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화. 늦게 오다
“일족에 큰 재난이 닥쳐 만 년 동안 쌓은 업적이 하루 만에 사라진데다가 종족 사람들마저 사상자가 많으니 저도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종족 사람들을 불러 모아 성녀와 조령롱 장로를 만난 후에 함께 논의를 해봐야겠어요.”
조주명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저도 수아를 찾으러 왔으니, 장로님과 함께 천봉족들을 찾겠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석 맹주님, 감사합니다.”
조주명이 말했다.
“아녜요. 우리는 인원이 너무 적으니, 대규모로 수색을 하는 게 불가능하겠군요. 미천 연합에 연락하여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석목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좋군요. 주작성을 지키는 천봉 일족의 수호 대진은 아직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으니 주작성에 살아있는 천봉족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주명이 말했다.
그리고 손에 붉은빛을 반짝이며 손바닥만 한 낡은 나침반을 하나 꺼냈다.
조주명은 한 손으로 나침반을 들고서 다른 한 손으로 법결을 짚으며 주문을 외웠다.
“기(啟).”
조주명이 가볍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붉은 나침반의 바늘이 빠르게 팔괘 위를 한 바퀴 돌아간 후에 붉은색을 밝히며 커다란 화염 봉황 환영으로 변하여 하늘로 날아갔다.
석목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화염 봉황 환영이 구름 속으로 들어간 지 한참 후에 하늘 깊은 곳에서 붉은빛이 드넓게 퍼지면서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드리웠다.
붉은빛은 잠깐 사이에 다시 사라져버렸다.
조주명을 바라보니 그는 안색이 다시 어두워졌는데 몸이 많이 허약해져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큰 부상을 회복하기도 전에 또 영력을 많이 소진했기 때문일 터였다.
“주명 장로님, 상처가 아직 회복 된 것 같지 않군요. 제가 어느 정도 회복하게 도와드렸지만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우선 봉익성으로 돌아가 휴식을 조금 취한 후에 다시 움직이죠.”
석목이 말했다.
조주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 일행은 봉익성으로 날아갔다.
* * *
사령계면.
하늘 깊숙한 곳에는 피로 젖은 달이 외롭게 뜬 채 검붉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땅 위에 자리한 한 없이 넓고 깊은 골짜기에 붉은 달빛이 쏟아지며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골짜기 안에는 도처에 거대한 시체와 백골이 뒤섞여 있었고, 골짜기의 이쪽 끝에서부터 저쪽 끝까지 쭉 시체들이 널려있었다.
바닥에는 부서진 백골과 썩은 시체의 점액이 서로 뒤범벅이 되어 무더기로 쌓여 흘러내렸다.
챙!
검은 칼날이 썩은 시체 더미에서 불쑥 튀어나와 한쪽으로 비켜갔고, 온몸이 시커먼 해골 무사가 시체 더미 속에서 기어올라왔다. 큰 부상을 당한 무사는 찢어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골짜기의 다른 쪽 입구에선 영롱한 채색 빛을 반짝이는 반투명한 해골이 시체 더미 속을 헤집고 나왔다. 그 해골은 손에 투명한 골도를 쥐고 있었고, 반쯤 몸을 기대고는 골짜기 위를 올려다보았다.
골짜기 위의 한쪽 절벽에는 칠색 나무 한 그루가 비스듬히 서 있었고, 나무에서 빛이 반짝이는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연나가 칠색 나무에 비스듬히 기댔다.
연나는 은색 갑옷을 입고 있었고, 영롱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또한 검은 머리카락은 폭포처럼 허리까지 드리웠고, 붉은 달빛 속에서 특별한 빛을 뿜어냈는데 그 모습은 요염해보기도 했으며 또한 눈부시게 아름답게도 보였다.
하지만 연나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이마에 그려진 검은 연꽃 문양은 예전보다 훨씬 옅어졌다.
복부에는 넓게 긁힌 상처가 찢어져 있었는데 어떤 무기에 상처를 입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상처에서는 푸른 액체가 흘러나왔고, 주변에 검은색 안개를 감고 있는 모습이 매우 기이해 보였다.
연나가 법결을 짚자 칠색 나무에서 덩굴이 자라나 연나의 복부에 난 상처를 뒤덮었다.
칙, 칙!
