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6화. 인신합일
멀리 떨어진 창월고수의 커다란 나뭇가지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찬란한 빛이 분리되어 나왔다.
이어서 주변에 감돌던 천지의 원기가 들끓기 시작하며 수많은 빛이 돌과 나무 사이에서 나타났다. 심지어 하늘에 걸려있던 구름마저 빛이 번쩍이더니 눈꽃처럼 아래로 흩날렸다.
창월고수가 천년 동안 흡수하여 창월비경 곳곳에 모아두었던 일정월화가 순식간에 빛으로 변하여 천지 사이에서 들끓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건양월유대진이 이끌자 빛들은 전부 깔때기 모양을 이루며 진법 속으로 춤을 추며 날아왔다.
처음에 빛들이 날아오는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진법 속에 모이는 빛이 점점 많아질수록 창월 비경에 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비경 곳곳에서 빛들이 강을 이루며 빠르게 진법 속으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붉은 호수로 모였다.
석목의 주변은 찬란하게 빛났고, 그는 두 눈을 감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다시 몰입하기 시작했다.
빛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자 석목의 기운도 점점 강해졌다. 비록 기운이 늘어나는 폭은 아주 미미하여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지만 끊이지 않고 강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창월 비경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무성한 숲의 짙은 푸른색이 점점 퇴색되며 식물에서는 누르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거세게 흐르던 강마저 메말라갔다.
창월 비경 속에 감돌던 천지의 원기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비경 속에 있던 청란성지의 제자들은 이미 사전에 속승에게 전음을 받았기에 비경에서 일어난 변화가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뀌는 환경을 보자 제자들은 마음이 아팠다.
* * *
한 달 뒤.
대진 위에 열린 명역 통로는 이미 닫혀버렸고, 명하지수는 더 이상 흘러들어오지 않아 핏빛 호수만 남겨졌다.
석목은 여전히 호수 밑에 앉아있어 밝은 빛이 호수를 환하게 비추었다.
석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석목의 몸에서는 특별한 움직임이 보였고, 물결이 줄줄이 퍼지면서 수면 위로 퍼져나갔다.
이때, 석목이 두 눈을 번쩍 뜨자 동공 속에서 금빛이 반짝였다.
석목이 낮게 소리를 지르며 두 손을 합쳐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미간에서 금빛이 찬란하게 빛나더니 몇 뼘 정도 되는 금색 사람이 날아 나왔다.
석목과 매우 닮은 금색 사람의 몸에서는 찬란한 금빛이 뿜어져 나왔는데 풍기는 기운도 매우 강력했다.
금색 사람의 몸집은 매우 작았지만 표정은 어른스럽게 진지했다.
금색 작은 사람이 두 손을 들어 올려 잠수를 하듯이 밑으로 내려갔다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호수에서 벗어나 진법 속으로 날아갔다.
금색 작은 사람이 실눈을 뜨고는 입을 살짝 벌리자 형태가 없는 흡입력이 일어 반짝이는 빛들이 전부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금색 작은 사람의 본질은 영체에 가까워 그가 일정월화와 천지의 원기를 흡수하는 속도는 석목이 빨아들이는 속도보다 훨씬 뛰어나 밝은 빛을 끊임없이 몸속으로 흡수했다.
빛이 흘러들어오자 금색 작은 사람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육체도 서서히 투명해져 마치 금색 수정과 같았다.
대략 반각 후, 금색 작은 사람은 이미 평범한 사람만큼 커졌고, 창월 비경 속에서 몰려오던 영기도 점점 줄어들었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 광경을 본 금색 사람은 몸을 날려 천천히 내려와 석목의 뒤에서 멈춰 섰다.
금빛을 반짝이며 금색 사람은 한참 동안 희미해지다가 석목의 육신과 하나가 되었다.
인신합일!
쿵!
마른 땅에 번개가 내리쳤다.
석목의 몸통이 격하게 흔들리던 순간,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조금 전에 몸속으로 스며들어간 작은 사람의 방대한 기운이 터져나왔다.
칙, 칙!
석목의 모공이 전부 열리면서 금빛이 줄줄이 뿜어져 나와 등불 수천수만 개처럼 사방팔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빛이 눈이 부셔 심지어 하늘에 뜬 태양의 빛마저 가릴 정도였다.
