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7화. 천문에 들어가다
“어떻게 이런……”
이원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양이 동시에 파괴됐으니 이제 누가 누구를 구할 수 있지?”
석목이 주먹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이보와 이원이 내뿜는 광포한 혈기 때문에 사방이 들끓는 것 같았다. 또한 쌍둥이는 몸이 곧 터져버릴 것처럼 흑백 빛을 미친 듯이 번쩍였다. 이때, 이보와 이원이 번쩍이며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수십 장 밖에서 나타났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천정의 대군은 이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했으나 다시 앞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에 이원이 멈추라고 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멈춰서기는 했지만 천정의 대군은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진을 펼치고 대기했으므로 천정의 대군은 곧바로 이원과 이보의 등 뒤까지 다가왔다.
천정의 전함들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신경 강자 여러 명이 날아 나와 이원과 이보의 앞을 막아섰다.
“저놈들이 단체로 몰려들고 있어. 우리 빨리 석두를 도와줘야 해.”
채아가 방진의 어깨에 서서 소매를 걷어 올리는 자세를 흉내내며 소리를 질렀다.
“공격!”
육규종이 소리를 질렀다.
미천 연합의 전함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모두 빠른 속도로 앞으로 다가가 석목의 뒤에 멈춰 섰다.
육규종을 비롯한 신경 강자들도 석목의 뒤로 날아왔다.
두 전함 부대는 이제 천 장 정도만을 사이에 두고 대치해 대전이 곧 벌어질 것만 같았다.
“보아하니 제준은 화합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군. 그렇다면 우리도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지.”
석목이 뒷짐을 지고 서서는 천정의 대군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 말을 들은 육규종을 비롯한 강자들은 눈에 전의를 불태우며 안색을 굳혔다.
조주명은 두 주먹을 꽉 쥐고는 화가 난 눈빛을 내뿜었다.
방진은 긴장한 듯이 얼굴이 살짝 굳어있었다.
채아는 방진의 어깨에서 날아와 다시 석목의 어깨에 앉았다. 그리고 채아는 천정의 전함을 바라보았다.
미천 연합의 전함들에 서 있던 각 종족에서 온 전사들은 전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무기를 치켜들고는 석목이 명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석목이 주먹을 펼쳤다가 쥐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 끼운 하얀 반지에서 빛이 반짝였으며 작은 진법 하나가 석목의 손에 나타났다.
석목이 다시 주먹을 쥐기만 하면 전면 공격을 시작한다는 명령이 세 천문 앞에 있는 대군에게로 전해질 터였다. 그렇다면 천정과 치를 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었다.
“석 맹주님, 존상님께서 안으로 들어오시라 하십니다.”
이때,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가 천정의 전함 뒤편에서부터 흘러와 뚜렷하게 석목을 비롯한 이들의 귓속으로 전해졌다.
석목이 다시 손을 펴자 작은 진법이 흩어져버렸다.
석목이 실눈을 뜨고 천정의 전함들이 모인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서 하얀 그림자 하나가 강도성 방향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뚜렷한 윤기가 도는 청년은 등 뒤에 하얀 선검 한 자루를 맨 게 검선의 기운을 풍겼다.
청년은 빠르게 다가오기는커녕 옷자락을 흩날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석목에게로 걸어왔다.
청년의 발걸음은 그리 크지 않았고, 빠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움직임이 매우 기이해 두어 번 만에 석목의 앞까지 다가왔다.
“석 맹주님, 음양을 다루는 두 선장은 성격이 조금 거친 편입니다. 일부러 무례를 범한 건 아니니 제가 사죄하겠습니다. 맹주님께선 마음에 두지 마시고 우선 큰일부터 논의하시죠.”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은 석목을 향해 인사를 올리고는 천천히 말했다.
청년이 보여주는 태도는 매우 성의 있었고, 말투도 겸손하여 석목은 흠칫 놀랐다. 게다가 더욱더 놀라운 점은 청년이 풍기는 기운 때문이었다.
청년이 짓는 표정은 매우 부드러운데다가 몸에서 풍기는 기운도 크게 특별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청년이 지닌 선검에서 막강한 봉인된 힘이 느껴졌다.
석목의 옆에 서 있던 분신은 뚫어져라 봉인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눈에 드리운 살기가 점점 짙어졌다.
