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4화. 오해
“조현기? 그년은 조극이 천봉 일족에 심어둔 첩자잖아? 설아, 네가 그년을 죽였어?”
금소채가 의아한 듯이 말했다.
서문설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첩자!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종수는 어리둥절했다.
“아, 그렇군. 이 단순한 녀석, 아직도 모르겠어? 그럼 내가 사실대로 말해주지. 조현기는 절대 만만한 여자가 아니야. 걔는 이미 암암리에 천정에 빌붙었어. 그래서 조극과 결탁해 성공적으로 천봉 일족을 멸망에 이르게 만들었지. 우리 설아가 조현기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너도 아마 진즉에 천정의 손에 넘어갔을 거야. 그리고 석목을 위협할 도구로 쓰였겠지?”
금소채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종수는 입을 살짝 벌리고는 한참 동안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반박을 하려고 했지만 갑자기 천봉 일족이 멸족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광경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의문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모든 정황이 금소채가 말한 것과 맞아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종수의 스승인 조령롱도 세 사람이 천봉 일족에서 도망쳐 나오는 동안 천정 놈들이 쫓아와 녀석들과 싸우다가 죽어버렸다.
종수 일행이 도망가던 길은 그들 셋만 지나갔고, 게다가 그 길은 매우 비밀스러운 길이라 누군가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면 천정에서 절대 쫓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조현기는 정말로 두 사람이 한 말처럼 천정의 첩자였던 걸까?
종수는 머리가 복잡해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문설은 검은 철패를 하나 꺼내 들고는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철패가 검은 창살로 스며들었다.
쩍!
검은 창살에 문이 하나 나타나더니 천천히 열렸다.
“나와.”
서문설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종수는 제자리에 서서 걸어 나오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야? 나를 천정으로 데려가서 석 오라버니를 협박하려는 거라면 나는 여기서 죽어버릴 거야.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어!”
종수가 머리를 손으로 가져다 대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서문설이 종수를 바라보자 종수의 눈이 아주 맑은 걸 보니 그녀가 내뱉는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진심이었다.
금소채는 팔짱을 끼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참 후에 서문설이 막연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아, 석목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
금소채가 눈썹을 치켜뜨며 한심한 표정을 지은 후에 말했다.
종수는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금소채는 눈에 교활한 빛이 스쳤다.
“그래, 제준 어르신의 명을 받고 너를 천정으로 데려가 석목을 협박해 천정으로 투항시킬 작정이야.”
그러자 종수는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눈에 참담한 빛을 내비쳤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이마를 내리쳤다.
이때, 서문설이 눈살을 찌푸리며 막았다.
하얀빛이 종수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종수의 몸은 하얀빛으로 드리우더니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리고 종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서문설이 금소채를 노려보았다.
금소채가 혀를 내두르며 눈을 희번덕였다.
“저 여자가 말하는 건 믿지 마. 우리는 이제 천정의 사람들이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서문설이 종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종수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서문설이 다시 종수의 몸을 짚자 그녀에게 드리웠던 하얀빛이 사라져버렸다.
“석목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니. 그러니까 그 녀석이 너를 이렇게 좋아하는구나.”
금소채가 한숨을 내뱉으며 아쉬운 듯이 말했다.
종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눈만 껌뻑거리는 게 이 상황을 믿어야 할지 말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이제 천정에서 벗어났어. 다시는 천정과 성역들의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니, 너도 가.”
서문설은 마지막으로 종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조금 전에는 미안했어. 인연이 된다면 또 보자.”
금소채가 종수에게 미안하다는 듯이 웃어 보이고는 서문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설아, 너는 마음이 너무 따뜻해. 연적을 감옥에서 빼내주다니. 어이고, 마음도 넓어라. 역시 내가 선택한 여자야.”
금소채가 서문설의 뒤를 따라가며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귀찮게 하지 마!”
서문설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종수가 천천히 일어서서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더니 감옥에서 걸어 나오려고 할 때였다.
이때, 굉음이 울려 퍼지며 산봉우리가 흔들렸다.