덩굴이 닿는 순간, 타오르는 듯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덩굴은 뒤로 몇 뼘 물러났다가 다시 상처로 뻗어갔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을 하자 얇은 덩굴 수십 갈래는 말라버렸고, 나머지 덩굴만 끊임없이 뻗어 나와 상처를 완벽하게 뒤덮었다.
치칙!
하얀 연기가 연나의 얼굴을 희미하게 덮자 그녀는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에 하얀 연기가 흩어진 후에 연나는 골짜기를 훑어보았다.
골짜기의 깊은 곳엔 거대한 시체 세 구가 놓여 있었는데 바로 한 시진 전에 신경 등급이던 사령 생물 세 구가 이미 완전히 기운을 거둔 흔적이었다.
연나의 시선이 여우 얼굴을 한 강시에 닿는 순간, 연나는 혐오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격전을 치르며 드디어 이 혐오스러운 것들을 전부 해치웠다.
산골짜기 속에 크게 다친 무야와 반쯤 죽어있는 비령을 빼면 수십만 구나 되던 사령 대군 중에 고작 천 여 구만이 남았다.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골짜기를 스쳐 지나가자 연나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면서 그녀의 볼을 가려버렸다. 하지만 연나의 얼굴에 드러난 피곤한 기색은 가려지지 않았다.
무야가 고개를 들어 눈에 혼화를 튀겼다. 그리고 연나를 스쳐지나 하늘에 뜬 커다란 핏빛 둥근달을 바라보았다.
골짜기 속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 * *
며칠 뒤, 봉익성.
천봉 일족이 자리를 잡은 내성은 폐허가 되어버려 도처에 무너질 듯한 벽과 부서진 돌들만 쌓여있었다.
하지만 며칠 전과 달리, 폐허 속에 묻혀있던 천봉족의 시신들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비교적 온전한 붉은 대전 앞에 천봉족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났지만 천봉족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재난을 당한 비참한 기색이 어렸으며 아직 전쟁에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 같았다.
대전 안에는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왼쪽에는 조주명을 비롯한 천봉족들이 앉아있었고, 석목은 혼자 오른쪽에 앉아있었다.
대전은 분위기가 몹시 무거웠고, 말 많던 채아마저 조용히 석목의 어깨에 엎드려있었다.
“주명 장로님, 천봉 일족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사상자와 실종자가 절반이 넘어요.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최근 며칠 동안 잇달아 봉익성으로 돌아오고 있죠. 천봉 일족은 이번 일로 원기가 크게 상하여 아마 수백 년 내에는 예전처럼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조주명이 슬픈 얼굴로 말했다.
“수아의 소식은 있었나요?”
석목이 물었다.
“조회(趙悔)말고는 아무도 성녀를 본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조주명이 깊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석목은 그 말이 놀랍지 않았는데 최근 석목은 채아를 데리고 주작성 곳곳을 훑으면서 천봉족들을 꽤 많이 찾아냈지만 종수의 흔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석 맹주님, 걱정 마십시요. 성녀는 조령롱 장로와 함께 있으니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아마 주작성을 떠나 무암성으로 향했을지도 모를 일이죠.”
조주명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주명 장로님, 제 사사로운 뜻이 아니라, 천봉 일족은 지금 정황상 주작성을 지킬 수 없어요. 만약 천정이 다시 공격을 한다면 그땐 아마 파멸에 가까운 재난을 겪겠죠.”
“석 맹주님이 품으신 뜻은 잘 압니다. 며칠 동안 저도 우리 종족의 장로들과 상의를 했는데 미천 연합으로 들어가는 편이 우리에게는 가장 확실한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렸죠. 우리 모두가 원하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조주명이 말을 하다가 망설이며 멈췄다.
“염려하시는 부분이 더 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화도 이놈이 우리 종족의 족장을 죽여 버렸다고 말하긴 했으나, 우리가 직접 본 건 아닙니다. 나중에 만약 족장이 다시 돌아온다면 미천 연합에 들어갈지 족장님께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족장님이 불행하게도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 결정은 성녀가 직접 내려야겠죠.”
조주명이 말했다.
“주명 장로님의 충심은 진심으로 존경스럽군요. 장로님께서 하신 말대로 따르지요.”
석목이 말했다.
