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화. 일정월화(日精月華)
대전은 매우 단조로웠고, 의자만 몇 개 놓여있어 둘은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동안 혼자 밖에서 돌아다니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속승이 미안한 듯이 말했다.
“후후, 보아하니 속승 선배님은 제가 그동안 겪은 일들을 잘 알고 계신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석목이 담담하게 웃었다.
충오에게서 속승이 두 달 전에 은련성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후에 석목은 그간 속승이 암암리에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고, 심지어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꿰뚫고 있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 부분에 대해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는 구전현공을 물려받은 사람이라 나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단다.”
석목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동안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심지어 매번 많은 수확을 얻어냈죠. 그건 전부 속승 선배님이 뒤에서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석목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현화번 열두 개를 얻게 된 건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아마 속승이 뒤에서 도와줬을 가능성이 높았다.
속승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 몇 번 도와준 적은 있었지만 내 도움엔 한계가 있었지. 헌데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구전현공을 대성했다니. 그리고 수련경지도 신경 중기 정상에 이른 건 내 예상을 초월한 수준이구나.”
속승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빨리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건 스스로 노력을 한 까닭도 있었지만 천정이 주는 압박도 석목에게 큰 작용을 했다.
“이런 얘기는 잠시 접어두죠. 속승 선배님은 천정의 움직임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지요?”
석목이 물었다.
“알고 있지. 천정의 현문 계획은 이미 가장 중요한 단계에 이른 것 같구나.”
속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석목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속승은 세 성역을 주도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므로 당연히 현문 계획을 알고 있을 터였다.
“저는 미천 연합을 만들었고, 또 많은 세력을 연결하여 적잖은 병력을 모았습니다. 그러니 얼마 후에 천정에 반격을 하려고 하는데 이 일에 대해서 속승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의적절합니까?”
석목이 물었다.
속승은 혼자서 천정과 천 년 가까이 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정의 일을 아마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그동안 석목이 급하게 속승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속승이 병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요인도 있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천정의 깊은 내막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석목은 속승과 함께 전황을 논의하고 싶었다.
“네 판단이 옳구나. 천정이 현계지문을 열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지. 그러니 지금 막지 않으면 온 성역엔 아마 하늘이 무너지는 재난이 닥칠 게다.”
속승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이미 구전현공을 대성까지 수련했지만 수련 경지는 아직 부족하구나. 그러니 만약 제준과 싸우게 된다면 분명 밀릴 테지.”
속승이 말을 돌렸다.
“네, 저는 예전에 백원 선조님이 갖추셨던 실력에 아직 미치지 못하죠. 하지만 제 수련은 하루아침에 강해질 수 없는 지경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시간이 촉박해 기다릴 수 없을 것 같군요……”
석목이 말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에게 방법이 하나있는데 그 방법이라면 경지를 돌파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시도해보겠느냐?”
속승이 석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방법입니까?”
석목이 다급하게 물었다.
“명역 통로를 열어 명하지수를 건양월유대진(乾陽月幽大陣)에 불어넣어 창월 비경 속에 천 년 동안 모았던 일정월화를 전부 네 몸속으로 주입해 단번에 수련 경지를 돌파하는 방법이란다.”
속승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해보겠습니다!”
석목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큰 위험이 따른단다.”
속승이 말했다.
“어떤 위험입니까?”
석목이 물었다.
“창월 비경은 창월고수가 있었기에 천지간의 일정월화를 헤아릴 수 없이 빨아들일 수 있었단다. 그러니 천 년 동안 얼마나 많은 힘을 모았는지 나조차 예측할 수 없지. 그런데 이 막강한 힘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다면 너는 육신이 터져버려 죽어버릴 수도 있단다.”
속승이 석목을 보며 설명했다.
“괜찮습니다. 시도해볼 테니 도와주세요.”
석목이 포권을 하며 유난히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석목은 이미 불사신에 도달하여 육신으로 견디는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그래, 결단을 내렸으니 나를 따라오너라.”
속승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속승은 석목을 데리고 궁전에서 나와 건물 폐허 속을 뚫고 지나 푸른 초원의 변두리에 도착했다.
석목은 고개를 돌려 궁전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창월고수의 커다란 나뭇잎이 하늘에 걸려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초원은 지세가 조금 낮은 편이었고, 분지 모양을 이루고 있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낮아졌다.
들판은 너비가 족히 십 리나 되었고, 무릎까지 자란 잡초들이 가득했다.
잡초에는 정령초(精靈草)가 섞여있었는데 유유히 약냄새를 풍겨 기분이 제법 상쾌했다.
석목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는데 무성한 풀들 속에 하얀 석대가 몇 개 놓여있었다.
하얀 석대들은 무릎까지도 채 올라오지 않았고, 너비도 채 한 장이 되지 않았다. 또한 석대는 길이가 십여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은은하게 곡선을 이루는 반원 모양으로 풀 속에 묻혀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얀 석대는 층층이 에돌아 은연중에 천지의 원기를 모으는 진법을 이루고 있어 초원에 영약이 많이 자라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석목이 짓는 표정을 살피던 속승은 미소를 지으며 석목을 데리고 초원의 중심으로 걸어갔다.
초원의 중심은 지세가 가장 낮았는데 거기엔 너비가 십 장 정도 되는 둥그런 석대가 하나 놓여있었고, 그 위로 수많은 부문들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또한 석대에는 수많은 흠집과 바람과 서리 때문에 부서진 자국도 남아있었다.
흔적 사이사이마다 검푸른 이끼가 자라나있었다.
속승이 이끄는 가운데 석목은 몸을 날려 석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대진은 내가 직접 움직일 테니 너는 포원수일(抱元守一)하여 최선을 다해 몸속으로 일정월화와 천지의 원기를 합치면 된단다.”
