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791화 (791/916)

791화. 배신과 대물림

“석 족장님,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혹시 지원군이 왔나요?”

조주명이 물었다.

조주명의 뒤에 서 있던 천봉족들은 전부 기대하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우리 미천 연합은 주작성과 관련된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어요. 그리고 저는 여기에 수아를 찾으러 왔죠. 그리고 조윤 족장님에게 우리 미천 연합으로 들어오시라고 설득을 하려고 했는데 주작성이 이미 봉변을 당했더군요.”

석목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사람들이 전부 실망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조주명은 깊은 한숨만 내뱉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조주명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한 달 전에 족장님에게 갑자기 비밀스런 서신이 한 통 날아왔죠. 그리고 족장님이 천봉 일족의 모든 신경 강자들을 불러 모아 천봉족이 다시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기회요?”

석목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자세하게는 말씀해주지 않았어요. 심지어 우리는 서신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죠. 헌데 며칠 뒤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밖으로 나가셔야 한다며 금봉 장로님과 조주동을 비롯한 몇몇 신경 강자를 데리고 주작성을 떠나신 후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이틀 뒤에 천정의 전함 한 척이 갑자기 나타나 주작성을 공격했습니다.”

조주명이 말했다.

“그렇다면 천정이 주작성을 공격한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는 뜻인데 어째서 이렇게 빨리 수호 대진이 뚫려버렸습니까?”

석목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 주작성을 지키는 수호 대진과 족장의 신물은 연결이 되어있죠. 천정은 족장의 신물로 주작성의 대진을 뚫어버리고선 공격을 했어요.”

조주명이 깊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족장의 신물이요?”

석목은 어리둥절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족장의 신물마저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갔다면 족장인 조윤이 처한 상황은 아마 십중팔구 좋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다른 몇몇 신경 강자들이 처한 처지도 말할 게 없었다.

“천정의 대군은 무암성에 묶여있어요. 혹시 또 다른 대군을 꾸려 주작성에 침입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답답한 일이긴 하나 실은 천봉 일족을 공격한 천정의 군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어요. 하지만 놈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여덟 번째 선장인 화도였죠. 이놈은 도법을 쓰는 수준이 하늘에 이르렀는데 우리들은 족장과 신경 강자 몇 명마저 사라지고 없었으니 절대 놈들을 막아낼 수 없었죠…… 물론 위기 상황이라 성녀가 임시로 족장 자리를 맡아 우리를 데리고 반격에 나섰지만 우리 쪽은 실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천정이 봉익성을 돌파했고…… 봉명골마저 뚫려서 더는 반격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많은 강자들이 도망가고 흩어져버려 성녀와도 그때 헤어졌지요.”

조주명이 침통한 얼굴로 말했다.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셨는데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나요? 지룡 일족은 맹우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른 크고 작은 여러 종족들도 있지 않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실은 주작성이 뚫릴 때, 가장 먼저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했습니다. 헌데 연합이 예전 같지 않은데다가 군심마저 흩어져서 그런지 다들 반응이 없더군요. 모두가 침묵만 지켰죠.”

조주명이 깊은 숨을 내뱉었다.

“여긴 봉익성과 봉명골이랑 너무 가까이에 있어요. 이곳에 계신다면 위험할 겁니다.”

석목이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몸을 피하고 있었을 뿐이죠. 그동안 지룡 일족과 연락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답신이 없더군요.”

조주명이 말했다.

“여기서 지원병을 기다리기보다는 빨리 주작성을 떠나 무암성으로 가 있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거기엔 천하 성역의 세력들 대부분이 모여 있으니 안전한 편이지요. 장로께선 나중에 준비를 마친 후에 다시 주작성을 되찾으면 되겠지요.”

석목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석 족장님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조주명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주작성을 떠나겠다고? 후후. 내가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나?”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 장 밖 허공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붉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석목과 조주명이 다급하게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그 자는 붉은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오색 화관을 머리에 올리고 있는 게 이도저도 아닌 모습이라 매우 희한했다.

하지만 석목은 이 사람을 보자 마치 사냥꾼에게 들킨 먹잇감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동공이 확 줄어들었다.