두 갈래 그림자가 통로에서 튕겨져 날아와 다시 검은 창살에 부딪쳤다.
금소채는 피를 뿜었으나 서문설은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서문설의 얼굴은 조금 하얗게 질렸다.
“후후, 역시 존상님께서 하신 예측이 맞았다니까! 서문설은 믿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시더니, 일부러 도망치게 한 다음에 비밀 석실이 있는 곳을 찾게 하셨군.”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실 속에서 빛을 반짝이며 쌍검을 맨 얼굴에 음양 무늬가 그려진 남자가 나타났다.
“다섯 번째 선장!”
서문설은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보자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그림자가 연이어 번쩍이더니 또 다른 그림자 네 개가 나타났는데 모두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네 명이었다.
이들은 전부 신경 강자인 고만족들 같았다.
“네가 종수인가? 석목의 짝. 역시 서문설이 널 숨겨두었군. 너를 잡아가면 석목이 존상님의 명령을 따르겠어!”
다섯 번째 선장이 종수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종수는 안색이 변하더니 서문설과 금소채를 보고는 손을 들어올렸다.
“흥!”
다섯 번째 선장이 콧방귀를 뀌더니 흑백 빛을 반짝이며 영역을 석실에 드리웠다.
영역으로 드리워진 종수는 몸이 굳어버려 움직이지 못했다.
서문설과 금소채도 영역 속으로 드리워져 모두 종수처럼 영역의 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서문설은 소리를 치며 하얀빛을 퍼뜨렸다. 그렇게 서문설은 하얀 영역을 펼쳐 간신히 흑백 영역과 거리를 두었다.
다섯 번째 선장은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가 이내 경멸하는 듯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짚었다.
퍽!
흑백 검의 기운이 선장의 손가락 끝에서 날아 나와 빠른 속도로 서문설의 영해를 찔렀다.
검기가 스친 허공은 전부 부서져버렸다.
서문설은 깜짝 놀랐지만 흑백 영역을 막아내느라 힘을 전부 써버려 피할 수도 없었다.
펑!
다섯 번째 선장의 안색이 변하자 서문설도 깜짝 놀랐다.
서문설의 앞에 뚱뚱한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는데 그는 노란 승복을 입은 서른 살 정도 되는 스님이었다.
* * *
한 달 뒤.
이진종의 극양봉과 극음봉 상공에서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그러자 파랗던 하늘을 누군가가 손으로 찢어버린 듯이 커다란 틈이 하나 벌어졌다.
틈 사이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속승 진인과 여러 청란성지의 장로들이 나타났다.
“천문의 입구는 이진종 어디에 있습니까? 찾을 수가 없군요.”
남궁 장로가 주변을 훑어보며 물었다.
“극양봉과 극음봉, 이화봉, 그리고 진뢰봉 사이에 자리한 구역이 전송 입구가 있는 곳이야. 평소에는 상고 진법으로 드리워져 너희는 잘 보이지 않을 테지. 우리가 공격을 해야 할 때, 내가 법보를 쓰면 보이게 될 게다.”
속승이 말했다.
그리고 속승은 투명한 구슬을 꺼냈는데 구슬 속에는 미세한 은색 전함이 수십 척 들어있어 마치 조형물 같았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함 위에 푸른 옷을 입은 청란성지의 제자들이 가득 서 있었다.
속승 진인은 구슬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거두어들이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찢어졌던 틈은 이내 사라져버렸고, 모든 사람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 * *
이 시각, 흑마 성역의 변두리.
검은 전함 수십 척이 망망한 별바다에 자리한 광활하기 그지없는 금색 광막 앞에 조용히 떠 있었다.
금색 광막은 흑마 성역과 오천 성역을 나누는 벽이었다.
가장 앞에 멈춰 있는 전함의 상공에는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연나와 마장들이었다.