속승이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포원 자세를 취하고 앉았다. 그리고 점점 수련 속으로 빠져들었다.
속승이 옷자락을 흔들며 허공에 올라가서는 석목의 옆으로 다가가 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손바닥만 한 붉은 거울 여덟 개가 춤을 추며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여덟개의 거울은 적동으로 만든 것으로 앞면엔 기괴한 부문, 뒷면에는 여덟 가지 추악한 짐승들이 새겨져 있었다.
속승은 여덟 거울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깍지를 꼈다. 그리고 기이한 법결을 날리면서 어려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주문 소리가 울려 퍼지자 여덟 거울에서 붉은빛이 밝아지며 줄줄이 이어지더니 크기가 십 장에 이르는 붉은 고리를 이루었다.
고리 사이에 검은 광막이 펼쳐지면서 여덟 마리 괴수들의 환영이 나타났다. 그리고 환영들은 서로 울부짖으며 촘촘히 모여 그리 크지 않은 고리를 꽉 채웠다.
여덟 마리 짐승의 환영이 한참 동안 허우적대면서 고리에서 뛰쳐나오려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짐승들은 머리를 고리 밖으로 내밀고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지만 어떤 힘에 이끌리는 듯이 속박을 벗어날 수 없었다.
여러 차례 발버둥을 치던 짐승들은 드디어 잠잠해지는 듯하더니 고개를 돌려 안쪽에 자리한 검은 광막을 덮쳤다.
광막이 터지면서 긴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우르릉!
짐승들이 포효하는 소리가 통로에서 흘러나와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뜨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붉은 거울 여덟 개로 이루어진 고리에서 붉은빛이 들끓더니 핏빛이 일어 마치 붉은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쏴!
핏빛 폭포가 하늘에서부터 초원으로 쏟아지며 붉은 물꽃을 튀겼다. 그러자 초원은 순식간에 잠겨버렸다.
푸르던 잡초는 붉은 물에 잠겨버려 마치 물풀처럼 흔들렸다.
폭포가 쏟아질수록 초원에 물은 점점 들이찼으며 이윽고 석목의 가슴까지 올라왔다.
석목은 몸이 차가워지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마치 모든 모공이 차가운 물결을 통해 전부 뚫려버린 것만 같았다.
이때, 속승이 갑자기 두 손에 빛을 드리우며 석목을 내리쳤다.
석목은 깜짝 놀랐지만 간신히 참아내며 저항하지 않고, 도망을 가지도 않았다.
금빛이 쏟아져 석목이 앉아있는 석대를 내리쳤다.
쾅!
석대가 흔들리면서 위에 새겨진 다양한 부문들에서 금빛이 빛났다. 그리고 금빛 한 갈래가 석대에서 날아 나와 물길을 따라 석대 주변에서 맴돌았다.
하얀 고리 모양 석대는 금빛이 번쩍이자 화려한 빛을 밝혔다.
솨라라!
파도 소리와 함께 석목 주변에서 물이 점점 들끓기 시작했다.
거대한 고리 모양 석대 위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빛 고리가 줄줄이 물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고리 모양 석대가 치솟는 속도는 매우 빨라 거의 순식간에 백 장 높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바로 안쪽에 자리한 고리 모양 석대가 하늘로 날아올랐고, 조금 전에 솟아오른 석대보다 몇 장 정도 낮은 자리에 멈췄다. 그렇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빛 고리가 치솟은 높이는 점점 낮아졌다.
이런 고리 모양 석대 사이에는 커다란 깔때기가 불규칙하게 생겨났다.
그리고 깔때기의 밑단에는 붉은 물 안에 잠겨있는 석목과 둥그런 석대가 놓여있었다.
건양월유대진이 가동되자 속승은 대진 밖으로 벗어났다.
석목이 석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자 명하지수는 이미 그의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고, 온몸이 물속에 잠겨버렸다. 그렇게 초원 분지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붉은 호수로 변하였다.
명하지수는 흐르는 물처럼 보였지만 실은 잠잠한 호수라 물속에 잠긴 석목은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자유자재로 호흡할 수도 있었다.
석목이 눈을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물속의 잡초가 물결이 이는 규칙에 따라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잡초 사이에서 금빛이 밝아지더니 금빛은 반딧불처럼 석목에게로 흘러들어와 석목의 팔에 닿는 순간,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따뜻한 기류가 석목의 몸속으로 퍼져나가니 매우 편안했다.
이어서 물밑에 밝은 빛이 끊임없이 밝아지며 점으로 흩어지는 것이 마치 별들로 수를 놓은 밤하늘 같아 물에 잠긴 초원은 매우 아름다웠다.
석목은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자 별바다에 놓였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훅!
가벼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에 잠긴 별들이 물결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하수를 이루며 석목의 몸으로 흘러들어왔다.
한 덩이 빛이 석목의 몸에 닿더니 눈이 녹아버리듯 석목의 몸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몸속이 다시 따뜻해지며 마치 천 갈래 빛이 동시에 몸에 들어온 듯 마음 또한 가벼워졌다.
무수히 많은 금빛이 석목의 몸속으로 쏟아지면서 근육과 골격을 투명하게 비추었다.
석목은 마치 불에 타오르는 듯이 고통스러워 소리를 질렀다.
대진 밖에 서 있던 속승은 석목이 내지르는 소리를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속승은 고개를 들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허공에 걸린 고리 모양 석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석대는 금빛을 반짝이며 유유하게 맴돌았다.
윙!
하늘에 걸려있던 석대들이 순식간에 흔들리면서 회전을 멈추었다. 그리고 위에 새겨진 부문들이 마치 살아나는 듯이 번쩍거렸다.
온 창월 비경이 석대에서 번쩍이는 부문들과 함께 가볍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