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848화 (848/916)

848화. 남사(南籭)에서 제준을 만나다

수십만 명이 당당하게 천정에서 걸어가다가 드넓은 백옥 광장에 도착했다.

석목이 눈살을 찌푸렸다.

백옥 광장은 천지의 영기가 이전에 지나친 곳들보다 몇 배나 더 짙었다.

광장에서 수련을 한다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 터였다.

석목이 주변을 둘러보자 광장 주변에는 산봉우리가 다섯 개 솟아있었는데 전부 높이 치솟아 구름을 찌르고 있어 마치 다섯 자루 보검들 같았고, 하나하나마다 막강한 기세를 풍겼다.

커다란 봉우리 밑으로는 수많은 작은 봉우리들이 줄지어있었다.

광장의 끝엔 화려하기 그지없는 커다란 궁전이 서 있었다. 그리고 채색 빛 기와들 사이에 검고 커다란 편액이 하나 걸려있었는데 편액엔 ‘남사궁’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남사궁 주변에는 커다란 강물이 허공에서부터 흘러내려와 그 광경은 마치 은하수가 걸려있는 것만 같았다.

“석 맹주님, 주변에 솟은 다섯 산봉우리는 오지봉(五指峰)이라고 합니다. 존상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이 남사궁은 산과 물로 에워싸여 있어 마치 천정의 명주처럼 화려하고 고귀하다고. 그래서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에 아주 어울린다고 하셨죠. 다섯 산봉우리는 이 남사궁을 지키는 천연 방패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은파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요? 이 다섯 산봉우리엔 영기가 아주 짙군요. 세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동천복지지요. 오랜 시간 동안 천정은 곳곳을 침공하여 수많은 생령들을 말살해 오행 영석을 수없이 수집한 것 같은데 모두 어디에 쓰셨답니까?”

석목은 주변에 솟은 다섯 산봉우리를 훑어보고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건…… 존상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이라 저도 잘 알지 못하겠군요.”

은파가 어색하게 웃었다.

석목은 웃는 듯 아닌 듯이 은파를 한 번 쳐다보고는 더는 묻지 않았다.

“석 맹주님, 존상님은 남사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시죠.”

은파가 말을 하며 안쪽으로 안내했다.

“대전 안은 공간이 좁으니 여러분은 광장에서 기다리시죠.”

은파가 다시 돌아서서 육규종을 비롯한 이들에게 손을 굽히며 말했다.

“맹주님을 혼자 보낼 수는 없습니다. 대전에 덫이라도 놓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되니까요!”

육규종이 한 걸음 다가가서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옳습니다! 담화를 나누려면 광장에서 나누시지요! 제준에게 나오라고 하세요!”

방진이 석목의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석목이 혼자서 대전으로 들어가는 걸 반대했다.

“석 맹주님, 존상님께선 이번 만남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의를 보여드리고자 특별히 남사궁으로 모시는 거죠. 안으로 들어가시면 저와 몇몇 선장들이 함께할 겁니다. 만약 마음이 놓이지 않으신다면 석 맹주님도 몇몇 사람들과 함께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다만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광장에서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은파가 난감해하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남사궁을 한 번 쳐다보고는 눈에 금빛을 뿜었다.

석목은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신식과 영목을 통해 남사궁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신식을 막는 평범한 금제 말곤 남사궁에는 별다른 특이한 점이 없었다.

이 밖에도 궁전이 주변에 자리한 백옥 광장과 매우 가까워 나쁘지 않았으나 다만 주변에 둘러싸인 강이 백 장 정도 궁전과 광장을 떨어뜨려 놓았다.

“모두 광장에서 기다리시죠. 육 족장님, 조 장로님……”

석목은 잠깐 고민하다가 신경 중기 강자들 네 명만 불렀다.

신경 중기 강자 네 명이 석목의 옆으로 걸어갔다.

“네 분은 저와 함께 대전으로 들어갑시다.”

석목이 고개를 돌린 후에 말했다.

다들 걱정이 되긴 했지만 석목이 내린 명령을 따랐다.