왠지 이 사람은 남궁경이나 비로보다 훨씬 위험할 것 같았다.

석목의 머릿속에서 천정의 여덟 번째 선장인 ‘화도’라는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살길은 있다. 열반봉염(涅槃鳳焰)을 내놓으면 난 곧바로 여길 떠날 거야. 한데 그러지 않으면 오늘 천봉 일족은 천하 성역에서 영원히 사라지겠지.”

화도가 싸늘하게 말했다.

석목은 이미 마음이 차분해졌다.

조주명도 안색이 바뀌었으며 이를 악물고는 결연한 기색을 드러냈다.

근처에 있던 다른 천봉족들은 화도를 보자 전부 겁에 질려 조주명과 석목의 뒤로 날아왔다.

이때, 화도의 옆에서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두 사람이 더 나타났다.

석목은 안색이 다시 바뀌었는데 두 사람이 백홍과 백비였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석목을 보았지만 그리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석목은 그제야 모든 정황이 이해가 되었다.

“백비, 너와 백홍은 미천거원 일족을 배신하고 천정에 빌붙었구나.”

석목은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와 천천히 입을 열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네가 뭘 알겠어? 내가 이렇게 하는 건 다 우리 미천거원 일족을 위해서야! 천정은 실력이 막강해 언젠가는 모든 성역을 통치하게 될 텐데 네가 하는 짓은 무모했던 그 옛날 미천거원 일족과 다를 바가 없어. 넌 결국 미천거원 일족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거야! 천정에 투항하는 길만이 미천거원 일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

백비가 복잡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천 년 전에 치른 전쟁에서 천정이 우리 미천거원족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다 잊어버린 건가?”

석목의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백비는 입을 반쯤 벌리고는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다 몸을 파르르 떨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비는 예전에 벌어진 전쟁에 직접 참전했던 사람으로 수많은 미천거원족들이 천정에게 격살을 당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는 백비와 가까운 친인척들도 있었으며 그의 벗도 있었으니 이런 피맺힌 원한을 어떻게 쉽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이때, 화도의 싸늘한 시선이 백비에게 떨어졌다.

백비는 심장이 쿵 내려앉아서 말을 꺼냈다.

“예전에 벌어진 일은 잘잘못을 따질 수 없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우리 미천거원 일족이 계속 살아남는 길이야.”

석목이 싸늘하게 웃으며 화두를 돌렸다.

“천정이 이렇게 쉽게 주작성을 뚫을 수 있었던 건 네 공로인가? 조윤 족장님이 비밀 서신을 받고서 주작성을 떠났다고 하던데, 그 비밀 서신을 보낸 사람이 넌가?”

백비는 안색이 바뀌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뭐! 너라고!”

조주명은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렀다.

“아, 그런데 백비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가?”

화도가 석목을 바라보며 흥미진진하게 물었다.

“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알 수 있겠어. 서신에 조윤과 힘을 합쳐 석두를 미천거원 일족에서 내보내자는 한심한 말이나 지껄였겠지. 조윤 그 멍청이는 꿈에서도 연합의 맹주인 석두를 끌어내리고 싶어 했으니 바로 그러자고 했을 테고. 그리고 사람들을 데리고 백비와 만나러 나갔는데 닭대가리 같은 네놈들에게 매복 공격을 당했겠지. 이런 수작은 나도 다 알아 볼 수 있는데 석두라고 모를까?”

채아가 재잘거렸다.

화도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주 영리한 앵무새군.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부분 알아맞혔구나. 아주 마음에 들어.”

그 말을 듣자 채아가 의기양양해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조주명은 안색이 다시 바뀌었다.

이런 일이 다 있었다니.

조주명은 석목을 바라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백비, 너는 미천거원 일족을 배신하고 조윤 족장과 금봉 장로를 기만했다. 천하 백족과 철저히 척을 진 네 행동은 아주 깊은 죄니 나는 미천거원 일족의 족장으로서 오늘 널 죽이고 그릇된 걸 바로잡아야겠구나.”

