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9화. 천 년 전의 일
흑마 성역의 전함들이 육규종 일행 앞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연나와 석목이 전함에서 날아 내려오자 흑마 성역의 대군이 전부 전함에서 내려와 연나의 뒤에 모였다.
석무애, 전무, 명라를 비롯한 신경 마존들도 함께 왔다. 또한 그들의 수련 경지도 예전 보다 많이 늘었고, 성계 고수들도 수백 명은 되었다.
“여러분, 이분은 흑마 성역의 보화 성조이십니다. 우리 미천 연합과 힘을 합쳐 함께 천정과 싸울 겁니다!”
석목이 연합 사람들에게 연나를 소개했다.
“보화 성조님!”
육규종을 비롯한 이들이 연나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천정과 대전을 치를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화를 봤기에 석목이 하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연나가 신경 후기 강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연합 사람들은 매우 좋아했다.
연나는 싸늘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대장로님, 맹우들이 머물 주거지를 안내해주시고 연석을 준비해주세요. 흑마 성역의 도우들을 제대로 맞이합시다.”
석목이 대장로에게 지시했다.
“네!”
대장로가 대답을 하고는 이제 막 떠나려고 했다.
이때, 날카로운 소리가 먼 곳에서 울려 퍼지며 푸른빛이 구름을 뚫고서 하늘에 나타났다.
석목이 금빛을 뿜어내며 한참 동안 훑어보다가 화색을 드러냈다.
“또 다른 벗들이 왔군요.”
대장로를 비롯한 이들은 일제히 푸른빛을 바라보았다.
연나도 푸른빛을 바라보며 이채를 띠다가 막연한 기색을 드러냈다.
푸른빛 구름은 곧바로 가까이까지 다가왔고, 푸르고 커다란 비주가 나타났다.
비주는 모든 전함들을 합친 것보다 열 몇 배는 더 컸고, 그 위로 궁전이 줄줄이 지어져 있었다. 심지어 화초와 나무도 자라나 있어 비주는 마치 떠다니는 대륙 같았다.
커다란 비주 위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서 있었고, 전부 푸른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청란성지의 세력이었다.
푸른 그림자가 비주에서 날아 나오자 석목의 옆에 속승의 모습이 나타났다.
“속승 선배님! 때마침 오늘 도착했군요.”
석목이 다급하게 맞이하며 활짝 웃었다.
“천정과 싸우려면 늦어서는 안 되지. 자네와 보화 성조도 이곳에 모였는데 내가 늦으면 되겠나!”
속승이 웃으며 말했다.
대장로를 비롯한 사람들은 속승의 기운을 느낀 후에 또 다른 신경 후기 강자가 나타나 웅성거렸다. 그리고 다들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연나는 속승을 바라보자 눈에 막연한 기색이 스쳤다.
연나의 머리에서 번개가 반짝이더니 하늘을 뒤엎을 것 같은 파동이 일었다.
쿵!
천둥소리가 연나의 머릿속에서 폭발하며 수많은 장면이 나타났다. 그리고 연나가 잊고 있었던 수많은 기억들이 전부 되살아났다.
연나가 비틀거렸다.
“사존님, 왜 그러십니까?”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연나가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연나는 무거운 돌을 내려놓은 듯이 가벼워졌다.
연나가 복잡한 눈빛으로 속승을 바라보았다.
“여러분, 이분은 속승 선배님입니다. 미양 성역의 삼대 성지 중에 하나인 청란성지의 성주님이시죠. 이제 우리 미천 연합과 힘을 합쳐 천정과 싸울 겁니다.”
석목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대장로를 비롯한 이들이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리며 친절하게 맞이했다.
“그럼 어서 들어갑시다. 손님을 너무 밖에만 서 있게 했네요.”
석목이 손을 흔들며 웃었다.
이어서 일행들은 연합의 총부에 모였다.
연나와 속승이 합류했다는 소식은 이미 미천 연합을 들끓게 만들어 각 종족들이 전부 우르르 몰려들었다.
함께 천정과 싸울 세력들이 한 곳에 모이자 전례 없이 시끌벅적했다.
대장로를 비롯한 이들은 흑마 성역과 청란성지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주거지로 안내를 했다. 그와 동시에 모두 연회를 준비하느라 바쁘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모든 연합 사람들은 전부 환하게 웃으며 돌아다녔다.
무암성에 막강한 세력들이 모였으니 더는 천정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석목은 이런 사소한 일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연나, 속승 선배님. 두 분 모두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허나 지금은 다급하게 논의할 문제가 있으니 편청으로 옮겨서 말씀을 나누시지요.”
석목이 속승과 연나에게 말했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편청으로 걸어갔다.
“대장로님, 함께 들어오시죠.”
대장로가 바쁘게 나가려하자 석목이 그를 불러 세웠다.
대장로는 심각한 석목의 표정을 읽고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남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는 세 사람의 뒤를 따라 편청으로 들어갔다.
“세 분, 앉으세요.”
편청에 들어오자 석목이 자리를 안내했다.
하지만 속승과 연나는 앉지 않고 분위기가 이상해 서로를 한 번 마주 보았다.
“아, 두 분 소개를 못 했군요. 연나, 이분은 속승 선배님이야. 청란성주이시자 또 다른 신분은……”
석목은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읽고는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장현 사형.”
연나가 갑자기 석목이 하는 말을 끊었다. 그러나 차가운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것 같은 익숙함이 어려 있었다.
“사형?”
석목은 깜짝 놀라 입만 벌리고 있었다.
“장…… 장현 선배님!”
대장로가 벌떡 일어서며 입을 살짝 벌리고는 속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더듬대며 말했다.