분신이 들고 있는 단검도 이상한 반응을 보이며 가볍게 흔들렸다.
청년이 나타난 후로 이원과 이보는 입을 다문 채 두려운 기색을 내비쳤다.
“당신은 십이 선장들 중에 몇 번째입니까?”
석목이 청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은파(殷破)라고 합니다. 십이 선장들 중에 두 번째죠.”
하얀 옷을 입은 청년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시선을 석목의 분신에게로 돌리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걸 보니 분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순간, 석목은 청년이 은근히 피비린내가 나는 기운을 풍기는 걸 알아차렸는데 이건 분신이 풍기는 기운과 매우 흡사했다.
“제준이 날 얕보는군.”
석목은 비웃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은파는 후후 웃으며 대답했다.
“석 맹주님,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존상님께선 바쁜 일이 있어 맹주님과 논의할 일을 두 선장들에게 전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전송 입구를 지키는 직책을 맡고 있어 소식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여 오해가 생긴 것 같군요. 저는 존상님께 명을 받고 석 맹주님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그러니 동행하신 분들과 함께 남천문으로 향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대군을 이끌고 남천문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말씀이지요?”
석목이 물었다.
“존상님께서 석 맹주님과 이미 한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데리고 들어오라고 하셨죠. 그런데 어찌 저희가 감히 말리겠습니까? 존상님은 기다리신지 오랩니다. 맹주님, 안쪽으로 들어가시지요!”
은파가 부드러운 웃음을 보이며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화라락!
천정의 대군이 바른 자세로 섰다가 다시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드넓은 통로를 만들자 강도성으로 향하는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은 눈살을 찌푸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석 맹주님, 들어오십시오.”
은파가 다시 환한 얼굴로 말했다.
석목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아무 말 없이 손을 흔들며 가장 앞에서 날아갔다.
석목의 뒤로 육규종을 비롯한 이들이 뿔뿔이 따라갔고, 잠깐 사이에 삼십 만 명이나 되는 대군이 커다란 소용돌이 앞에 나타났다.
커다란 소용돌이는 아주 특별한 전송 통로라 통로에서 성석과 매우 흡사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천정이 성역들을 침범하며 수만에서 수십만 명에 이르는 대군을 내보낼 때, 아마도 이 전송 통로를 이용했을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공간이 한참 동안 일그러지다가 석목은 커다란 산봉우리 꼭대기에 나타났다.
* * *
등 뒤에 열린 커다란 공간 소용돌이가 계속해서 천천히 움직였다.
산꼭대기 위에는 드넓은 광장이 놓여있었는데 광장에는 높은 건물들이 가득 서 있어 꼭 군영과도 같았다.
광장 근처에는 천정의 전함들이 수십 척이나 둥둥 떠 있었다.
석목은 눈에 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천정의 대군들은 경계만 할 뿐, 별다른 덫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소용돌이가 계속해서 파동을 일으키는 동안 미천 연합 대군이 줄줄이 날아 들어왔다.
석목이 이끄는 삼십만 대군은 잠깐 사이에 전부 광장에 모였다.
은파도 소용돌이 속에서 날아 나와 석목의 옆에 멈춰 섰다.
“석 맹주님, 따라오세요.”
은파가 가볍게 웃으며 날아갔다.
석목이 은파와 나란히 서서 날아갔다.
육규종을 비롯한 이들도 다급하게 대군을 이끌고 쫓아왔다.
날아가는 동안, 석목은 신식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맑은 하늘에 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푸른 산봉우리가 즐비하여 들끓는 구름까지 보였다.
들끓는 구름들은 평범한 안개가 아니었는데 그것들은 천지 영기가 매우 짙은 곳에만 나타나는 영무(靈霧)였다.
산봉우리 사이에는 크고 작은 폭포가 걸려있었는데 폭포들은 모두 짙은 영기를 머금고 있는 영폭이었다.
짐승들이 짖는 소리와 새들이 우는 소리가 산봉우리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석목은 수많은 동천복지를 본 적이 있지만 이곳을 따라올 만한 곳은 없어 눈에 빛을 번쩍였다.
여기에 흐르는 천지의 영기는 청란성지에서 가장 높은 단계였던 천계 공간보다 몇 배나 더 짙었다.
