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0화. 배신
석목이 곧바로 날아들자 잠시 후에 눈앞이 밝아지더니 청란 유적지가 나타났다.
석목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고, 연나와 하얀 옷을 입은 선장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이전보다 더욱 훼손이 되어있는 것이 아마 연나와 선장이 전투를 펼치면서 그리 만든 것 같았다.
연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석목은 다급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는 심신으로 연나를 연결했다.
예상 밖으로 연나는 곧바로 석목에게 대답을 했고, 이미 사령계면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석목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연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았는지, 혹시 도움이 필요하진 않는지 물었다.
연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석목의 앞쪽 허공이 일렁거리더니 공간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석목은 망설이지 않고는 몸을 날려 공간 통로 속으로 날아갔다……
* * *
사령계면에 뜬 반달은 날카로운 칼처럼 하늘에 걸린 채 붉은빛을 뿜어냈다.
석목은 주변이 빙글빙글 돌다가 다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뚜렷하게 보일 때쯤 적갈색 산봉우리에 도착했다.
석목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연나는 은색 갑옷을 차려입고 산봉우리 위에 놓인 한 바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연나는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살짝 들어 하늘에 걸린 핏빛 달을 바라보았다.
연나의 검은 머리카락은 폭포처럼 허리까지 드리워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그렇게 갑옷을 입고 있는 연나에게선 온화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연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석목은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때, 연나가 검은 머리카락을 흔들면서 고개를 휙 돌렸다.
“음? 구전현공이 이미 대성에 이르렀어?”
연나가 눈을 반짝이며 놀란 듯이 물었다.
연나가 말을 하자 석목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래.”
그 말을 들은 연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불사신도 됐어.”
석목은 멈칫하다가 연나에게 말했다.
연나는 입가에 드디어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연나는 다시 정색을 했다.
“구전현공이 대성을 이루었지만 절대 방심하면 안 돼. 백공 장군이 이룬 수련 경지는 너보다 뛰어났지만 결국 제준의 손에 죽었어.”
“괜찮아, 그놈이 날 찾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먼저 찾아갈 테니.”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연나의 두 손이 텅텅 비어있는 걸 보았는데 추선대를 이용해 석목을 사령계면으로 끌고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연나는 석목을 위해 추선대로 사령계면의 음기를 차단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석목이 갖춘 실력이라면 추선대가 지켜주지 않아도 음의 기운이 몸으로 침습하는 걸 막아낼 수 있었다.
석목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비령과 무야도 연나의 곁에 없었다.
“연나,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기억나지? 지난번 내가 떠난 후로 한동안 네게 연락을 하지 않았잖아.”
연나는 석목이 묻는 말에 답하지 않고는 다시 되물었다.
“그때 너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어. 그리고 나중에는 이미 처리했다고 했지…… 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석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우리는 제준과 정면으로 맞설 날이 그리 멀지 않았어. 지난번에 무암성에서 전쟁을 치를 때, 나는 여기서 모은 수십 만 사령 대군을 이끌고 너를 도우려고 했어. 하지만 명역에 이변이 일어났지. 땅 속에서 잠을 자고 있던 몇몇 신경 사령들이 갑자기 나타나 나의 대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어.”
연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경 사령이라면 네 상대가 될 수 없잖아.”
석목이 말했다.
“명역에는 명역만의 규칙이 있어. 이 신경 사령 생물들이 출몰한 건 절대 우연이 아니야. 어떤 일이 발단이 되었겠지. 만약 내가 사령들이 출몰하는 연유를 밝히지도 못하고 그것들을 죽여 버린다면, 사령계면은 더는 날 포용하지 않을 거야.”
연나가 말했다.
“그럼 그 이유를 알고 있어?”
석목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무야였어.”
연나가 갑자기 돌아서서 말했다.
“뭐?”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석목이 기억하기로 무야는 연나가 친히 만들어낸 존재였다. 그런데 어째서 연나를 배신했을까?
게다가 무야의 영혼은 연나에게 속박되어 통제를 받을 터였다.
“무야는 계속 수련 경지를 숨기고 있었어. 이미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경까지 수련을 했기에 무야의 영혼은 언제든지 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 하지만 무야는 나의 믿음을 이용해서 계속 내 곁에 잠복해 있었던 거야. 신경 사령들은 무야가 일부러 불러낸 것들이고.”
