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849화 (849/916)

849화. 침어

석목이 싸늘한 얼굴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요구 조건을 말했으니 그럼 저도 조건을 말해보지요. 우리가 전쟁을 멈추는 조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현문 계획을 포기하는 겁니다!”

제준이 실눈을 떴다가 다시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석 맹주님의 힘을 추구하는 마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게 아니군요. 아쉽습니다.”

“제준, 천 년 동안 성역들의 영석을 대거로 약탈하면서 수많은 생령들이 죽어버렸다. 더는 그 죄를 씻을 수 없겠지. 내가 전쟁을 피하는 이유는 수많은 생령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서야. 그러니 너와 협상을 시도했지. 하지만 아쉽게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다!”

석목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벌떡 일어서서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육규종을 비롯한 네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나 석목을 뒤따랐다.

“석 맹주님, 천정이 정말로 당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나봅니다?”

제준은 안색이 굳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석목이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왜? 원하는 대로 안 되니 강요를 하겠다는 건가?”

“네가 내 요구를 따른다면 우리 모두에게는 좋은 일이겠지. 허나 기어코 나를 거역할 거라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은파, 너희 네 명이 나를 대신해 석 맹주님을 모시고 제대로 대접을 하거라.”

제준이 일어서며 말했다.

“네.”

은파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다른 세 사람도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은파의 뒤로 다가왔다.

육규종을 비롯한 이들도 얼굴이 싸늘해졌지만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리고 장로들은 걸음을 옮겨 석목의 옆으로 다가왔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바로 물러나서 안화와 함께 대군을 이끌고 남사궁 주변에 있는 주둔지를 공격할 겁니다. 더 많은 천정의 대군을 막아내야만 다른 곳에 모인 우리 군사들이 좀 더 수월하겠죠.”

석목이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맹주님, 그러면 안 됩니다. 맹주님을 보호하러 왔는데 어떻게 혼자 내버려 두겠습니까?”

육규종이 초조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준은 제가 필요합니다. 만령현문대진의 진안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뿐이죠. 그러니 절대 나를 죽이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혼자라면 벗어날 때도 훨씬 수월하겠지요.”

석목이 전음을 보내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육규종은 잠시 망설이다가 전음을 보내 대답했다.

이때, 대전에서 금빛이 밝아지며 허공에 커다란 손이 하나 나타났다.

손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눈 모양 틈이 하나 벌어졌다. 그리고 틈 속에서 격전을 치르는 광경이 펼쳐졌다.

석목은 틈을 훑어보았는데 그 속에는 속승 진인과 연나가 있었다.

이와 동시에 빛으로 이루어진 손바닥에서 세 번째 선장인 고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존상님. 동쪽, 서쪽, 북쪽의 전송 입구가 동시에 적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천문과 서천문으로 향하는 입구는 이미 밀리고 있어 적군이 두 곳을 통해 천문들로 밀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조금 전에 제준이 조건을 말한 후로 석목은 제준이 현문 계획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곧바로 연나를 비롯한 아군들에게 공격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속승 진인과 연나가 이끄는 두 대군이 이렇게 빨리 밀고 나갈 줄은 몰랐는데 두 대군은 이미 동천문과 서천문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석목이 다시 제준을 바라보았으나 제준은 그리 놀란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제준은 오히려 차분한 눈빛으로 석목을 마주 보았다.

“석 맹주, 애당초부터 나와 협상을 할 생각이 없었군.”

재준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로 진심이었나?”

석목이 웃는 듯 아닌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안목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

제준이 미소를 지으며 아쉬운 듯이 말했다.

석목도 미소를 지었다.

“은파, 여긴 너희가 알아서 정리하거라.”

제준이 한 마디 분부를 하고는 다시 석목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금빛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우선 여기서 물러나서 대군과 합세해야겠어요.”

석목이 다시 지시를 내렸다.

“네!”

육규종을 비롯한 이들이 대답을 하고는 대전 밖으로 걸어갔다.

“여러분, 너무 급하게 가지 마시지요.”

하얀 옷을 입은 스님이 후후 웃으며 커다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금색 염주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와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에게 날아갔다.