나머지 사람들은 삼십만 대군을 이끌고 광장 주변으로 흩어져 남사궁을 에워쌌다.

석목은 육규종을 비롯한 네 신경 강자들을 데리고 은파를 따라 남사궁으로 걸어갔다. 물론 석목은 채아도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석두, 조심해!”

채아가 전음을 보내며 말했다.

석목이 채아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남사궁은 겉부터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대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석목은 바깥이 화려한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대전 바닥에는 투명한 돌이 깔려있었는데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것이 엄연히 만년현빙(萬年玄冰)이었다.

대전 양옆에는 푸른 돌기둥들이 두 줄로 서 있었는데 기둥들은 천장으로 이어졌고, 빛이 번쩍이며 기이한 향을 풍겼다. 미루어보건대 기둥들은 현목청령석(玄木青靈石)이며 최상급 영보를 만드는 재료였다.

조각상과 같은 장식들도 전부 매우 희귀한 재료들로 빚어졌고, 책꽂이마저 최상급 나무 영재로 만들어져 있었다.

석목은 가볍게 훑어보고는 시선을 대전 가운데로 던졌다.

가운데엔 커다랗고 둥그런 탁자가 놓여있었는데 탁자 한쪽에는 하나 같이 막강한 기운을 풍기는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앉아있던 이들은 전부 신경 중기를 뛰어넘는 경지였으며 그들은 네 번째 선장인 여인, 다섯 번째 선장인 얼굴이 음양 무늬인 청년, 그리고 열 번째 선장인 하얀 옷을 입은 스님이었다.

원탁의 다른 한편에는 의자만 놓여있을 뿐, 아무도 없는 걸 보니 석목 일행이 앉을 자리인 것 같았다.

“석 맹주님, 인사 올립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일어서며 석목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석 맹주님, 다들 처음이시지요? 제가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은 네 번째 선장인 침어(沈魚), 다섯 번째 선장인 좌음(左陰), 열 번째 선장인 백수(白水) 대사입니다.”

은파는 세 사람을 일일이 소개해주었다.

석목은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 사람 사이에 놓인 빈 좌석을 바라보았다.

“논의를 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하, 맹주를 초대했으니 제가 자리를 비울 리 없지요!”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금색 옷을 입은 사람이 자리에 나타났다.

지난번에 다툰 건 제준의 분신에 불과했고, 석목은 처음으로 제준과 대면해 동공이 줄어들었다.

진정한 제준을 만난 후에야 석목은 상대의 막강한 실력을 알아차렸다.

방대하기 그지없는 위압감이 훤칠한 키에서부터 흘러나와 마치 끝없는 바다처럼 강하게 석목을 압박했다.

석목의 등 뒤에 있던 네 사람은 얼굴이 전부 하얗게 질려 동공마저 풀리면서 정신을 지배당할 것만 같았다.

석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몸에 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방대한 기운을 풍기며 제준의 위압감을 막아냈다.

그제야 석목의 뒤에 서 있던 네 사람도 긴장을 풀면서 깊은숨을 내뱉었다.

두 갈래 방대한 기운이 부딪치자 허공에서 번개가 스쳐지나갔다.

윙!

허공이 혼잡해지며 수많은 물결이 일그러졌다.

두 갈래 기운은 엇비슷했다.

“하하하! 짧은 시간 안에 수련 경지가 이 정도로 상승했군요! 정말 절세의 천재입니다!”

제준이 눈을 반짝이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위압감을 거두어들였다.

“과찬이네요. 당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요.”

석목도 기운을 거두어들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석 맹주님, 겸손할 필요 없으니 앉으시죠.”

제준이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석목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제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육규종을 비롯한 네 사람도 전부 석목의 좌우에 착석했다.

“석 맹주님이 대화를 나누시겠다고 하셔서 영광입니다……”

은파가 제준을 한 번 쳐다보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허례허식은 그만 두죠. 용건만 말씀하세요. 화합을 꺼내셨는데 어떤 요구사항이 있습니까?”

은파가 뱉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석목이 웃으며 말을 끊어버렸다.

석목은 말을 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제준을 바라보았다.