연나 일행 앞에 놓인 옅은 금색 광막 위에는 족히 수백 장이나 되는 긴 틈이 벌어져 있었고, 균열 주변에는 복잡한 검은 부문들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석무애를 비롯한 일곱 마장들이 끊임없이 법결을 짚으며 검은 부문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언니, 조금 있으면 이 공간 균열이 더욱 큰 공간으로 벌어져 전함 부대가 전부 오천 성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봉희는 끊임없이 법결을 날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오천 성역에 들어가면 곧 오룡성으로 갈 수 있겠지.”
연나가 말을 하며 끊임없이 벌어진 틈 사이를 뚫고선 오룡성을 바라보았다.
오룡성은 크기가 매우 작았고, 심지어 남해성보다 작았다. 그리고 별을 둘러싼 고리 모양 돌 궤도는 마치 인위적으로 만든 고리 같았다.
연나는 별을 감싼 고리들이 천문을 여는 진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고리 모양 돌 궤도 밖에 자리한 별하늘에는 커다란 섬 모양 운석들이 떠다녔다. 그리고 운석 위로는 검은 보루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병력들이 주둔하고 있는 요새일 터였다.
* * *
또 보름이 흘렀다.
유충 성역.
명령성 위에 펼쳐진 광활한 초원 위에는 구름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하얀 석탑이 있었다. 그리고 석탑은 곳곳에 현묘한 부문들이 새겨져 있었다.
네 석탑으로 둘러싸인 중간 구역에는 길이가 몇 리나 되는 하얀 석대가 놓여있었는데 석대는 높이가 반 척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석대 위에도 마찬가지로 복잡한 부문들이 새겨져있었다.
석탑 주변에는 둥그런 건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은색 갑옷을 입은 천정의 장수들이 그 사이를 돌아다니며 순찰을 했다.
북쪽 방향에 솟은 석탑 밖, 높이가 열 장도 채 되지 않는 언덕 위에는 손바닥만 한 검은 두꺼비가 누워있었다. 그런데 두꺼비의 머리에는 노랗고 단단한 비늘이 자라나있는 게 매우 기이했다.
더 이상한 점은 검은 두꺼비의 배가 꿀렁이자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는 점이었다.
“충오 도우님, 이 신통은 정말 대단하군요. 몸속에 공간을 만들어 내다니. 그리고 이렇게 많은 대군이 이 공간 속에 숨을 수도 있다니요. 정말 대단합니다.”
대장로의 목소리가 검은 두꺼비의 뱃속에서 울려 퍼졌다.
“대장로님, 과찬입니다. 이 신통은 작전을 수행할 땐 아무 쓸모가 없어요. 이때나 조금 쓸 수 있지요.”
충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에 다른 두 곳에 모인 대군들이 이미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미 준비를 마쳤다고 하니, 이제 석 맹주님이 내리실 명령만 기다리면 됩니다.”
대장로가 다시 말했다.
* * *
천하 성역의 변두리.
어둡고 큰 행성 밖에 두꺼운 회색 성운이 드리운 채 고요하게 별하늘에 떠 있었다.
회색 성운 속에서 둥그런 소용돌이가 줄줄이 연결되어 기이한 광경을 펼쳐놓았다.
행성 주변 곳곳에는 회색 운석 파편이 떠다녔다.
운석 속에는 크고 작은 산들이 촘촘하게 널려있었다.
저 멀리 별하늘에서 빛이 빠르게 날아와 행성과 가까워졌을 때, 천천히 멈춰 섰다.
빛 속에는 금색 전함이 수십 척 있었다.
가장 앞에 자리한 전함의 함교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푸른 옷을 입은 청년인 석목이었다.
채아가 고개를 움츠리고는 석목의 어깨에 앉아 지루한 듯이 별바다를 둘러보았다.
“육 족장님, 이 강도성 밖에는 왜 이렇게 운석 파편들이 많이 날아다니죠?”
석목은 운석 파편이 층층이 드리운 행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석 맹주님, 강도성 근처에는 자성(子星)이 하나있었죠. 허나 천 년 전에 천정이 침입해 불타버렸습니다. 그리고 천정이 별 속에 담긴 성핵을 뽑아 완전히 무너졌어요.”
석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의 뒤에 육규종과 함께 서 있던 사람들은 전부 심각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짓눌린 분위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