한 달 동안 속승은 계속 진법의 언저리에서 석목에게 일어난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광경을 본 속승은 얼굴에 희열이 가득했으나 여전히 걱정스러운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다.
석목은 이미 신경 후기에 진입했는데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 일을 이루고 그르치는 건 지금 한 순간에 달려있었다.
빛들이 끊임없이 반짝이자 석목의 몸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석목의 육신이 눈에 보이는 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해 잠깐 사이에 그는 둥근 금색 구체로 변하였다.
석목의 피부는 이미 끝까지 부풀러 갈라지는 틈이 벌어져 곧 몸속에 주입된 방대한 천지의 원기에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때, 석목이 포효하자 거원 혈맥이 촉발되어 근육이 급속도로 팽창하더니 몸통 또한 빠르게 불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석목은 키가 만 장이나 되는 미천거원으로 변하여 호수에서 날아 나왔다.
펑, 펑, 펑!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 울리더니 석목의 거대한 몸통이 허공에 걸린 하얀 석대와 부딪치자 석대가 전부 부서져 가루가 되어 흩날리며 핏빛 호수 속으로 쏟아졌다.
무수히 많은 금빛이 석목의 거대한 몸통에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육신을 찢어버렸다.
석목의 금빛 털은 꼿꼿이 섰고, 커다란 머리에 달린 두 입을 벌리고는 미친 듯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 손으로 전부 주먹을 쥐고선 곧장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순간, 찬란한 금빛 파동이 하늘로 치솟아 극에 달하는 놀라운 기운을 뿜어냈다.
빛의 파동이 스치자 하늘에 뜬 구름마저 갈기갈기 찢어져 버려 그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쾅, 쾅!
석목의 몸속에서는 천둥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몸 곳곳에서 금빛이 터질 때마다 초원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석목이 밟고 있는 핏빛 호수는 마치 끓는 물처럼 들끓었다.
청란성지의 제자들은 기운을 느끼고는 시선을 석목에게로 던지며 전부 믿기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쿵!
마지막 폭발음이 울려 퍼진 후에 천지는 다시 고요하게 돌아왔다.
순간, 방대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나타나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기운에 닿자 속승마저 동공이 살짝 줄어들었다.
이어서 찬란한 금빛이 석목을 삼켜버렸다.
석목의 몸통 위에 놓인 두 머리 중에 한쪽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또 다른 원숭이 머리가 하나 더 나타났다. 그리고 갈비뼈에 붙은 두 팔 말고도 튼실한 팔이 한 쌍 더 자라나 석목은 머리가 셋에 팔이 여섯 달린 생김새가 되어 예전에 만났던 금색 갑옷을 입은 거원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으아……”
석목은 흥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포효했다. 그렇게 신경 후기로 진입한 석목은 영력을 다루는 양이 훨씬 방대해졌고, 육신의 질도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석목은 구체적으로 어디가 바뀌었는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아마도 앞으로 실전을 치르며 드러날 터였다.
신경 후기로 진입한 기쁨이 점차 누그러들자 석목은 몸에 빛을 반짝이며 다시 인족으로 돌아왔다.
“좋아, 좋아!”
속승이 석목의 옆으로 날아와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석목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이 시각, 창월 비경에 자란 식물들은 전부 말라버려 노란빛을 띠는 게 처음 봤던 싱싱하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풍성하던 천지의 원기마저 희박해졌다.
하지만 속승은 더욱 활짝 웃더니 석목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공수자가 법기를 제련할 때 사용하던 자취로가 네게 있지?”
속승이 물었다.
“자취로가 제게 있다는 걸 선배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석목이 눈썹을 치켜뜨며 의아한 듯이 물었다.
“네 천기곤초는 자취로에서 제련했지. 그리고 네가 입었던 구룡쇄금갑도 엄연히 자취로에서 다시 제련을 거쳤겠지. 그 정도는 나도 알아볼 수 있단다. 그런데 왜 그 보물 갑옷을 꺼내 입지 않느냐?”
속승이 궁금한 듯이 물었다.
“구룡쇄금갑은 제가 신겁을 겪으며 천둥번개를 맞아 심하게 망가졌어요. 그동안 복구할 시간이 없어서 계속 입지 못하고 있었죠.”
석목이 설명하며 말했다.
