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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807화 (807/916)

807화. 죽여서는 안 된다

격전은 족히 일고여덟 시진이나 이어졌고, 그제야 별하늘에서 들리던 폭발음이 점점 줄어들었다.

천하 성역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전이 드디어 끝을 보이는 것이었다.

별하늘 곳곳에서 거대한 전함의 잔해들과 무수히 많은 시체들이 떠다녔다.

간신히 도망간 천정의 전함 몇 척을 빼면 천정의 대군은 전부 이곳에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수많은 잔해가 떠다니는 구역 위에 가냘픈 몸집 하나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하얀 얼굴과 미모가 돋보였고, 아리따운 몸매에는 금색 갑옷을 두르고 있었으나 입은 갑옷은 곳곳이 찢어져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도인지 검인지 모를 괴상한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빛이 번쩍거렸다.

그 가냘픈 자는 서문설이었다.

서문설은 입가에 피가 묻어있었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매우 차분해 보였다.

서문설은 몸에 푸른색과 노란색 금 속성 쇠사슬을 칭칭 감고 있었다.

육규종과 안화를 비롯한 신경 강자들이 쇠사슬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

“이 여인은 다른 천정의 신장들과 달리 실력이 막강하더군요. 여러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죽이죠.”

안화가 싸늘한 눈으로 서문설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장로는 이미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서문설과 격전을 치르며 큰 부상을 당하여 안색이 좋지 않았던 대장로는 안화가 하는 말을 듣고서 한참 동안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이제 움직이죠.”

육규종이 낮게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들은 서문설은 심각한 눈빛으로 손에 든 무기를 더욱 꽉 잡았다.

“잠깐만요.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이때, 다급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석목이 빠르게 날아왔다.

연나는 어디로 갔는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석목이 날아오는 모습을 본 서문설은 눈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손에 빛을 번쩍이며 무기를 다시 거두어들였다.

“석 맹주님, 무엇 때문입니까?”

안화가 물었다.

“물어봐야할 일이 있습니다.”

석목이 답했다.

무엇 때문인지 석목은 자신과 서문설의 관계를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서문설이 석목에게 무암성과 관련된 일을 알려줬다는 사실도 알리지 않았다.

“석 맹주님의 명령이니 우선 살려두죠.”

육규종이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대장로가 갑자기 석목에게 물었다.

“석 맹주님, 조금 전에 함께 싸운 신경 도우님은 누구십니까?”

대장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연나의 신분을 궁금하게 여겼다.

“연나라고 합니다. 제…… 음…… 벗이죠.”

석목이 멈칫하다가 말했다.

“그렇군요. 어쩐지 실력이 막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장로는 석목이 더 깊게 말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자 자세히 물어보지 않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채색 그림자가 별하늘에서 날아오며 석목의 어깨로 내려왔다.

“석두, 도망가는 대군을 쫓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제대로 보상해줘야 해.”

채아가 가쁜 숨을 내쉬는 척을 하며 말했다.

“그래, 그래, 먹보야.”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음, 이……”

채아가 한참 동안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들어 묶여있는 서문설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무엇인가 생각났는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

육규종이 눈썹을 치켜 뜨며 물었다.

“이제야 끝났다고. 왜 아직 안돌아가? 석두, 너 많이 다쳤구나.”

채아가 곧바로 말을 돌렸다.

석목은 많이 다치긴 했는데 비로와 교전을 치르며 심신이 지쳐있을 때, 갑자기 제준이 나타나 공격을 해서 몸속에 흐르는 기운과 혈맥이 말이 아니었다.

“혈맥과 내장도 다쳤군요.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회복해야겠어요.”

대장로가 석목을 훑어보다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서문설은 눈썹을 치켜 뜨며 석목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이 정도는…… 음……”

석목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석 맹주님, 어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시죠.”

안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옳습니다. 전황이 이미 안정되었으니 나머지 일은 우리에게 맡기세요.”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여인은 우선 가둬두고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회복이 끝나는 대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네.”

그러자 사람들은 석목과 이 여인이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는 의문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들 아무것도 묻지는 않았다.

석목은 서문설과 한참 동안 눈을 마주치더니 채아를 데리고 무암성으로 날아갔다.

* * *

이틀 뒤, 무암성.

반귀족 안쪽 골짜기에는 한적한 동굴이 하나 있었다.

동부 안에 숨은 비밀 석실 속에는 영롱한 푸른빛이 가득 차 있었고, 규칙적으로 번쩍이면서 동부 내벽을 비취처럼 비추었다.

푸른 빛 한가운데서 석목이 두 눈을 꼭 감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석목의 앞에는 푸르스름한 가마 허상이 하나 떠 있었는데 빙글빙글 돌면서 푸른빛을 뿜어냈다.

연이은 격전 끝에 미천 연합이 대승을 거뒀지만 석목은 몸과 마음이 적잖게 다쳐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한 회복을 할 수 있었다.

잠시 후에 석목이 눈썹을 파르르 떨자 푸른빛과 작은 가마 허상이 전부 사라져버렸다.

“할 말이 있으면 들어와서 해.”

석목이 두 눈을 뜨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어서 돌문이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요염하게 생긴 여인 한 명이 들어왔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금소채였다.

“석목, 설아가 며칠째 갇혀있어. 너, 어떻게 할 작정이야?”

금소채가 비밀 석실로 들어오면서 물었다.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까?”