이런 영지라면 인재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 천정이 막강한 전력을 지닌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석 맹주님, 여긴 어떻습니까? 눈에 좀 들어오시나요?”
은파가 석목의 모습을 살피더니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세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동천복지군요. 허나 여길 화려하고 번영케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행성들이 메마르고 파멸에 이르는 대가를 치렀을까요?”
석목이 담담하게 말했다.
웃던 은파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멋쩍은 듯이 웃은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뒤에서 따라오는 대군을 생각하여 석목은 빠르게 날아가지 않았다.
은파도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췄다.
반시진 뒤에 일행들은 산맥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이때, 굵직한 옥기둥 두 개가 이들의 눈앞에 나타났는데 그것들은 마치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옥기둥 사이에는 푸른 편액이 하나 걸려있었으며 편액에는 ‘남천문’이라는 세 글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화려한 빛이 남천문에서 뿜어져 나와 공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석 맹주님, 여기가 천정의 남천문입니다. 들어가시죠.”
은파가 말을 마치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석목은 전혀 표정이 달라지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은 쿵 내려앉았다.
여긴 석목에게 매우 익숙한 느낌을 줘 마치 어디서 본 것만 같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백원왕의 꿈속에서 본 장소 같았다.
석목은 생각을 하며 아래로 내려왔다.
남천문 아래에 금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과 장수들이 촘촘하게 두 줄로 서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다른 무기를 들고 있었다.
미모가 아리따운 궁녀들도 나란히 서서 악기를 연주해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유유히 흐르는 안개가 더해지자 그 광경은 훨씬 더 웅장해 보였다.
“석 맹주님, 환영합니다!”
석목 일행이 전부 내려오자 병사들과 장수들이 일제히 외쳐 그 소리가 백 리까지 전해지더니 허공에서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석목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석목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이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빼곡하게 모인 대군들이 곧바로 석목의 뒤를 따라갔고, 천정의 대군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천천히 남천문으로 들어갔다.
남천문을 지나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다시 바뀌어 웅장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건물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건물들은 전부 금빛을 뿜고 있었고, 수많은 현악기들이 내는 소리가 울려 퍼져 기분이 상쾌해졌다.
“여기가 천정이구나.”
석목이 속으로 생각했다.
석목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걸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 어안이 벙벙했다.
육규종과 방진 같은 이들은 주변을 훑어보고는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연합 사람들 삼십만 명은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광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천정에는 건물과 다리들이 가득했고, 곳곳에 산봉우리가 솟아있었다. 또한 흐르는 강물 양옆에는 기이한 꽃들과 풀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자라있었다.
제준은 마치 천정의 대군이 갖춘 위엄을 뽐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석목 일행이 걸어가는 내내 궁전 주위로 여러 신장들이 병사들을 이끌며 지키고 있었다. 또한 그럴 뿐만 아니라 훤칠한 인형 병사와 영수 부대도 길 옆에 서 있어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석 맹주님, 존상님께서 앞쪽에서 기다리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은파가 계속해서 길을 안내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른손을 소맷자락에 넣어두었다.
석목은 아무런 표정 없이 앞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매 속에 감춘 손가락은 가볍게 움직였으며 하얀 반지에서 미세한 빛을 반짝였다.
“석 맹주님, 은색 구름으로 드리운 궁전은 견운궁(遣雲宮)이라고 합니다. 푸른 궁전은 약왕전(藥王殿)이라 불리는데 단사가 단약을 제련하는 곳이죠. 그리고 저쪽 건물은 벽건전(碧乾殿)이며, 그 옆은 궁우루(穹宇樓)입니다……”
은파는 길을 안내하며 석목 일행에게 궁전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장관이군요.”
석목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의아한 기색은 더욱 커졌다.
궁전들은 얼핏 보면 웅장해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매우 혼잡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또한 아무런 규칙도 없이 서 있는 게 석목이 상상하던 천정의 광경과는 매우 달랐다.
“이것들은 전부 외곽 궁전들입니다. 천정의 신장들 수백 명이 머무는 백팔 길에 들어선 동부지요. 안쪽으로 들어가면 십이 선장이 머무는 십이선산(十二仙山)도 있습니다. 그리고 산마다 선궁이 하나씩 있는데 잠시 후에 맹주님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은파가 말했다.
석목이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석목이 짓는 표정을 살피던 은파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눈에 들어오는 건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