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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842화 (842/916)

842화. 쓸만한 조건

“맞아, 화합.”

금소채는 서문설이 의아하게 여기는 걸 알아차리고는 다시 확신에 찬 투로 말했다.

“아, 그럼 석목은 뭐라고 했어? 그렇게 하자고 했어?”

서문설은 찌푸렸던 미간을 펼치며 침묵하다가 물었다.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나도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화합을 하겠다고 한 것 같더라고. 그렇지 않으면 제준의 성격상 석목을 그냥 보낼 리 없잖아?”

금소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서문설은 믿기지 않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서서 맨발로 작은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거렸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화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둘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가장 좋은 것이겠지?”

금소채가 서문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문설은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 모든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서문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때, 허공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와 서문설과 금소채가 동시에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빛 한 갈래가 먼 곳에서 날아와 작은 정자 앞에 멈춰 섰다. 이어서 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서문 선장님, 제준 어르신이 천제궁으로 모시라고 했습니다.”

남자는 서문설을 향해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서문설은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았다. 바로 가마.”

남자는 대답을 하고는 빛으로 변하여 날아갔다.

“제준이 왜 갑자기 너를 보자고 하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금소채는 사라져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서문설에게 물었다.

“가보면 알겠지. 아, 이곳에서 기다려.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서문설이 금소채에게 말을 하고는 하얀빛으로 변하여 먼 곳으로 날아갔다.

* * *

잠시 후에 서문설이 금빛 찬란한 궁전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궁전에 걸린 편액을 올려다보았다.

궁전은 금빛 찬란했지만 서문설은 마치 궁전의 입구가 크게 벌어져 자신을 삼켜버리려고 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서문설은 몸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한 번 만지고는 정문으로 걸어갔다.

대전 안은 매우 넓어 옥과 금이 잔뜩 박힌 기둥이 서 있었고, 양쪽으로 뻗은 기둥은 안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끝에는 반원 모양 석대가 자리했고, 그 위에 넓은 주좌가 하나 놓여있었다.

주좌 앞에 키가 훤칠한 그림자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그림자는 고개를 돌려 눈에 빛을 번쩍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서문설은 뜨거운 시선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비록 처음으로 제준의 시선을 마주하는 건 아니었지만 제준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마치 서문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존상님, 인사드립니다.”

서문설이 인사를 올렸다.

제준은 서문설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련 경지가 많이 올랐군. 네게 빙백선실은 준 건 옳은 결정이었던 것 같구나.”

“제가 오늘날의 성과를 이룬 건 전부 제준 어르신 덕분이죠.”

서문설이 감격스러운 투로 말했다.

제준이 후후 웃었다.

“십이 선장은 내 적계부장들이다. 천정의 기둥과도 같은 자들이지. 그러니 내가 가진 자원이라면 당연히 너희에게 쏟아야겠지.”

“존상님,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헌데 존상님, 무슨 일로 저를 소환하셨습니까? 저는 아직 실력이 부족하지만 맡겨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서문설이 말했다.

제준은 눈에 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선 앉거라. 천천히 얘기하자.”

서문설이 대답을 하고는 앞으로 다가가 주좌 옆에 놓인 자리에 앉았다.

“서문 선장과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자 한다.”

제준이 서문설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존상님, 지시만 내려주십시오.”

서문설이 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다른 성역들은, 특히 천하 성역의 미천 연합을 위주로 우리 천정과 싸울 연합을 맺었다.”

제준이 한숨을 내뱉었다.

“네,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허나 녀석들은 전부 별 볼 일 없는 놈들이라 걱정할 필요는 없으실 것 같군요. 존상님, 혹시 어떻게 대처하실 계획입니까?”

서문설이 가볍게 대답하고는 되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지. 연합에는 대단한 자들이 있구나. 특히 내 원수인 두 명도 그곳에 있구나. 이건 절대 간과할 수 없단다. 그리하여 나는 미천 연합의 맹주인 석목에게 화합을 하자고 말했다.”

제준이 말했다.

서문설은 석목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석목이라는 녀석은 아주 비범한 놈이야. 수련 경지가 이미 신경 후기에 도달했더구나. 미천 연합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니 미천 연합을 해치우려면 우선 석목부터 잡아야 해.”

제준이 말했다.

“네.”

서문설은 머리가 매우 복잡해져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알기로 너와 석목은 옛 벗이더구나. 그리고 그놈이 너를 아주 좋아한다고 들었지. 이번 일은 천정이 세운 계획 중에 매우 중요해. 그러니 꼭 성사시켜야만 한단다. 하여 나는 네가 희생을 좀 했으면 하는데.”

제준이 서문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서문설은 다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존상님, 어떤 지시인지 말씀해주십시오.”

서문설이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미 많은 보물을 준비해 두었단다. 이번 담판을 지을 때 쓸만한 조건으로 내걸 예정이지. 허나 석목은 이미 신경 후기에 올랐으니 보물에 그리 매력을 느끼진 않을 게다. 그러니 나는 그놈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물건이 필요하구나.”

제준이 서문설을 바라보며 웃었다.

“존상님의 뜻은……”

서문설이 멈칫했다.

“그래, 그 물건은 바로 너란다.”

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문설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성마저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안색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서문설이 곧바로 화를 가라앉히자 끝없는 실망만이 남았다.

서문설은 모든 걸 포기하고 천정에 들어왔다. 하지만 제준이 보기에 서문설은 한낱 물건에 불과했다.