금색 염주는 허공에서 갑자기 흩어지며 뜨거운 금색 구슬 열여덟 알로 변하여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에게 날아갔다. 또한 염주에는 불교의 진언이 새겨져 있어 빛이 번쩍였다.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은 순식간에 금빛으로 드리워져 움직임이 느려졌다. 때문에 장로들은 대전의 문과 고작 열 장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도 제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이 한 손을 들어 올려 금빛을 번쩍이자 번천곤이 나타났다.

석목이 손을 들어올리며 앞으로 날아가서는 곤봉을 돌려 허공에 떠 있는 금색 염주 열여덟 알을 내리쳤다.

쿵!

금빛이 터져버리면서 남사궁이 심하게 흔들렸다.

염주 열여덟 알 중에 하나가 ‘펑!’ 터져버리자 금빛이 흩날렸다.

“음……”

스님이 신음을 내자 나머지 염주 열일곱 알도 다시 뒤로 튕겨져 날아가 금빛을 뚫고서 다시 스님의 손목으로 향했다.

허공에서 금빛이 흩어지는 순간,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은 곧바로 자유로워져 빠르게 밖으로 날아갔다.

“석 맹주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일전에 이원과 이보와 다투면서 실력을 숨기셨나봅니다.”

그 광경을 본 은파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갑시다.”

석목은 은파를 거들떠보지도 않고는 낮게 소리를 질렀다.

육규종이 빠르게 석목의 뒤를 쫓아갔다.

“콜록, 석 맹주님, 왜 이렇게 다급하게 가십니까?”

허약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이때, 안색이 그리 좋지 않던 네 번째 선장인 침어가 일어섰다.

침어가 손을 흔들자 파란 옷자락이 말려와 ‘퍽!’ 대전의 기둥에 부딪쳤다.

기둥에서 금빛이 반짝이며 촘촘하고 낡은 부문들이 나타났다.

낡은 부문들이 나타나는 순간, 희미한 금빛을 뿜으며 대전을 가득 채웠다.

이어서 대전의 문과 기둥, 그리고 바닥까지 금색 부문들이 줄줄이 나타나더니 부문에서 금색 광막이 흘러나와 빠르게 대전 안을 전부 봉쇄해버렸다.

그러자 석목이 옷자락을 날려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을 감싼 후, 번쩍이며 대전 밖으로 날아갔다.

펑!

대전의 문에 드리운 금빛이 밝아지더니 완전히 봉쇄되어 석목 일행은 무겁게 금빛에 부딪쳤다가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석목은 몸을 멈춰 세운 후에 곧장 주먹을 날려 대전의 문을 내리쳤다.

금색 주먹 그림자가 날아가 대전의 문을 감싼 광막에 부딪쳤다.

쾅!

금색 광막이 격하게 흔들리며 강렬한 기운 파동이 말려와 대전에 놓인 의자와 탁자가 전부 뒤집혔다.

“석 맹주님, 이 결계는 존상님께서 직접 펼친 겁니다. 우리도 나갈 수 없지요. 그러니 힘은 그만 빼세요.”

은파가 후후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준이 날 위해서 상까지 차려주다니, 그럼 나도 사양할 이유가 없지.”

석목이 큰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에 광막을 내리쳤을 때, 석목은 대충 이 대진을 뚫을 수 없진 않다는 감이 왔다. 하지만 대진을 파훼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었다. 그동안 은파를 비롯한 선장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온 힘을 다해 석목을 가두려 할 터였다.

“좋습니다. 저도 석 맹주님과 한 판 겨뤄보고 싶네요.”

은파의 웃는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석목은 양쪽에 있는 육규종과 조주명에게 눈치를 주었다.

둘은 대답을 하고는 또 다른 장로 두 명과 함께 석목의 뒤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은파는 등 뒤에 매고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은파가 든 검은 검집이 없이 하얀 비단으로 칭칭 감아 검끝에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매듭이 진 곳은 금색 금제 무늬가 번쩍이는 게 봉인이 강화된 곳 같았다.

