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4화. 창월 유적지
“청홍, 명을 내리거라. 은련성에 있는 모든 요족을 전부 집합시켜!”
충오가 고개를 돌려 청년에게 말했다.
청년은 감개무량한 얼굴로 대답을 하고는 큰 걸음으로 대전에서 걸어 나갔다.
“존상님, 백원왕의 원한은 꼭 갚아야 하지만 지금 천정이 갖춘 실력은 너무 막강하여 절대 그냥 간과할 수 없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싸우게 된다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얼마나 됩니까?”
충오는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불같았지만 머리는 매우 냉철했다.
“걱정 말게. 이미 많은 세력과 연합을 했으니. 반드시 이길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지만 절대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은 아냐!”
석목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충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 존상님. 예전에 속승이라는 자가 은련성에 왔었습니다. 그분이 존상님의 벗이라고 하던데 아는 분인가요?”
충오가 갑자기 무엇인가를 떠올리며 물었다.
“속승!”
석목은 깜짝 놀랐다가 이내 기뻐하며 벌떡 일어서더니 다급하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네. 언제 왔었나? 무슨 말을 한 건가?”
청란성지가 무너질 때 헤어진 뒤로 석목은 속승을 만나지 못했다. 속승을 어떻게 찾아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런 소식을 전해 듣게 되다니.
“대략 두 달 전입니다.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는데 이 물건을 남겨두고 가셨죠. 존상님께서 은련성에 오게 되면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물건을 보면 알 거라고 하시더군요.”
충오가 하얀 공을 하나 꺼내어 석목에게 건네줬다.
“두 달 전……”
석목은 눈에 빛을 반짝였다.
두 달 전이라면 석목이 미양 성역에 왔을 때였는데 속승이 때마침 은련성에 왔었다니, 이건 우연일까?
석목이 그리 생각을 하며 하얀 공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신식으로 공을 훑어보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석목은 신식을 공 안으로 흘려보냈다.
이때, 하얀 공에서 옅은 빛이 반짝이더니 석목의 신식이 침입하는 걸 막아냈다.
“재미있네.”
석목이 눈썹을 치켜 뜨더니 구 할이 넘는 신식의 힘을 들여 뾰족하게 벼린 다음에 공을 찔렀다.
쩍!
가벼운 소리와 함께 하얀빛이 터져버렸다.
석목은 곧장 다시 신식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어떤 정보가 흘러나오며 석목의 머릿속에 공간 좌표가 하나 생겼다.
석목은 미양 성역의 공간 지도를 아주 잘 알아 곧바로 좌표가 미양 성역에서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곳은 매우 외진 곳이었고, 은련성과도 거리가 멀었다.
속승이 특별히 충오에게 전신을 보내 공간 좌표를 알린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터라 석목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미 이곳에 왔으니 천하 성역으로 좀 늦게 돌아가도 상관은 없었다.
석목은 은련성에서 일을 마친 후에 그곳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은련성의 요족들은 준비성이 매우 철저해 반나절도 안 되는 사이에 모든 요족들이 모여 대전 근처에 집합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신경 존재는 단 둘뿐이었지만 성계는 아주 많아 족히 수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천위 강자와 그 아래인 실력자들도 수두룩했다.
“존상님, 은련성의 모든 요족들이 이제 집결을 마쳤습니다.”
충오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석목은 빽빽하게 서 있는 요족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이 주변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신경 강자 두 명과 성계 강자 수백 명을 합친 전력만 해도 팔황고족 하나와 비슷한 규모였다.
요족들의 옆에는 푸른 전함이 일고여덟 척 빙 둘러있었다. 그리고 전함들은 꼭대기가 뾰족했고, 삼엄한 빛이 반짝였다.
함체에는 수많은 부문들이 적혀있었는데 얼핏 보면 무수히 많은 물고기 비늘처럼 생겨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전함은 마치 깊은 바다 속에 사는 특별한 어류인 검어(劍魚) 같았다.
