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840화 (840/916)

840화. 결의를 다지다

석목은 잠깐 기다리다가 속승이 계속 말을 하지 않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뒤는요?”

속승이 눈을 껌뻑거리며 다시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그 뒤로 우리 셋은 힘을 합쳐 성역 대세계를 누비고 다녔단다. 그때는 성역 대세계가 지금보다 훨씬 혼란스러웠지. 각 성역마다 전쟁이 끊이질 않았고 전란으로 인해 수많은 생령들이 죽어나갔다. 그리고 우리 셋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드디어 각 성역에서 벌어지는 분쟁들을 해결했지. 그리고 앞으로 성역에 이런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아내기 위해 우리 셋은 각각 한 쪽을 지키며 세 구역으로 나눠서 성역 대세계를 통치했지.”

속승이 계속해서 말했다.

석목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듣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는 파동이 일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우리는 각자 자리를 지키며 성역 대세계의 평화를 지켰단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세월은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또 많은 추억이 있었던 세월이었단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평화로운 나날들은 계속되지 않았지.”

속승은 목소리가 무거워졌으며 얼굴도 점점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석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신경 강자는 비록 수명이 길지만 분명 끝이 있단다. 우리 셋은 비록 신경 후기까지 수련했지만 천 년이 넘게 지나자 수원도 끝이 났지. 그리하여 나와 보화 사매는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제준은 아니었어. 제준은 이렇게 사라지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단다. 그리하여 현계지문을 열어 상계로 올라가 더 높은 경계와 수원을 찾으려 한 거지!”

속승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구나 다 영생불사를 꿈꾸지. 제준이 한 생각은 아주 평범한 거야. 오히려 속승과 연나가 이상하지? 그래 안 그래?”

수령자가 흥분하며 석목의 머릿속에서 말했다.

석목은 수령자가 하는 말을 무시하며 물었다.

“제준은 그때부터 성역을 파헤치며 영석을 채굴했나요?”

속승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사존님이 남긴 현계지문을 여는 방법은 신통 대진 하나였단다. 만령현문대진(萬靈玄門大陣)이라고도 하지. 이 진법을 사용하면 현계지문을 열 수 있어. 하지만 이 대진을 가동하려면 영력이 막대하게 필요했지. 하지만 사존님이 남긴 방법은 영석의 영력이 아니라 명역의 지음명하지수와 선역의 지양 영맥을 사용해 음양을 합친 힘으로 만령현문대진을 움직여 현계지문을 여는 방법이었단다.”

석목은 수많은 의문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아 깜짝 놀랐다.

“명역은 내가 지키고 있었기에 제준은 나를 찾아왔었지. 그리고 내게 많은 혜택을 줄 테니 명하지수를 빌려달라고 했어.”

속승이 깊은숨을 내뱉었다.

“장현 선배님, 그래서 그렇게 하시기로 결정했나요?”

대장로는 연세가 지긋했지만 마치 호기심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속승이 하는 말에 빠져서 물었다.

“명역은 평범한 성역이 아냐. 그 속에는 은연중에 윤회의 도가 있지. 명하지수는 명역을 이루는 근본이라 만약 고갈된다면 온 명역이 점차 무너질 터였어. 그리고 현계지문을 열면 다른 성역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테니 나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지.”

속승이 말했다.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거절을 당한 제준은 큰 불만 없이 돌아갔지. 그래서 그냥 포기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제준은 현계지문을 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아주 강해 암암리에 만령현문대진을 구축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대진의 힘을 시전할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어. 그리고 제준은 천재라 나중에 정말로 오행의 영력을 이용하여 명하지수를 대체할 방법을 찾아냈지.”

속승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눈살을 찌푸렸고, 대장로도 깊은숨을 내뱉었다.

“제준은 비록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영석을 몰래 채굴한 사실을 나와 보화 사매에게 들켜버렸지. 그래서 우리는 제준의 목적을 알아차렸고 결사반대를 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제준의 독단적인 행동을 막는 과정에서 제준은 결국 우리와 원수가 되었지.”

속승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 일은 제가 장현 사형에게 사죄를 해야겠네요. 사형은 제준을 설득하자고 하셨는데 제가 먼저 무력으로 막아섰지요.”

연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누가 먼저 나섰더라도 결국 같은 결과가 됐겠지. 가는 길이 다르니 결국은 이렇게 되었을 거야.”

속승이 연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너도 다 알고 있을 게다. 제준이 창월과 곤륜을 공격했고, 나와 보화를 꺾었지. 하지만 제준은 백원왕과 결전을 치르며 큰 부상을 당하여 천 년 동안 폐관하며 회복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계획을 지금까지 미룰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동안 제준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려왔구나.”

속승이 말했다.

“보아하니 제준은 절대 현문 계획을 포기하지 않겠군요.”

석목이 깊은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

“게다가 제준의 수원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니 현계지문을 열겠다는 의지를 절대 꺾을 리 없어. 이 화합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겠지.”

연나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제준은 절대 진심으로 우리와 화합하려는 게 아닐 게다. 십중팔구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

속승이 말했다.

“그렇다면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하여 공격할 수는 있겠구나. 제준은 아마 아직 우리의 실력을 파악하지 못했을 게다.”

속승의 눈에서 기이한 기색이 스쳤다.

연나는 속승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의하는 눈치였다.

“속승 선배님, 연나. 두 분은 천정에 대해 아는 게 많겠지요? 천정의 실력은 대체 어떻습니까? 우리의 실력으로 녀석들과 싸워볼 만합니까?”

석목이 침묵을 하다가 말했다.

