 나와 육지로 향했다.
세 시진 후에 봉익성의 상공에서 빛을 반짝이며 석목과 채아가 허공에 나타났다.
“석두, 여기가 정말 봉익성이야?”
채아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믿기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석목은 목이 잠겨있어 입만 벌린 채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봉익성의 높고 견고하던 성벽은 반쯤 무너져 내렸으며 깨진 벽돌들이 어지럽게 쌓여있는데다가 쌓인 자갈 틈 사이로 피투성이가 된 찢어진 시체가 보였다.
성벽 안쪽엔 가옥들과 상점들이 절반 가까이 폐허가 되어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또한 허물어진 건물들끼리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으며 그 위에 놓인 대들보는 반쯤 매달린 채로 휘청거렸다.
성시 곳곳이 온통 새까맣게 타버려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든게 무너진 광경은 봉익성에서 벌어진 전투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보여줬다.
석목이 채아를 데리고 큰 길을 따라 안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처참한 광경을 보면 볼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눈에 들어오는 건 온통 만신창이가 된 모습들 뿐이었다.
길가에는 망가진 천봉 일족의 전함들이 여러 척 있었고, 대부분 원래 형태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천봉 일족이 자리 잡은 내성에 이르자 석목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안타깝게도 내성은 외성보다 훨씬 더욱 심하게 훼손되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내성에는 온전한 건물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며 곳곳에는 부서진 담벼락과 전사한 천봉족의 시체들이 가득했다.
무너진 벽이든 널브러져 있는 시체든 온통 검게 그을려있었다. 또한 온 폐허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으며 살아있는 사람의 기운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석목은 눈을 감고 신식을 보내 천봉 일족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어때? 석두, 종수 누나를 찾았어?”
채아가 물었다.
석목이 천천히 눈을 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몸에 빛을 반짝이며 남쪽으로 날아갔다.
* * *
대략 삼천 리 정도 날아가자 깊은 붉은 골짜기가 나타났다.
석목은 채아를 데리고 골짜기의 입구로 내려왔다.
골짜기는 이미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돌계단 위 곳곳이 전부 깨져있었다.
높게 걸려 있던 붉은 현판은 이미 토막이 난 채로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파편을 보니 ‘봉명골’이라는 세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길 곳곳에서 전투를 치른 흔적이 보였다.
골짜기 양쪽에 자란 불타는 오동나무들의 잎사귀는 피로 물든 듯이 붉게 빛났다.
석목은 보면 볼수록 마음이 급해져 골짜기 안쪽에 자리한 무너진 건물들을 지나 조극과 교전을 치렀던 천갱에 도착했다.
천갱에 솟아있던 돌기둥 아홉 개는 전부 부서져 천갱을 절반이나 채워버렸다.
봉익성처럼 봉명골에도 살아있는 천봉족은 한 명도 없었다.
“석두, 여기서도 종수 누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어떻게 하지?”
채아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한 곳이 더 있어. 가보자.”
석목이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을 되짚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염균산?”
채아가 물었다.
염균산은 석목과 종수가 수련을 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종수가 석목과 부부의 연을 맺은 곳이니 봉익성과 봉명골에 종수가 없다면 아마 거기에 있을 터였다.
* * *
석목은 대략 반시진을 날아서야 도착했다.
염균산은 예전과 똑같이 온 산이 검게 그을린 상태였으며 골짜기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올라 먼 곳에서도 짙은 유황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화산의 입구에서는 용암이 들끓었고, 용암이 밀물처럼 끊임없이 암벽을 내리쳐 붉은 별빛처럼 흩날렸다.
석목은 화산의 입구 안쪽을 반각이나 훑어보았지만 여전히 종수를 찾지 못했다.
“이곳도 아닌가봐.”
석목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제 막 떠나려고 할 때였다.
“아니야. 석두, 이 화산 안에 결계가 있는 것 같아.”
채아가 눈에 빛을 반짝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석목이 다급하게 돌아서서 다시 화산 안쪽을 바라보았다.
용암은 매우 규칙적으로 들끓고 있었는데 정확히 암벽 중에 한 곳으로만 부딪치는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았다.
석목은 손에 불빛을 반짝이며 화산의 입구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훅!
커다란 화염 주먹 그림자가 화산의 입구를 강하게 내리쳤다.
화산의 입구 안에서 ‘쩍!’ 소리가 울리더니 노란 결계가 나타났다가 이내 부서져 버렸다.
결계가 부서지자 화산의 입구 속에서 기운이 열 몇 갈래 흘러나왔다.
이어서 열 몇 명이 일제히 화산의 입구에서 날아 나왔다.
석목은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
가장 앞에서 날아오던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서 하얀 수염을 드리운 채 신경 강자의 기운을 풍기는 조주명이었다.
“주명 장로님.”
석목이 조주명을 불렀다.
조주명은 이미 법기를 꺼내 들고는 격전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다가 석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얼굴에 화색을 드러냈다.
“석 족장님.”
조주명이 허공에서 내려왔다.
조주명의 붉은 옷은 여기저기 찢어졌으며 풍기는 기운도 불안한 것이 큰 부상을 당한 것만 같았다.
조주명을 뒤따르던 열 몇 명은 전부 천봉족들이었는데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주명 장로님, 수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석목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휴, 전쟁으로 혼란스러울 때, 성녀가 실종됐죠. 저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요.”
조주명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석목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장로님, 일족의 부지에서 나올 때, 성녀님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 조령롱 장로님과 조현기와 함께 있었습니다.”
한 천봉족 청년이 걸어 나오며 말했다.
석목의 머릿속에 조현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어서 석목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조령롱이 종수의 옆에 있다고 하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