대장로는 백원왕을 따라다닐 때, 장현을 만난 적이 있었다. 다만 장현은 외모가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백박, 오랜만이군.”
속승이 대장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연나에게로 던졌다.
“보화 사매, 보아하니 기억이 거의 돌아온 것 같군.”
“장현 사형, 잘 지내셨지요? 늦었지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나가 말했다.
“별 거 아니지. 그때는 나도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으니.”
속승이 깊은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둘은 서로 바라만 볼 뿐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두 분…… 사형, 사매지간입니까?”
드디어 석목에게 말할 기회가 생겼다.
대장로도 의아한 눈빛으로 속승과 연나를 바라보았다.
“후후,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 나와 보화는 동문 사제란다.”
속승은 석목을 한번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나와 속승은 한 성계를 다스리며 성역을 뒤흔들만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둘이 동문 사형, 사매 사이라니, 석목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둘이 모시던 스승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기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제자를 두 명이나 두었나.
“우리 둘뿐만 아니라, 천정의 그 녀석도 우리와 동문이지.”
속승이 멈칫하다가 복잡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네? 그러니까 제준이 당신들과 동문이라는 말씀입니까?”
석목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장로도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고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사형과 사매 사이라면 사부님도 계시겠네요? 실례지만 그렇다면 사부님이 누구십니까?”
석목이 한참 후에야 망설이며 물었다.
“물론 우리에게도 사존님이 있지. 허나 그 얘기는 너무 복잡하니 나중에 얘기해주마. 무슨 일로 우리를 불렀느냐?”
속승은 더 깊게 말을 하고 싶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서 속승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석목이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다시 무암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천정의 대군에게 포위를 당했죠. 허나 별다른 공격은 하지 않더니 천정의 선장 하나가 제준의 명을 받고는 제안을 하나 하더군요.”
석목이 천천히 말했다.
이번에는 속승을 비롯한 세 사람이 깜짝 놀랐다. 게다가 일관되게 차가운 표정만 짓고 있던 연나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석목은 고명 선장을 만났던 일을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세 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을 마친 석목이 물었다.
“화합? 흥! 천정이 그동안 우리 천하 성역의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습니까. 심지어 우리 미천거원 일족을 멸망의 위기까지 내몰았죠. 이미 깊은 원한을 맺어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을 맺을 수 있습니다. 화합이라니요!”
대장로는 눈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속승이 다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침묵하다가 연나에게 물었다.
“보화 사매는 어찌 생각하나?”
연나가 침묵을 깼다.
“백박이 하는 말이 조금 극단적이긴 하나 사실이죠. 화합을 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제준이 현문 계획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해에 제준이 보여준 행동을 봤을 때, 그는 절대 이 모든 걸 포기할 수 없을 거예요.”
속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그러니까 천 년 전에 치른 멸세대전을 말하는 겁니까? 그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석목은 연나를 바라보고 말하다가 다시 속승에게 질문을 던졌다.
속승과 연나가 눈빛을 한 번 교환했다.
“다들 알아야 할 사람들이니 천 년 전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말해주지.”
속승이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장로는 눈에 빛을 반짝였다.
백박은 비록 천 년 전에 치른 대전을 겪은 사람이지만 전쟁이 일어난 진정한 이유는 잘 알지 못했다.
편청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마치 천 년이나 묵은 비밀이 드러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아 석목은 침묵만 지켰다.
“천 년 전의 일이라면 나와 보화 사매, 제준. 우리 세 사람의 사존님에 관한 얘기부터 시작해야겠군.”
속승이 기억을 되짚는 표정을 지었다.
연나의 얼굴에도 창망한 기색이 어렸다.
“우리 셋은 사존님의 출신과 성함을 모르지. 다만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존님은 우리를 거두셨고, 신통을 전수해주셨다. 사존님은 신통이 끝없는 강자였으며 지금까지도 나는 우리 사존님이 날리시는 작은 일격조차 막아내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속승이 계속해서 말했다.
석목은 벌써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말이 됩니까! 선배님은 이미 신경 후기시잖아요. 신경 정상에 오른 이가 선배님을 이긴다고 칩시다. 그런데 단 한 번도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신다니요. 성역 대세계에 그런 사람이 존재하겠습니까!”
대장로가 참지 못하고 말을 끊었다.
“그래, 성역 대세계에는 절대 우리 사존님과 같은 실력을 갖춘 사람이 없겠지. 때문에 비록 사존님의 내력을 알 수 없지만 사존님은 분명 이 성역 대세계에서 오신 분이 아닐 게다.”
속승이 말했다.
석목은 무엇인가가 생각이 난 것 같아 눈을 반짝였다.
연나가 고개를 숙이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장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존님은 아마 상계에서 강림한 사람일 게다. 그러니 우리 세계에 속한 분이 아니시지.”
속승이 말했다.
대장로는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석목은 대충 예상을 했던 대답이기에 놀라지 않았다.
“사존님은 우리를 수백 년이나 가르치셨으며 우리의 실력이 신경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사라지셨다. 그리고 소위 ‘현계지문’을 여는 방법이라는 것만 남겨주셨지.”
석목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렇군. 그러니까 이 세 사람의 사존은 상계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현계지문과 관련된 전설은 상고 시기부터 있었지만 아무도 여는 방법을 알지 못했어. 그래서 제준이라는 놈이 어떻게 현계지문을 여는 방법을 알았을까 했는데 역시 상계의 사람이 남긴 것이었군.”
이때, 석목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령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록 사존님이 현계지문을 여는 방법을 남기셨지만 현계지문을 열려면 너무 큰 대가가 따랐기에 제준을 포함한 우리 셋은 아무도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속승이 계속해서 말했다.
여기까지 말을 이어가던 속승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옛 추억을 떠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연나도 깊은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