“석 맹주님, 넓은 아량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주명이 다급하게 손을 굽히며 인사를 했다.
이때, 천봉족 한 명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장로님, 석 맹주님. 지룡 일족의 족장인 적안이 대군을 끌고 왔습니다.”
천봉족이 공손하게 보고를 했다.
“하, 이제야 온다고?”
채아가 비웃으며 말했다.
천봉족 장로들은 안색이 굳어버렸다.
석목은 채아를 한번 째려보았다.
그러자 채아는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몸을 움츠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천봉 일족에게는 너무 과분한 맹우라 제대로 된 접대를 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전해라.”
조주명이 미간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네.”
천봉족이 답을 하며 물러나려했다.
“잠시, 주명 장로님. 들어오라고 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봅시다.”
석목이 조주명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들어나 봅시다.”
조주명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 * *
잠시 후에 적안이 미안한 얼굴로 지룡 일족의 장로 몇 명을 데리고 걸어 들어왔다.
“적 족장님. 정말 빨리도 오셨군요. 우리 종족이 보름 동안 간절히 지원을 요청했는데 오지 않았죠. 그런데 석 맹주님이 천정 놈들을 죽여 버리니 이렇게 나타나셨군요.”
조주명은 적안을 보자 일어서지도 않고는 차갑게 말했다.
몇몇 천봉 일족의 장로들도 화가 난 얼굴로 적안을 바라보았다.
조주명 뿐만 아니라 천봉 일족 전체는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에 맹우인 지룡 일족이 끝까지 도와주지 않은 것을 두고 분노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주명 장로님, 우리 지룡 일족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천봉 일족에게 지원 요청 소식을 받은 후, 곧바로 신경 강자들을 전송진법을 통해 주작성에 보내려 했으나, 주작성의 진법이 이미 폐쇄된 후였죠. 그래서 저는 주작성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걸 알아차리고 곧바로 전함을 보내서 지원을 하러 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별바다에 들어선 순간, 천정의 대군이 기습을 하여 우리도 처참하게 당했습니다.”
적안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적안의 뒤에 서 있는 지룡족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장로들은 겉보기에는 멀쩡한 듯했으나 그 기운이 매우 불안했으며 진기도 많이 소모한 모양이었다. 아마도 불과 얼마 전까지 격전을 치른 탓에 모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일 터였다.
“화도가 만약 두 부대로 나눠서 싸웠다면 지룡 일족을 공격할 인원수가 그리 많지 않았을 테죠. 게다가 화도 본인은 주작성에 있었는데 어째서 지룡 일족은 이렇게 큰 손실을 입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종족의 장로들 중에 배신자가 두 명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지원을 하러 오던 대군이 큰 손실을 입게 되었죠.”
적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적 족장님께서 하신 말씀이 핑계가 아니기를 바라죠.”
조주명은 적안이 하는 말이 믿기지 않는지 비웃는 투로 말했다.
“조주명, 우리 지룡 일족이 빨리 오지 못해 천봉 일족이 큰 손실을 본 건 인정하나 우리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우리 지룡 일족의 전함을 한번 보시죠. 온전한 전함이 한 척도 없으니.”
적안이 화를 냈다.
“두 분,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어떻게 천정과 싸울지 생각해봅시다.”
석목이 말했다.
조주명과 적안은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제가 계속 미천 연합에 들어오시라고 설득을 하는 이유는 함께 천정을 공격하기 위해서죠. 우리 천하 성역은 천정과 비교했을 때, 힘이 너무 약합니다. 그러니 주명 장로님은 천봉 일족을 이끌고 미천 연합에 들어오시기로 결정했습니다. 적 족장님도 한번 생각해보시죠.”
석목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적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석목은 적안을 재촉하지 않았다.
“석 맹주님, 우리 지룡 일족도 미천 연합에 들어가 천하 백족과 함께 천정과 싸우겠습니다.”
잠시 후에 적안이 벌떡 일어서서는 석목에게 손을 굽히며 정중하게 말했다.
“좋아요. 적 족장님께서 그런 의지를 보이신다면 다시 천정에게 반격을 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죠.”
석목이 좋아하며 말했다.
천봉 일족과 지룡 일족까지 미천 연합에 들어오면 와요 일족을 제외한 팔황고족이 전부 모이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