석목이 백비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백비가 무엇 때문에 천정에 빌붙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석목은 미천거원 일족의 족장으로서, 그리고 미천 연합의 맹주로서 오늘 백비를 절대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석목에게서 붉은빛이 번지더니 방대한 기운이 천천히 커져갔다.

백비는 마치 굶주린 맹수에게 걸린 듯이 두려움이 몰려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석목은 등 뒤로 흑백 날개를 펼쳐 곧바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어서 석목은 백비의 등 뒤에 나타났다.

이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석목은 육신의 원만 경지에 도달해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석목이 세 사람의 등 뒤에 나타나 주먹을 휘두르자 붉은 화염이 주먹에 감기더니 무수히 많은 부문들이 번쩍였다.

훅!

화염이 펼쳐지며 순식간에 크기가 몇 장에 이르는 붉은 영역으로 변하여 백비를 비롯한 세 명에게 드리웠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백비는 물론이고 화도마저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붉은 영역에 갇혔다.

세 사람은 전부 영역의 힘에 압도당하여 몸이 굳어버렸다.

석목이 눈에 희색을 드러내며 주먹을 휘둘러 백비를 내리쳤다. 그러자 막강한 위압감이 석목의 주먹에서 흘러나왔다.

펑!

굉음이 울렸다.

석목의 주먹이 계란 모양인 하얀 광막에 떨어지자 그는 안색이 바뀌었다. 그리고 광막에 무수히 많은 부문이 나타나더니 거북이 등껍질 같은 문양을 그리며 갈라졌다.

하얀 광막은 매우 얇았지만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주먹이 부딪친 곳에서 옅은 물결이 일렁이며 가볍게 흔들렸지만 광막은 부서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백비는 하얀 광막 안에 서서 아무런 상처조차 입지 않았다.

하얀색 광막 옆에서 화도가 돌아선 후에 손가락으로 허공을 짚었다. 이 빛나는 계란 모양 구체는 화도가 만들어낸 것이라 일촉즉발인 순간에 백비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윙!

화도가 팔을 휘두르자 그의 몸에서 무수히 많은 금색 불빛이 활활 타올랐다.

이어서 화도를 중심으로 금색 화염 영역이 나타나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윽고 석목의 붉은 영역은 격하게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부서져 버렸다.

석목은 몸통이 뒤로 튕겨져 날아가 수십 장 밖에서야 나타났다.

화도가 만든 금색 화염 영역은 점점 커졌는데 크기가 족히 서른 장은 되는 것 같아 남궁경이 만들었던 영역보다 두 배는 더 컸다.

영역에서는 무수히 많은 짐승 그림자들이 춤을 췄는데 화염 기린, 화염 구렁이, 화염 교룡으로 이뤄진 뚜렷한 짐승 그림자들은 마치 실재하는 것만 같았다.

석목은 상대가 만든 영역이 자신의 영역보다 온전해 얼굴이 굳어버렸다. 화도가 만든 온전한 영역이었으니 가볍게 석목의 영역을 부숴버릴 수 있었다.

“수령자, 저 빛나는 하얀 구체는 무슨 신통이야?”

석목이 물었다.

“선계의 호신 비술인 구천현강조(九天玄罡罩)지. 그 어떤 수단으로도 뚫어버릴 수 없다고 해. 그런데 저놈이 이런 신통을 부릴 수 있다니! 꼭 조심해야겠군. 상대가 아주 막강해! 너, 절대 죽으면 안 돼!”

수령자의 목소리가 석목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선계 비술!”

석목은 깜짝 놀랐다.

화도 일행이 나타난 후에 석목은 조심스럽게 수령자가 있는 현명신주를 꺼냈다.

수령자는 견문이 넓으니 꼭 석목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물론 석목도 방어 수단을 몇 가지 준비해 혹시 수령자가 배신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대비했다.

화도가 어려운 주문을 외우며 다시 손가락을 허공에 짚었다. 그러자 백비를 감싸고 있던 빛나는 하얀 구체가 계란 크기로 변하더니 화도의 옆에서 떠다녔다.

“화도 선장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비가 감격스럽게 화도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겁을 잔뜩 먹은 표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