“천정의 실력은 막강하지만 소문만큼은 아니야. 각 성역에서 기승을 부릴 수 있었던 건 성역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졌기 때문이었지. 그래서 효율적으로 저항하지 못했어. 우리의 세력은 천정보다 뒤처지지 않을 거야.”

연나가 말했다.

석목은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아, 연나. 네 사령 대군은 어떻게 되었어? 법보는 이미 제련을 마친 거야?”

석목이 갑자기 무엇인가가 떠올랐는지 연나를 보며 말했다.

“이미 혼흡(魂翕) 법보를 하나 제련했어. 추선대 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지. 걱정하지 마.”

연나가 답했다.

“대장로님, 명을 내려주세요. 각 종족을 이끄는 우두머리들을 의사대전으로 집합하라고 하세요. 연합 대회를 열 테니.”

석목이 고민을 하다가 눈에 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네.”

대장로가 대답을 하고는 가장 먼저 걸어 나갔다.

“우리도 가죠.”

석목은 대장로가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연나와 속승에게 말했다.

세 사람은 편청에서 나와 반귀 일족의 의사대전으로 향했다.

* * *

반시진 뒤에 의사대전은 사람들로 가득 차 시끌벅적해졌다.

대전의 주좌에는 검붉은 자작나무 의자가 세 개 놓여있었는데 석목이 가운데 자리에 앉았으며 연나와 속승 진인이 양쪽에 앉았다.

석목의 왼쪽 바로 아래에 요와 일족을 제외한 팔황고족의 여러 족장들이 앉아있었고, 방진과 안화도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서유금도 자리에 앉았는데 그는 이 년 전에 성공적으로 신경에 진입한 후에 노족장이 사군대인(社君大印)을 서유금에게 맡겨 지금 비천서 일족의 신임 족장이 되었다.

천봉 일족은 여전히 조주명 장로가 임시로 족장 자리를 맡았다. 그리고 미천거원 일족은 대장로가 대표하여 자리에 앉아있었다. 대장로와 육규종은 주좌와 가장 가까운 왼쪽에 앉아있었는데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두 장로 옆에는 절세가인인 봉희가 이마에 드리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명라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봉희가 의식을 하지 않고 움직이자 대전에 모인 남자들 대부분은 전부 시선을 봉희에게로 던졌다. 심지어 안화가 한참 동안 멍하니 봉희를 바라보니 방진이 옆에서 안화를 놀렸다.

여전히 얼굴이 앳되어 보이는 명라는 손에 육포를 들고는 봉희와 대화를 나누며 육포를 씹었다. 그렇게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니 매우 즐거워 보였다.

봉희와 명라의 밑으로는 전무, 석무애, 운리 그리고 흑마족의 신경 강자 두 명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흑마족의 맞은편에서도 가장 주좌와 가까운 곳에는 푸른 옷을 입은 신경 강자가 여러 명 앉아있었는데 이들은 전부 청란성지의 신경 장로들이었다. 장로들 중에는 석목도 익히 알고 있는 연꽃 장로와 남궁 장로도 있었고, 이들의 옆으로는 충오를 비롯한 요족 장군들이 앉아있었다.

다른 작은 종족의 족장들과 신경 강자들은 전부 이들 뒤로 앉아있어 대전을 가득 채웠다.

대전에 모인 각 종족 강자들은 서로 아는 사이가 많아 모두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충오는 백원왕을 따라다닐 때부터 대장로를 비롯한 이들과 아는 사이라 돌아서서 둘째 장로 백장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전에선 모든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전부 낮은 목소리로 웅성대 분위기가 매우 기이했다. 또한 전투를 앞두고서 긴장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옛 벗을 만난 희열도 함께 맴돌았다.

시끄럽게 재잘대던 채아는 조용히 석목의 어깨에 앉아 명라가 들고 있는 육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맛만 다셨다.

“여러분.”

석목이 대전을 훑어보며 말했다.

대전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더니 모두 석목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왜? 석 오라버니?”

이때, 명라가 큰 목소리로 석목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연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명라를 한 번 쳐다보았다.

명라가 멋쩍은 듯이 혀를 한번 내보이고는 주섬주섬 육포를 넣어두었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자 이렇게 모이라고 했습니다.”

“맹주님, 이제 천정과 결전을 치르실 건가요?”

천봉 일족의 조주명 장로가 입을 열었다.

실은 대전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연 무암성에 이렇게 막강한 전력이 모였으니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천정은 우리 천하 성역 근처의 몇몇 행성들을 완전히 삼켜버렸습니다. 때문에 천하 성역은 외로운 섬이 되었죠. 철저히 천정에 의해 고립이 되었어요.”

석목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천정을 무너트려야 해요. 우리는 꼭 결전을 치러야 합니다.”

안화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의 전력이 모두 집결되었으니 천정을 먼저 공격해야 합니다!”

방진도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이때, 다른 종족의 사람들도 들끓기 시작하며 사람들의 전의가 치솟았다.

“그러나 보름 전에 매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제준이 갑자기 사자를 보내 우리와 화합을 하자고 했죠.”

이때, 석목이 화두를 돌리며 말했다.

“네?”

“화합이요? 절대 안 됩니다!”

조주명이 말했다.

천봉 일족은 천정에 의해 거의 멸족을 당할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니 이제와 화합을 하는 건 조주명이 가장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천정과 화합을 하다니요? 결사반대합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조들의 혼이 아직 흩어지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죽어도 천정과 화합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옳습니다. 끝까지 싸울 겁니다!”

이어서 천하 요족들의 족장과 충오와 같은 요장들이 뿔뿔이 일어서서는 소리를 질렀다.

“맹주님, 천정 놈들이 하는 말은 절대 믿을 수 없어요. 절대 화합하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육규종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석 맹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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