“존상님, 이건 우리가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검어 전함입니다. 보통 전함만큼 포격 능력을 갖추진 않았지만 속도는 매우 빠르죠. 전투는 전함 꼭대기에 달린 뾰족한 척(刺)을 써서 치르는데 이 척은 천 년 동안 이곳에서 수명이 다 된 검취수(劍嘴獸) 천여 마리의 입 부분을 제련하여 만든 겁니다. 때문에 영보와 같이 매우 단단하며 파괴력도 뛰어나죠.”
충오가 매우 자랑스럽게 말했다.
“훌륭한 전함 같군.”
석목이 칭찬을 하며 말했다.
석목은 전함이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또한 꼭대기에 달린 뾰족한 척은 아마 신경 초기라 해도 직접 부딪치지 못할 터였다.
“충오, 우선 부대를 이끌고 천하 성역의 무암성으로 가 있어라. 천정과 싸우기 위해 만든 미천 연합이 있으니. 이건 내 신분 영패야. 검어 전함이라면 충분히 천하 성역으로 갈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는 않으마.”
석목이 그리 말을 하며 미천 연합의 영패 하나를 충오에게 건네었다.
“존상님, 함께 돌아가지 않으실 겁니까?”
충오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구나. 이 일만 마치면 무암성으로 돌아가마.”
석목이 말했다.
“네,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충오가 영패를 받아들며 공손하게 말했다.
석목은 무암성으로 가는 동안 조심해야 할 몇몇 사항들을 전달하고는 하늘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충오 어르신, 존상님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습니까?”
푸른 옷을 입은 사나이가 다가와서 물었다.
“존상님은 처리해야 하실 일이 있다고 하시더구나. 우리는 먼저 천하 성역으로 가자.”
충오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내는 멈칫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전함으로 올라탄다. 천하 성역으로 출발!”
충오가 큰소리로 외쳤다.
은련성에 머물던 모든 요족이 전부 검어 전함으로 날아오르자 거대한 전함이 서서히 하늘로 솟아올라 별하늘 밖으로 날아갔다.
* * *
은련성 바깥 성역, 석목은 허공에 서 있었다.
석목은 검어 함선 몇 척이 하늘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회색 환영으로 변하여 빠른 속도로 하얀 구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구전현공의 오행이 균형을 이룬 후에 석목은 육신을 허공에 녹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석목은 비행 속도가 또 다른 차원에 이르렀고, 혼돈의 힘 같은 성역에서 벌어지는 돌발 상황 따윈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석목은 비교적 짧은 거리만 전송진을 이용했고, 대부분은 직접 비행을 했다.
* * *
보름 뒤, 석목은 드디어 하얀 구체가 가리키는 곳인 미양 석영의 변두리에 도착했다.
성역의 변두리는 공간이 극도로 불안해 곳곳에 눈에 띄는 공간 파동이 물결쳤고, 균열도 줄줄이 찢어졌다. 그리고 다양한 색깔을 띤 공간 난류까지 기승을 부렸다.
석목은 수많은 공간 난류가 흐르는 곳에 서서 회색빛을 뿜어내어 커다란 보호막을 펼쳤다.
그러자 주변에 일던 공간 균열과 난류가 다가오지 못했다.
석목은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역의 허공에는 공간 균열과 난류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눈에 금빛을 반짝였다. 그러자 백원왕에게서 물려받은 영목신통이 동공에 금색 무늬를 그리며 나타났다.
영목신통을 시전하면 신혼의 힘을 많이 소모했으나 영목신통으로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석목은 곧바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는 근처에 드리운 방대한 공간 난류 속으로 날아갔다.
난류 속에서 한참 날아가던 석목은 손을 흔들어 회색빛을 다섯 갈래 날렸다. 그러자 허공이 가볍게 찢어지면서 틈이 하나 벌어졌다.
석목이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순간, 눈앞이 희미해지더니 하얀 공간이 하나 나타났다.
공간 난류가 전부 사라지더니 또 다른 공간에 나타난 것 같았다.
하얀 공간 가운데엔 하얀 대륙이 하나 떠 있었다.