“잘됐군. 때마침 상고 진도를 하나 얻었는데 전투 갑옷의 방어력을 끝까지 끌어올릴 수 있지. 네 구룡쇄금갑을 다시 제련하려고 했는데 이제 자취로로 한 번에 복구하면 되겠구나.”
속승이 웃으며 말했다.
“속승 선배님, 자취로는 원래 완전히 망가져 있었어요. 헌데 공수자 선배님의 혼이 자취로에 붙어있어서 자취로가 보존된 것이죠. 그러니 제련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단 세 번뿐인데 제가 이전에 이미 두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이제 다시 자취로를 사용하면 공수자 선배님의 혼이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석목이 난감한 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속승은 한참 동안 고민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공수자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나 전해들은 말은 있구나. 공수자는 연기에 빠져있던 사람이지. 그런데 죽고 나서도 혼이 사라지지 않고 연기로에 붙어있다니 실로 탄복스런 일이구나. 하지만 공수자가 무엇 때문에 연기로에 붙어있었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연기를 하여 보물은 만들기 위해서지요.”
석목이 답했다.
“그렇다면 왜 아쉬워하겠나?”
속승이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석목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답했다.
공수자의 죽은 혼이 자취로에 붙어있는 건 천지를 놀라게 만들 신기를 제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마지막 기회를 구룡쇄금갑을 제련하는데 쓰는 것이야말로 공수자에게 가장 큰 예의를 갖추는 셈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 공수자가 가장 원하는 일일 터였다.
석목이 손을 흔들어 보라색 동로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동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석목은 곧바로 동로 속으로 빛을 날렸다.
자취로에서 보랏빛이 반짝이더니 틈 사이에서 푸른 그림자가 날아 나와 왜소한 노인이 되었다.
공수자는 나타나자마자 자취로를 둘러싸고는 소리를 질렀다.
“물건일세, 아주 좋은 물건이야.”
그 모습을 본 석목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안타깝게도 공수자는 이제 자취로 마저 기억하지 못했다.
“공수자 선배님.”
석목이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누구야?”
역시 공수자는 석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배님……”
석목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공수자가 갑자기 돌아서서 핏빛 호수 속으로 내려갔다.
“이건…… 명하지수? 하하…… 명하지수라니! 백 년 만에 보는 것 같군. 이렇게 또다시 만나다니!”
공수자는 매우 기뻐하며 소리를 질렀다.
“공수자 선배님은 예전에 천정이 기습을 하여 신혼에 큰 부상을 입었어요. 그 상태로 자취로에 천 년 가까이 붙어있으셔서 이미 의식이 많이 희미해졌습니다.”
석목은 공수자를 바라보며 속승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속승은 안타까운 기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흔들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취로를 들고 핏빛 호수로 내려왔다.
“선배님, 제자가 보물 갑옷 하나를 선배님께서 복구해주시길 부탁하려합니다.”
석목이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그래. 무슨 보물 갑옷?”
공수자는 연기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정신이 번쩍 들면서 되물었다.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구룡쇄금갑을 꺼냈다.
공수자는 석목이 들고 있는 보물 갑옷을 바라보며 눈에 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계속 감탄하는 말을 내뱉었다.
“좋은 보물이야. 아주 좋은 보물일세……”
공수자가 구룡쇄금갑을 매만지자 그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끼는 장난감을 만지는 것만 같았다.
“선배님, 저에게 진도와 몇몇 재료들이 있습니다. 이 갑옷을 복구하시면서 등급도 한 층 올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속승이 앞으로 다가가 신분 차이를 무시한 채 물었다.
“그래, 어떤 재료가 있는가? 세속적인 물건들은 아니겠지?”
공수자가 속승을 한 번 쳐다보고는 탐탁지 않은 듯이 말했다.
속승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검푸른 우피지(*牛皮纸: 소 가죽 종이)와 열 몇 가지 재료가 공수자의 앞에 나타났다.
“유명현철(幽冥玄鐵), 한해금정(瀚海金晶), 낙풍염석(落風炎石)……”
공수자는 마치 가문에서 내려오는 보물을 외우듯이 단번에 열 몇 가지 진귀한 재료들의 이름을 주저리주저리 읊었다. 재료들위 이름을 옆에서 듣고 있던 석목은 어리둥절해졌는데 그중 절반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물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