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화. 순풍에 돛을 달다
대전은 분노로 들끓었고, 석목은 조용히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다가 두 손을 아래로 누르며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오랜 세월 동안 천정은 끊임없이 각 성역을 침공하며 인족, 마족, 요족을 비롯한 종족들을 해치고, 미양과 흑마, 천하 성역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반항을 하던 몇몇 세력들은 전부 천정에 의해 진압을 당했죠. 만약 막아내지 못했다면 멸족을 당하고 별이 무너지는 재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억만 생령이 죽거나 사라졌는데 이런 피맺힌 원한을 제가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감히 제가 화합을 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전부 마음을 가라앉히며 석목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
“천 년 전에 선대 족장이신 백공은 천하 요족들을 이끌고 천정에게 저항을 했으며 자폭을 하신 대가로 성역 대세계가 천 년 동안 숨을 돌릴 시간을 벌어다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힘을 합칠 수 있게 되었지요. 이제 그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천정과 쌓인 모든 원한을 한 번에 청산할 때가 왔죠. 성역 대세계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생령들을 위해, 전사한 백족의 영웅들을 위해, 그리고 백공 족장님을 비롯한 선열들을 위해서 우리는 필히 천정을 멸하고 만선을 죽여야 합니다!”
석목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이 내는 목소리는 마치 종소리와 같았으며 대전에 모인 사람들은 전의가 하늘까지 치솟았다.
“천정을 멸하고, 만선을 죽이자!”
대전에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목이 화합을 주장할까 걱정하고 있던 우두머리들이 전부 마음을 놓자 의사대전은 사기가 치솟았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사기가 하늘로 치솟을 때, 서유금은 흥분하는 대신 오히려 미간을 찌푸린 채 사색에 잠겼다.
석목은 서유금의 표정을 보고는 물었다.
“서 족장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석 맹주님, 천정이 갑자기 화합을 제안했는데, 그 이유를 물어봤나요?”
서유금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대전은 다시 조용해졌고, 시선이 석목에게로 몰렸다.
“천정은 제게 석 달 뒤에 남천문으로 가라고 했죠. 제준이 친히 저와 대화를 하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자세한 이유는 명백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준이 제게 무엇인가를 부탁하려는 듯한 눈치죠.”
석목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준이 석목에게 부탁하려는 건 아마 현문 계획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석목은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딱히 숨기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많은 일과 연루되어 많은 사람이 아는 건 그리 좋지 않았다.
“제준과 화합할 의향이 없으시다면 맹주님, 실례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육규종이 물었다.
“저는 이미 제준과 화합을 했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네?”
사람들은 다시 놀랐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제준이 어떤 요구를 할 건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허나 상대가 먼저 제안을 했으니 거절하는 것보다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하는 편이 좋은 방법이겠지요. 천정이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석목이 설명했다.
“석 맹주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역이용하실 건가요?”
육규종이 물었다.
“천정은 성의를 표하기 위해 화합하기 전까진 천하 성역으로 침입을 하지 않겠다고 보장했습니다. 그리고 화합을 하는 날, 아무나 데리고 천정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도 했죠. 저는 이 기회에 대군을 이끌고 천정으로 쳐들어갈 예정입니다.”
석목이 말했다.
“제준은 엉성한 사람이 아닐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대놓고 천정에 들어갈 수 있게 내버려 두지 않겠지요.”
지룡 일족의 족장 적안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허나 제준은 이미 천정에 들어오도록 하겠다고 말을 한 상태이니 우리가 대군을 이끌고 들어가는 걸 막을 이유가 없겠죠.”
석목이 말했다.
“만약 제준이 반대를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육규종이 물었다.
“만약 대군을 이끌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면 화합을 하지 않을 겁니다.”
석목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준이 이렇게 말하는 데에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겠지요. 우리는 아마 쉽게 천정에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침묵만 지키고 있던 대장로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백원 장군님을 따라다닐 때, 천정이 매우 특이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려면 동서남북 네 곳에 있는 천문을 통과해야만 하죠. 이 네 천문은 천정이 엄격하게 지키고 있는 장소라지요. 거길 뚫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천만합니다.”
충오가 말했다.
“충오가 한 말이 맞습니다. 천정의 네 천문은 지세가 아주 험해요. 거길 뚫는 건 절대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천정에 쳐들어가려면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석 맹주가 화합을 목적으로 대군을 이끌고 남천문으로 간다는 건 아주 흔하지 않은 기회일 겁니다.”
석목의 옆에 있던 속승이 입을 열었다.
“예전부터 천정의 천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 거긴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육규종이 물었다.
“천문, 말 그대로 천정의 문입니다. 천정이 하계의 여러 성역을 드나들 수 있는 통로이지요. 천문은 천정의 네 방향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수많은 전송 입구가 각 성역에 있습니다. 전송 입구들은 아주 은밀한 곳에 있으며 많은 병사들이 상시로 지키고 있지요. 천정의 대군은 전송 입구를 통해 각 성역으로 침입했습니다.”
속승 진인이 말했다.
“제준은 우리에게 남천문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남천문으로 향하는 전송 입구 중에 하나로 바로 우리 천하 성역의 강도성(江嶋星)에 있죠. 서천문으로 향하는 전송 입구는 미양 성역의 이진종에 있습니다. 또한 동천문으로 향하는 전송 입구는 흑마 성역과 오천(烏天) 성역의 접점인 오룡성(烏龍星)에 있죠. 마지막으로 북천문으로 향하는 전송 입구는 유충(幽蟲) 성역과 천하 성역의 접점인 명령성(螟蛉星)에 있습니다.”
석목이 말을 이어갔다.
“강도성?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육규종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거긴 요와 일족이 머물던 가장 큰 행성에 있습니다.”