“후후, 석 맹주님, 성격이 아주 시원시원하시군요. 그렇다면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제안하기에 앞서 물어볼 게 하나 있습니다. 석 맹주님은 숙명을 믿으십니까?”

제준이 큰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순간 조극이 떠올라 멈칫했다. 예전에 조극도 석목에게 똑같은 걸 물어본 적이 있었다.

“숙명이요? 저는 사람의 힘을 믿습니다.”

석목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보아하니 석 맹주님과 저는 같은 부류인 사람인 것 같군요. 허나 아쉽게도 하늘의 뜻은 거역하기 어렵지요. 제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준이 하하 웃다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은 의아한 듯이 제준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제준이 왜 석목 앞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공감을 유도하는 걸까?

“석 맹주님,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끊임없이 수련을 하는 이유는 뭡니까?”

제준이 물었다.

“저는 힘을 추구합니다. 가장 강한 사람이 되길 원하지요!”

석목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가장 강한 사람이요? 우습게도 가장 강한 사람이 된다고 해도 천지의 규칙으로부터 제약을 받습니다. 수명이 다하면 모든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지요. 그러니 영원한 강자가 되려면 끊임없이 올라가야 하고 절대 멈춰서는 안 됩니다!”

제준이 말했다.

“당신은 이미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녔는데 그걸로 족하지 않습니까?”

석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이 세계에서 오를 수 있는 한계일 뿐입니다. 한계를 돌파하면 더 광활한 천지가 나타나지요.”

제준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석목은 마음이 서늘해졌다.

석목은 드디어 제준이라는 사람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것 같았다.

“석 맹주님, 맹주님은 꿈을 좇는 사람입니다. 저와 함께 더 높은 경계로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제준이 석목을 보며 물었다.

“아,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시는지요?”

그 말을 들은 석목이 쓴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는 물었다.

“그거야 물론 현계지문을 열어 상계로 올라가는 일이지요! 이와 관련된 부분들은 아마 이미 알고 계셨겠지요?”

제준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전해들은 내용이 있긴 하나 의아한 점이 많죠. 당신은 왜 저를 도우려고 합니까? 천정에 저보다 더 뛰어난 실력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만.”

석목이 담담하게 말했다.

“후후, 현계지문을 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 만령현문대진의 힘을 빌려야하죠. 헌데 그 진법을 시전하려면 구전현공을 대성까지 수련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금 구전현공을 수련한 사람은 당신뿐이지요.”

제준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매우 놀라웠는데 비록 제준이 이러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리라 추측했지만 이런 이유인지는 전혀 몰랐다. 게다가 속승과 연나도 석목에게 말하지 않았기에 두 사람도 이유를 몰랐던 것 같았다.

“석 맹주님, 제가 내건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저를 도와 현계지문을 열어주시지요.”

제준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무엇을 해주시겠습니까?”

석목이 다시 물었다.

“만약 석 맹주님이 수락한다면 우선 천정은 오늘부터 절대 천하 성역에 발조차 들이지 않을 겁니다. 제가 천하 성역의 평화를 보장해드리지요. 그리고 둘째로 저는 석 맹주님과 형제의 연을 맺어 함께 상계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또한 셋째로 석 맹주님도 알다시피 서문설은 이제 우리 천정의 선장입니다. 석 맹주님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알고 있는데 원하신다면 드리지요.”

제준이 말했다.

석목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실눈을 뜨자 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좋은 조건들은 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좋지 않은 조건들도 있겠지요?”

석목은 깊은숨을 내뱉고 간신히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좋지 않은 조건이라, 과정이 좀 고통스럽습니다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지요.”

제준이 말했다.

“아뇨, 현계지문을 열게 되면 여러 성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묻는 겁니다.”

석목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준이 멈칫하다가 이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미치는 영향이야 좀 있겠지요. 허나 우리가 비승을 하게 된 후에는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입니다. 석 맹주님은 이미 신경 후기에 도달했는데 일개 개미들의 생사를 신경 써서 무얼 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육규종을 비롯한 이들은 곧바로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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