먼 곳으로 시선을 던져보니 대륙은 수 만 리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땅 위에는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고, 산봉우리가 곳곳에 널린 게 매우 생기가 넘쳤다.
대륙에 다가가기도 전에 풍겨져 나오는 짙은 천지의 영기가 느껴졌다.
“이곳은……”
석목은 어리둥절했다.
“후후, 석목, 드디어 왔구나. 오래 기다렸다.”
이때,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푸른 옷을 입은 낯선 청년이 나타났다.
석목은 표정을 바꾸며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눈앞에 선 청년은 방대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는데 이미 신경 후기에 도달한 것 같았고, 실력 또한 연나와 비슷해 보였다.
석목은 눈앞에 선 청년을 훑어보다가 멈칫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 속승 선배님!”
석목은 생각을 되짚자 청년의 이목구비가 연꽃 동자와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또 다른 외모를 보여주고 있으니 못 알아볼 수도 있겠군.”
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석목은 다시 청년의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청년이 연꽃 동자와 똑같은 기운을 풍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석목은 확신이 들었다.
“속승 선배님, 오랜만이네요.”
석목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자리를 옮기자.”
속승은 담담하게 웃으며 돌아서서 하얀 대륙으로 날아갔다.
석목은 속승의 뒤를 따라갔다.
둘은 빠른 속도로 대륙 가운데에 도착했다.
대륙의 가운데엔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나무는 주변에 솟은 산봉우리들보다 훨씬 높이 뻗어있어 마치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나무는 은색이었고, 나뭇잎도 마찬가지로 찬란한 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화려한 은빛이 하늘에서 쏟아지자 거대한 나무가 빛을 빨아들였다.
나무 근처에는 궁전이 줄지어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너졌고, 온전한 건물은 단 몇 채뿐이었다.
속승이 한 대전 앞으로 내려오자 석목도 그 뒤를 따랐다.
“신수(神樹)군요!”
석목은 은색 나무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아마 너도 들어본 나무일 게다. 창월이라고 하지.”
속승이 담담하게 말했다.
“창월고수? 그렇다면 여긴……”
속승이 하는 말을 듣던 석목은 깜짝 놀랐다.
“그래, 이곳이 진정한 창월 유적지란다. 안타깝게도 제준과 격전을 치르며 창월은 곳곳이 이미 무너져 지금 보이는 이 구역만 남게 되었지. 그러나 이곳도 마찬가지로 많이 무너졌구나.”
속승이 한숨을 내뱉었다.
석목은 입을 살짝 벌린 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석목은 오래전부터 창월에 대해 전해들은 바가 많았는데 천 년 전에 이곳은 연나의 곤륜이나 제준의 천정과 나란히 섰던 장소였다.
하지만 창월은 곤륜보다 훨씬 작아 그저 무너진 대륙의 조각 하나에 불과했다.
석목은 눈에 빛을 반짝이며 먼 곳에 솟은 웅장한 산맥들을 바라보았다.
산봉우리 위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지어져있었는데 건물마다 빛이 반짝였고, 골짜기에 수많은 그림자가 날아다녔다.
“저들은 혹시 청란성지의 제자들입니까?”
석목이 물었다.
그리고 신식을 드리워 훑어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곳에는 수많은 수련자들이 있었는데 숫자만 해도 십만이 넘는 것 같았고, 신경 강자도 족히 일고여덟 명은 되었다.
“그래, 예전에 나는 청란성지에서 실력이 있는 제자들을 따로 빼내 이곳으로 데려왔지. 그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뛰어난 실력자들도 몇몇 배출했구나.”
속승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속승 선배님은 대단하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석목이 탄복하며 말했다.
예전 청란성지라 해도 절대 지금 실력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성계 수련경지까진 그렇다고 쳐도 만약 이곳에 모인 신경 강자들을 은둔하는 동안 키워낸 것이라면 속승은 정말 하늘에 닿는 실력을 갖췄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선 들어가자.”
속승이 후후 웃으며 대전으로 들어갔다.
석목도 따라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