조주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 맞아요! 천정의 남천문이 그곳에 있군요. 그러니 요와 일족이 가장 큰 참변을 당했지요. 요와 일족은 천정에게 공격을 받아 천하 성역의 곳곳에 흩어져 아직도 모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육규종이 주먹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천정은 우리에게 남천문으로 향하라고 했습니다. 거기에 덫을 놓고 단번에 우리를 잡으려는 속셈은 아닐까요?”
적안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적안 족장님이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그 부분이 걱정이군요. 때문에 우리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남천문으로 향하면 안 됩니다. 천정은 아마 남천문에 수많은 병력을 배치해 두었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네 종족의 대군을 이끌고 남천문으로 가서 제준과 화합을 할 겁니다. 대장로님은 세 종족의 대군과 충오 요장의 요족 병사를 이끌고 명령성의 전송진 입구에 잠복해 있다가 기회를 틈타 북천문을 공격하시죠.”
석목이 말했다.
“그리고 저는 청란성지의 대군을 이끌고 미양 성역의 이진종으로 쳐들어가 그곳에 있는 전송 입구를 장악할 겁니다.”
속승이 말을 이어갔다.
“석 맹주가 남천문으로 향할 때, 저는 흑마족과 사령 대군을 이끌고 오룡성의 전송 입구에 잠복해있을 겁니다. 그리고 동천문을 공격하지요.”
연나가 말을 이었다.
“석 맹주님, 이렇게 되면 병력을 전부 분산시키는 꼴이 아닙니까? 정면으로 맞서는 것보다 불리하지는 않을까요?”
적안이 물었다.
“천정의 실력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정면으로 공격을 하면 승산이 높지 않죠. 하지만 이 기회에 병력을 분신시킨다면 임기응변으로 다양한 책략을 세울 수 있습니다. 또한 받는 압박을 나눠 적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지요.
그리고 담판을 짓는 날, 제가 만약 대군을 이끌고 순조롭게 남천문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세 곳에 모인 대군은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면 됩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제가 즉각 전신을 보낼 테니 우리 대군은 네 곳에서 침공을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함께 천정을 공격하여 결전을 치릅시다.”
석목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 * *
천정의 한려궁(寒儷宮).
하얀 눈이 뒤덮인 산에 궁전이 하나 서 있었다. 그리고 궁전은 하얀 옥으로 만들어져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려궁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한적한 작은 정자에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소녀는 두 발이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났는데 신발을 신지 않아 하얀 피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소녀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몸에서 보일 듯 말듯 하얀색을 뿜어냈다. 또한 피어오르는 안개 덩어리 때문에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지만 경국지색인 자태가 윤곽으로 드러났다.
소녀는 서문설이었다.
서문설은 입을 살짝 벌리고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러자 얼음의 기운이 주변에서 모여들어 안개 속으로 스며들어서는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작은 정자 너머에서 금소채가 바른 자세로 서서 말없이 서문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금소채의 눈동자 사이로 복잡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서문설이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서문설이 손가락으로 난화지를 짚자 그녀의 몸에서 투명한 빛이 뿜어져 나와 빠르게 주변으로 퍼졌다.
하얀빛이 스친 곳에는 두꺼운 얼음이 얼어붙었고, 공기 속에는 하얀 얼음꽃이 날아다녔다.
흩날리는 얼음꽃 속에 묻힌 은색 옷을 두른 굴곡진 몸매는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서문설이 주문을 외우며 법결을 줄줄이 날렸다.
그러자 커다란 얼음꽃들이 마치 서문설에게 통제를 받는 듯이 잇달아 맴돌며 그녀에게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얼음꽃들은 위아래로 교차하였다가 일고여덟 장 정도 되는 하얀 얼음꽃 영역을 이루었다.
서문설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서문설이 다시 손을 흔들어 법결을 날리자 하얀 영역이 서서히 사라졌다.
짝, 짝, 짝!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와 그곳을 바라보니 금소채가 미소를 머금고 손뼉을 치며 서문설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설아, 실력이 날로 늘고 있네. 신경 중기에 오른 것으로도 모자라 영역의 현묘함 마저 깨우쳤으니, 부러워.”
금소채가 말했다.
“후후, 제준 어르신이 하사해주신 빙백선실(冰魄仙實) 덕분에 단번에 영역의 현묘함을 깨우칠 수 있었지.”
서문설이 웃으며 말했다.
“빙백선실은 상계에서 전해진 보물이잖아. 제준이 네게 아낌없이 주는 걸 보니 너를 중히 여기는 것 같군.”
금소채는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서문설이 미소를 지었다.
“너 정말 천정에서 계속 제준의 부하로 남을 셈이야? 그 녀석은 내버려두고?”
금소채가 물었다.
서문설은 얼굴이 싸늘해졌다.
서문설은 다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 후회하지 않으려고.”
그 말을 들은 금소채는 아주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왜? 밖에 무슨 일이 생겼어?”
서문설이 물었다.
“그래, 네가 폐관하고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생겼어. 석목은 이미 천하 성역을 모두 되찾았고, 다른 성역의 세력들까지 모았어. 이제 석목은 엄연히 한 세계를 다스리는 패주나 다름이 없어. 천하 성역의 백족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석목이야.”
금소채가 말했다.
서문설은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가 사라졌다.
“아, 그게 어때서?”
“제준 어르신이 석목을 아주 걱정하는 것 같더라고. 화합을 요청한 것 같던데?”
금소채가 계속해서 말했다.
“화합?”
그 말을 들은 서문설은 멈칫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천정이 각 성역마다 쌓은 원한이 매우 깊어 서문설도 그 복잡한 관계를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화합의 여지가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