연나가 말했다.
“그런 일이 다 있었다니! 그럼 이번에 나를 사령계면으로 부른 것도 무야와 관련이 있는 거야?”
석목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이번에 사령계면을 떠나면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추선대를 무야와 비령에게 잠시 맡겨뒀었어. 그런데 무야는 비령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후에 추선대로 사령 대군들을 빼앗아 갔어.”
연나는 차분한 투로 말했지만 석목은 너무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말해 봐.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석목은 깊은 숨을 내뱉으며 계속해서 물었다.
“무야가 데려간 사령 대군을 막아야 해. 내가 직접 그 배신자를 죽여 버릴 거야.”
연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야는 지금 어디에 있어?”
석목이 물었다.
“명연(冥淵).”
연나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는 북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 * *
사령계면, 갈색 봉우리가 북쪽으로 천 여리나 이어지는 가운데 끄트머리엔 하얀 빙원이 있었다. 그리고 가뜩이나 황량하고 메마른 땅 위에 놓인 시체들은 세월이 흐름에도 녹지 않고 엷고 검은 동토를 이루었다.
빙원은 평평했고 그 위로 엷은 흰색 한초와 같은 것들이 층층이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뒤덮인 것들은 한초가 아니라 겹겹이 쌓인 하얀색의 뼛조각이라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하얀색 뼛조각들 말고도 빙원에는 수백 장 간격으로 커다란 뼈대가 하나씩 보였고, 그 위에도 역시 서리가 짙게 서려 있었다.
뼈들 위에는 때때로 점으로 흩날리는 푸른 도깨비불이 번쩍거렸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얼음으로 봉인된 황무지는 반짝이는 별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고, 간간이 푸른 불빛이 여기저기서 반짝이는 모습이 다소 어둡고 기괴한 분위기를 더했다.
이 밖에 황야에선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마치 흑백 수묵화처럼 조용했다. 그렇게 아무런 아름다움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숨 막히는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빙판의 상공에는 음기가 축적되어 수천 리에 걸쳐 넓게 뻗은 무거운 납빛 구름이 하늘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리고 핏빛 반달은 구름에 묻혀 보일 듯 말 듯했다.
휘이익!
훅!
음산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었는데 마치 귀신의 곡소리처럼 빙판에서 한참 동안 울려 퍼졌다.
명연은 하얀 빙판의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여긴 극도로 깊고 좁은 지하 골짜기였는데 마치 하늘을 가를 듯한 커다란 도끼가 떨어져 빙판으로 둘러싸인 황야를 쭉 갈라놓은 것처럼 그윽하고 깊었다. 또한 골짜기 주변에는 회색 안개가 자욱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때, 회색 안개 가장자리에서 두 줄기 눈부신 빛이 먼 하늘에서부터 빠르게 날아와 회색 안개에 가까워졌을 때, 다시 빠르게 내려왔다.
석목과 연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쩍!
석목이 하얀 뼈를 밟자 뼈가 부서져 버렸다.
고요한 빙판에서 작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회색 안개 속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두 덩이 푸르스름한 불꽃이 밝아졌다.
이어서 불빛이 마치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이 안개 속 여기저기서 번쩍이자 다른 불꽃들이 줄줄이 밝아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안개 속은 수많은 불꽃들로 번쩍였다.
불꽃 중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으며,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었다. 그리고 큰 건 크기가 수십 장이나 되었지만 작은 건 몇 뼘도 채 되지 않았다. 또한 높이 걸려있는 것은 천 장 높이에 있었고, 낮은 것은 땅과 아홉 척 정도 떨어져 있었다.
석목은 동공이 살짝 줄어들었으나 의외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것은 전부 사령 생물들의 혼화였는데 얼핏 보기만 해도 수십 만 덩이는 되는 것 같았다.
드넓게 펼쳐진 혼화가 밝아지며 빛이 뿜어져 나왔지만 주변 온도는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음산해졌다.
석목은 안개 속에서 거대한 혼화 둘을 바라보며 오른쪽 주먹을 번쩍 들어 올렸다.