석목이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설아는 늘 너에게만 관대했어. 당연히 풀어줘야지.”

금소채가 말했다.

“그녀를 만나게 해줘.”

석목이 금소채가 제안을 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금소채는 계속해서 물어보려했으나 석목은 이미 일어서더니 비밀 석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석목과 금소채는 비밀 석실에서 나가 산골짜기로 날아갔다.

그리고 가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서쪽으로 향했다.

시간이 일주향 정도 흐른 뒤, 두 사람은 낮은 산에 자리한 정원으로 내려왔다.

정원엔 옅은 금색 금제 광막이 드리워져 있었고, 일고여덟 묘 정도 되는 크기에 주변이 나무들로 둘러싸인 조용한 곳이었다.

두 사람은 문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문의 좌우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서 있었고 나무 밑에는 돌로 만든 둥근 의자가 두 개 놓여있었다.

둥근 의자에는 고풍스러운 부문들이 새겨져있었는데 파인 자리마다 먼지가 가득 쌓여있어 매우 평범해보였다.

이 금제 진법은 반귀 일족이 설치한 진법이라 절대 평범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석목에게는 그다지 대단한 진법이 아니었다.

석목은 손가락에 빛을 반짝이며 허공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자 몇 줄기 빛이 은행나무 아래에 놓인 둥근 의자 위로 날아갔다.

찌익!

둥근 의자 하나가 오른쪽으로 몇 척 움직였다.

이어서 대진에 구멍이 하나 벌어졌다.

“가자.”

석목이 말하며 걸음을 옮겨서 들어갔다.

그러자 금소채도 얼른 정원으로 따라 들어갔다.

두 사람은 정원과 대청을 지나 안방의 문 앞에 이르렀다.

“똑, 똑.”

석목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금소채는 석목의 뒤에서 잠깐 망설이더니 따라서 들어가지 않고는 밖에서 방문을 닫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방에 들어와 보니 서문설이 둥근 탁자 옆에 앉아 낡은 서책 하나를 읽고 있었다.

서문설의 몸에는 쇠사슬 같은 금제가 없었다. 하지만 서문설의 영해 속에는 아주 강력한 금제가 걸려있어 그녀가 영력을 전혀 쓰지 못하게 봉인해둔 상태였다.

이런 금제는 미천거원 일족만이 쓰는 것이기에 석목은 곧바로 그 금제를 알아보았다.

다시 말해 이 금제는 그날 대장로가 직접 걸어둔 주박이었다.

“설 사저.”

석목이 침묵을 지키다가 가볍게 서문설을 불렀다.

“생각지도 못하게 네 포로가 되어버렸어.”

서문설이 서책을 내려놓고는 석목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알잖아. 널 가두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거.”

석목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적이 되었지.”

서문설이 웃으며 말했다.

서문설의 아름다운 미소에는 분명 적막이 감돌았다.

“천정을 선택했는데 어째서 내게 무암성과 관련된 일을 알려준 거지?”

석목이 깊은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서문설은 석목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더니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석목은 서문설을 재촉하지 않고서 마찬가지로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방 안을 메운 공기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으나 서문설의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온 서문설은 자조하듯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는데 그 미소가 아름다웠다.

하지만 서문설은 석목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별다른 설명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너를 이곳에서 내보내줄 수도 있어. 하지만 네 진정한 목적이 뭔지 나에게 알려줘야 해.”

석목이 계속해서 말했다.

서문설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마치 석목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한 것만 같았다.

“천정은 영석을 어마어마하게 갈취하고 있어. 그 목적이 대체 뭐야?”

석목이 계속해서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서문설은 다시 서책을 들고는 석목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제준은 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는 거지?”

* * *

석목은 단숨에 여러 물음을 던졌지만 서문설은 담담한 표정만 짓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 사저,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사저가 추구하는 바는 대체 뭐야?”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물음에 서문설은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너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서문설이 하는 말을 듣자 석목은 눈빛이 복잡해졌다.

한참 뒤에 석목은 깊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무암성에 관한 일은 사저가 내게 말해주었지. 그 말을 내게 전해주지 않았더라면 무암성은 이미 뚫려버렸을 테니 미천 연합도 오늘 같은 국면을 맞이하지 못했을 거야. 공적으로 보자면 사저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지 않은데다가 오히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었지…… 그리고 사사롭게 말하자면 나는 사저를 난감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석목이 복잡한 법결을 짚으며 서문설을 가리켰다.

윙!

가벼운 파동이 일었다.

서문설이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어서 서문설의 몸에서 화려한 빛이 흐르더니 금색 무늬가 복부에서 세 번 번쩍이고는 천천히 사라져버렸다.

금색 무늬가 사라지자 금제되었던 영력이 다시 회복된 서문설은 안색이 돌아왔다.

“정말 날 내보내줄 건가?”

서문설이 깊은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하지만 표정에는 의외라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금제는 풀었으니 갈지, 남을지는 알아서 결정해.”

석목이 그리 말을 하며 뒤돌아 밖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는 문을 마주보며 말했다.

“북무성 부곡에 자리한 전송 진법을 지키는 장로님이 오늘 안 계셔. 자시에 교대를 하겠지. 그 사이에 시간이 일주향 정도 있어. 수련 경지가 사저 정도 된다면 들키지 않을 거야.”

말을 마친 석목은 문을 밀었다.

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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