“걱정 마라. 이 모든 건 임시방편이니. 네 수련을 향한 욕심은 나도 익히 잘 알고 있단다. 너는 내게 특별히 보살핌을 받았던 조극을 아주 부러워했지? 나도 다 알고 있단다. 네가 만약 나를 도와 미천 연합을 해치운다면 현계지문을 열었을 때, 너는 다시 내게로 돌아올 수 있단다. 나는 너를 제자로 받아들여 함께 현계지문으로 들어가 상계로 오를 게다!”

제준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서문설은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간신히 대답을 내뱉었다.

“좋아, 역시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어. 화합을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동안 한려궁에서 제대로 휴식을 취하거라.”

서문설이 대답을 하자 제준은 매우 기뻐했다.

“네.”

서문설은 머리가 복잡해져 어떻게 천제궁에서 나와 다시 한려궁으로 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그제야 서문설은 정신을 조금 차렸다.

“설아, 안색이 좋지 않아. 제준 어르신이 무슨 일로 부르신 거야?”

금소채가 서문설에게로 다가오며 물었다.

서문설은 기분이 바닥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한려궁 뒤에 솟은 눈이 뒤덮인 산으로 향했다.

눈에 들어오는건 온통 하얀 눈이라 마치 천지가 하나로 이어진 것 같았다.

산봉우리에 쌓인 하얗고 순수한 눈은 서문설이 가장 좋아했던 풍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문설의 눈엔 더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설아, 대체 무슨 일이야?”

금소채가 서문설을 따라오며 물었다.

서문설이 가볍게 한숨을 내뱉고는 천제궁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뭐! 제준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고?”

금소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준은 원래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해왔으니 놀랄 것도 없지요!”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금소채가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사람과 가까운 곳에서 파동이 일며 풍리가 나타났다.

“풍리! 네가 이곳에는 웬일이야! 우리의 대화를 엿듣다니!”

서문설이 싸늘한 얼굴을 내비치며 뼈 시린 기운을 풍겼다.

“선자님, 화내지 마십시오. 저는 때마침 이곳을 지나고 있었던 길입니다. 의도한 건 아녜요.”

풍리가 얼굴을 붉히며 서문설을 바라보면서 사죄했다.

서문설은 풍리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풍리 선장님, 이렇게 자주 오셔도 소용이 없다니까요. 설아는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포기하세요.”

금소채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풍리는 멈칫하다가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변하였다.

“소채,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풍리 선장님, 별다른 일이 없으시면 빨리 이곳을 떠나세요. 저는 무작정 찾아오는 사람을 환영하지 않으니!”

서문설은 금소채에게 한 마디를 하고는 다시 풍리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풍리의 얼굴에 멋쩍은 표정이 스쳤다.

이어서 풍리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결계를 펼쳐 세 사람을 안으로 드리웠다.

“뭐 하는 거야?”

금소채가 물었다.

서문설도 눈살을 찌푸렸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풍리가 정색하며 말했다.

“서문 선장님 화내지 마십시오. 무례를 범하긴 했으나 저는 작별을 하러왔습니다. 허나 지금은 함께 천정을 떠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서문설이 깜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천정을 떠나다니? 그건 배신이야!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아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잡아 존상님에게 보낼 테니!”

서문설이 말을 하며 하얀 안개를 내뿜었다. 그러자 안개가 하얀 촉수로 변하여 풍리에게로 다가왔다.

“제준은 충성할 가치가 없는 놈이지요! 당신과 나, 그리고 선장들은 제준의 눈에서는 그저 도구에 불과해요. 비록 우리가 필요할 때, 달콤한 것들을 던져 주지만 우리가 필요 없어지면 망설이지도 않고 버릴 테죠! 조극이 맞은 결말은 우리가 모두 목격한 사실이고요.”

풍리는 하얀 촉수를 보지 못한 것처럼 차분한 투로 말하고 있었다.

서문설은 얼굴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풍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말을 지껄이다니. 조극은 구전현공을 수련하다가 문제가 생겨서 죽었어. 제준 어르신 때문이 아냐.”

“제준이 조극에게 구전현공을 수련하라고 한 건 그를 이용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제준이 왜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온갖 소중한 자원을 쓰면서까지 조극을 키우고 구전현공을 수련하라고 했는지 압니까?”

풍리가 물었다.

“조극은 제준 존상님의 직전제자니 당연히 특별한 대우를 받았겠지.”

서문설이 말했다.

“직전제자? 후후,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풍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이지?”

금소채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물었다.

서문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모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우리 말고 모든 선장들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죠. 천 년 전에 벌어진 격전에서 천정의 십이 선장들 중에 네 명이 전사했습니다. 그중에 여섯 번째 선장인 종목(縱目) 선장은 백공과 다투다가 죽어버렸죠. 그때 제준은 종목 선장의 정혈을 뽑아 백공의 정혈과 합쳐 조극에게 불어넣었습니다.

제준이 그렇게 한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현계지문을 열기 위해서지요. 제준은 구전현공을 대성한 사람을 써서 진안을 만들어야 했어요. 다시 말해, 조극이 구전현공을 성공적으로 수련했다고 해도 그 끝이 처참했을 거라는 점이죠.”

풍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서문설과 금소채는 풍리가 하는 말을 듣고선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이 모든 내용을 처음으로 들었다.

조극은 제준의 직전제자로 천정에서 지위가 매우 높아 평범한 선장들보다 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때문에 천정 사람들은 전부 조극을 제준의 후계자로 대접했으며 제준 또한 남들에게 그렇게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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