석목의 주먹 끝에서 금빛이 번쩍이며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되었다. 그렇게 간간이 흘러나오는 뜨거운 열기는 뼛조각 위에 내려앉은 서리를 녹여버렸다.
석목은 두 눈에 금빛을 반짝이며 순식간에 앞으로 날아가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에서 화염이 활활 타오르자 백 장 가까이 되는 화염 주먹 그림자가 앞으로 날아가 곧장 안개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쾅!
화염 주먹 그림자는 안개를 가르며 굉음을 퍼뜨렸다. 그렇게 찬란한 불꽃이 자욱한 안개를 두 갈래로 갈라버리자 주먹이 스친 곳에는 길이가 천 장이나 되는 커다란 골짜기가 나타났다.
골짜기 위로 숫자가 수천, 수만이나 되는 하얀 해골과 강시, 문드러진 짐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염 주먹 그림자 밑으로도 사령 생물들이 가득했는데,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뜨거운 화염 기운에 타버려 가루가 되어 흩날리면서 땅에 백 장 가까이 되는 그을음 자국을 남겨 놓았다.
천 장 범위 안에 있던 수많은 사령 생물들이 물러나면서 화염 주먹 그림자가 안개의 깊은 곳을 내리쳤다.
불빛이 끊임없이 뻗어가자 깊숙한 곳에 있던 두 덩이 혼화의 본체도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색과 갈색 몸통의 복부에는 비늘 갑옷이 덮여있었고, 사람의 몸에 소 머리가 달린 거대한 귀왕이었다. 그리고 귀왕의 머리에는 백 장 가까이 되는 하얀 뿔이 두 개 자라나 있었는데 뿔은 마치 칼날처럼 하늘을 찔렀다.
귀왕은 화염 주먹이 날아오는 광경을 보자 포효하며 두 손으로 커다란 뼈도끼를 들고 앞에 나섰다.
두 도끼가 교차하면서 화염 주먹 그림자를 내리쳤다.
쾅!
굉음이 울려 퍼졌고, 화염 주먹 그림자가 떨어진 자리가 폭발하더니 불길이 번졌다.
이어서 굵직한 화염 기둥이 마치 교룡처럼 하늘로 날아올라 하늘에 뜬 먹구름과 부딪쳤다.
쾅!
명연의 상공에 뜬 먹구름에서 불꽃이 튀자 먹구름이 들끓으면서 기운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해골 병사 천여 구는 그 여파로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쳐 둥그런 기운 벽을 이루며 사방팔방으로 밀려갔다. 그러자 체격이 다양한 작은 해골 병사들은 기운 벽이 일으킨 충격 때문에 하늘로 튕겨져 날아갔고, 몸통까지 흩날려 시체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자욱하게 깔려있던 안개도 단번에 밀려났고, 하늘에 걸려있던 먹구름마저 멀리 흩어졌다. 그러자 희미하게 보이던 붉은 달빛이 다시 그 자리에 쏟아졌다.
불빛이 점차 사라지자 귀왕의 거대한 몸통은 평범한 사령들처럼 수많은 파편이 되어 부서져서는 땅으로 떨어졌다.
이 복잡한 과정은 단 두어 번 호흡을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수련 경지가 성계에 도달한 귀왕 한 마리가 가볍게 사라져버렸다.
석목은 여전히 주먹을 쥔 자세로 서 있다가 다시 천천히 주먹을 거두어들였다. 그런데 석목의 옆에 서 있던 연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앞쪽에 드리운 안개가 흩어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뚜렷이 드러났다.
석목이 주먹을 날린 검은 골짜기 위는 텅텅 비어있었고, 사령 생물들이 단 한 마리도 없었다. 하지만 골짜기 옆으로는 여전히 수많은 사령 대군이 촘촘히 서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낡은 갑옷을 두른 하얀 뼈 병사들이었고, 등급이 높은 금색 또는 은색 해골 병사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몸집이 거대한 문드러진 강시와 짐승들도 여럿 있었다.
사령 생물들 뒤로는 또 몸집이 산 같은 열 몇 마리 귀왕급 사령들이 있었다.
기세가 등등하던 사령 대군은 석목의 주먹이 보여준 위력에 놀라 한참 동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