“석 맹주님, 이 검은 십 년 동안 단 세 번만 꺼내 들었습니다. 하지만 꺼내 들 때마다 반드시 피를 보았으니 꼭 조심하시지요.”

은파가 그리 말을 하며 오른손으로 검을 잡고는 왼손으로 금색 금제 무늬를 내리쳤다.

탱!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검신을 감아놓았던 하얀 비단이 풀리면서 은파의 왼쪽 팔을 따라 흘러내리자 장검이 그대로 드러났다.

장검은 매우 괴괴한 모양이었는데 검신은 붉은색이었고, 양쪽 검날에는 날카로운 톱니가 자라 붉고도 차가운 빛이 번쩍였다.

훅!

대전에 갑자기 스산한 바람이 불더니 구역질이 나는 비린내와 극도로 사악한 기운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은 눈앞이 붉어졌는데 마치 시체들로 가득한 붉은색 산 위에 놓인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번천곤을 들어 올렸다가 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쿵!

커다란 종을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번천곤의 밑단에서부터 금색 파동이 일렁이면서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스산한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제야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은 정신을 차렸다.

조주명은 찰나였을 뿐인데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이마에 난 땀을 훔쳤다.

“후후, 석 맹주님. 역시 대단하시군요.”

은파가 음산하게 변한 목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은파가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간간이 혀로 아랫입술을 훑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워 이전과 같은 품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석목의 옆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분신이 나타났다.

분신이 든 단검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 분신이 자네에게 꽤 관심을 갖는 것 같군.”

석목이 음파를 바라보며 말했다.

“죽어라!”

음파가 목멘 소리를 질러댔다.

그 뒤로 침어와 백수를 비롯한 선장들이 몸을 날리며 덮쳐왔다.

육규종이 낮게 소리를 치며 노란빛을 드리우더니 한 장 정도 되는 도끼를 꺼내들었다.

육규종의 뒤에 서 있던 연합의 신경 장로들도 각자 손에 빛을 번쩍이며 무기를 꺼내 들고는 육규종과 함께 백수 스님을 공격했다.

조주명의 주변에서는 화염이 타오르더니 그는 금색 화염 장검을 들고선 좌음이라는 남자와 함께 격전을 펼쳤다.

조주명과 함께 나란히 서 있던 연합의 장로들은 손을 치켜들고 불빛을 밝히는 순간, 붉은 바퀴 모양 화염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조주명이 앞을 내리치자 바퀴 모양 화염이 허공에 빛을 그으며 조주명을 에돌아 좌음을 덮쳤다.

석목의 분신도 단검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단검에서 붉은빛이 반짝이자 분신은 제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탱!

수십 장 밖에 있던 은파가 분신의 단검과 부딪쳤다.

석목은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푸른빛이 그의 옆으로 날아와 석목은 곤봉으로 빛을 내리쳤다.

푸른빛이 다시 방향을 틀어 꿈틀거리며 석목의 번천곤을 묶어버렸다.

푸른빛을 훑어보니 침어의 옷자락과 맞닿아있었다.

침어가 실눈을 뜨면서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러자 침어의 부드러운 모습과는 전혀 다른 막강한 힘이 몰려왔다.

석목이 번천곤을 위로 들어 올리자 번천곤은 곧 손에서 벗어날 것만 같았다.

석목이 다시 번천곤을 힘껏 끌어당기자 침어가 석목에게로 날아왔다.

이때, 석목의 또 다른 주먹이 금빛을 감고는 침어를 내리쳤다.

침어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으나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하얀 주먹이 침어의 소매에서 날아와 석목의 주먹과 부딪쳤다.

침어의 두 눈에서 푸른빛이 반짝였다. 그러자 침어의 온 팔이 푸른빛으로 물들더니 주먹이 마치 비취처럼 변했다.

쿵!

푸른빛이 터져버리면서 푸른 가루가 흩날렸다.

침어의 온 팔과 소맷자락이 전부 찢어졌다.

하지만 흩날리는 푸른빛이 석목의 콧구멍과 입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가자 석목은 비틀거리더니 눈앞이 희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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