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862화 (862/916)

862화. 돕지 않다

“연나 어르신, 다시 한 번 어르신의 영혼 인정을 받아 어르신의 부하가 되게 해주세요. 제가 가지고 있는 사령 대군을 전부 소환해 제준과 싸울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제발 한 번 만 살려주십시오……”

무야가 부들부들 떨면서 무릎을 꿇고는 애원했다.

무야는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연이어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그러나 연나의 싸늘한 얼굴은 무야가 애원을 해도 바뀌지 않았다. 이어서 연나는 손가락으로 앞쪽을 짚었다.

수많은 분홍색 꽃잎이 날아 나와 무야를 감싸고는 빠르게 돌아가면서 회오리를 이루었다.

무야를 감싼 검은 보호막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터져버렸다.

“연나 어르신, 저……”

무야는 얼굴이 참담하게 변해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꽃잎은 무야를 꽁꽁 가둬버렸다.

꽃잎 속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멈춰버렸다.

연나가 손을 흔들자 칠색 영역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칠보묘수는 그대로 연나에게로 날아와 그녀의 머리 위에서 떠다녔다.

무야와 사령 해골은 철저히 사라졌고, 추선대만 그 자리에서 떠다녔다.

연나가 손을 흔들자 추선대가 다시 그녀의 앞으로 날아왔다.

추선대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는데 심지어 균열도 수두룩하여 곧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연나의 눈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연나는 곧바로 추선대로 빛을 날렸고, 주문을 외우면서 법결을 짚었다.

추선대는 검은빛이 더 짙어지더니 몇 배나 불어났다. 그러자 굵기가 물통만한 검은빛이 추선대에서 뿜어져 나와 명하지수를 불러내는 커다란 붉은빛을 향해 날아갔다.

핏빛은 마치 자극을 받은 듯이 격렬한 파동을 일으키며 굉음과 함께 터져버렸다.

붉은빛이 사라지자 커다란 공간 통로가 나타났는데 명수는 그 속에서 흘러나왔다.

연나가 빠르게 법결을 짚자 추선대에서 부문이 줄줄이 날아 나와 공간 통로 근처로 뭉쳐서는 검은 부적이 되어 대진을 이루었다.

연나는 빠르게 법결을 시전하며 속승과 격전을 치르는 제준을 바라보았다.

그 광경을 본 속승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가볍게 허공을 내리쳤다.

청련검진에서 나는 검광이 밝아지면서 순식간에 다섯 개로 변하더니 작고 푸른 연꽃 다섯 개가 오각형을 이루며 제준에게 드리웠다.

푸르고 투명한 실이 작은 검련 다섯 개에서 뿜어져 나왔는데 실은 마치 수많은 검의 기운처럼 하늘을 뒤덮으며 제준에게로 날아갔다.

제준이 내키지 않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금색 도장이 다시 제준에게로 날아가 머리 꼭대기에서 떠다니면서 금빛을 뿜어 그를 보호했다.

푸른 검줄기가 금색 무늬에 닿는 순간 터져버리며 제준에게로 다가가지 못했다.

금빛 고리 속에 자리한 제준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는데 도무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연나는 다시 빠르게 법결을 날렸다.

검은 대진이 돌아가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빛을 뿜었다.

“응(凝)!”

연나가 손가락으로 앞을 짚었다.

그러자 검은 대진이 빠르게 줄어들면서 공간 통로 속으로 줄줄이 스며들었다.

진법이 줄어들며 닫혀버리자 뿜어져 나오던 명하지수도 멈춰버렸다.

천정 곳곳에 흐르던 핏빛 명수가 땅으로 스며들어 사라져버렸다.

연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속승도 한숨을 돌렸다.

“사매, 고맙네. 제준, 저놈을 죽여 버려야만 현계지문이 열리는 걸 막을 수 있어.”

속승이 연나에게 말했다.

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날아갔다.

쾅!

천정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수많은 궁전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하늘로 치솟았다.

궁전 사이에 굵직한 빛줄기가 나타나 서로 이어지면서 커다란 진법을 이루었다.

천지의 영기가 들끓기 시작했고, 천둥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하자 천정에 또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속승과 연나는 흠칫 놀랐다.

“제준은 만령현문대진을 이루는 진정한 진법을 온 천정에 숨기고 있었어. 그러니 절대 찾을 수 없었지.”

속승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진법 속에 갇힌 석목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늘에 걸린 다섯 행성에서 흘러나오는 영력이 다시 부풀면서 마치 고장난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처럼 석목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석목의 육신은 풍선처럼 부풀었고, 모공에서 핏빛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몸속에 흐르는 기혈이 들끓기 시작했지만 석목의 육신은 더 이상 그걸 버틸 수 없어 오행의 영력이 모공에서 빠져나왔다.

경맥 속에는 엄청난 오행의 영력이 흘러 다니고 있어 마치 수많은 칼날로 혈관을 긋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석목!”

석목을 본 연나가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몸을 날렸다.

이어서 제준의 옆에 연나가 나타났다.

칠보묘수에서 빛이 번지면서 칠색 빛이 탑 모양 허상으로 변하여 제준을 공격했다.

금빛 고리 속에 있던 제준이 냉소를 지으며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굵직한 금빛이 제준의 손에서 뿜어져 나와 부문들을 번쩍이더니 곧장 도장으로 스며들었다.

금색 도장에 새겨진 무늬가 더 뚜렷해지면서 굉음과 함께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금빛 고리에도 화염이 불타올랐다.

칙, 칙, 칙!

금빛 고리가 스친 곳에 내리치던 푸른 검줄기는 전부 불타버렸다.

칠색 탑 모양 허상이 금빛 고리에 부딪치자 탑 모양 허상은 흔들리면서 잠깐 막아내는 듯하다가 이내 터져버렸다.

순간, 금빛 고리가 빠르게 퍼지며 푸른 검련 다섯 개도 부숴버려 검련은 마치 계란처럼 깨지더니 작은 비검이 되어 사방으로 튕겼다.

그 광경을 본 속승은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끝없는 위력을 머금고 있는 금빛 고리가 사방으로 퍼졌지만 속승은 막을 힘이 없었기에 푸른 비검을 소환하여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연나도 안색이 굳어지며 빛을 번쩍이면서 공격을 피했다.

이 모든 건 단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양한 빛들이 부서지며 반딧불처럼 흩날리자 제준이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흩날리는 반딧불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제준은 금색 도장을 받쳐 들고 있었는데 도장에서는 금빛이 끊임없이 흘러 다녔다.

제준은 키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거인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속승과 연나의 앞에 나타났다.

“후후, 보화 사매, 오랜만이야. 풍채가 더 좋아진 것 같군. 부러워. 그런데 우리 동문인 사형과 사매를 천 년 만에 다시 만났군.”

제준이 웃으며 말했다.

“천 년이나 지났지만 넌 여전히 천성이 고약하구나. 혼자 살아남고 싶어서 모든 걸 희생시키다니.”

연나가 차갑게 말했다.

“과찬이야, 사매. 명수를 충분히 모았는데 무야처럼 귀찮은 놈을 사매가 죽여줬잖아?”

제준이 차갑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속승과 연나는 얼굴이 굳어버렸다.

동시에 천정 곳곳에서 빛이 밝아지더니 대진이 뿜어내는 기운도 점점 짙어졌다.

기이한 기운이 천천히 나타나 묵직하게 모든 사람들을 짓눌렀다.

속승과 연나는 그 기운을 느끼자 안색이 굳어버렸다.

“사형과 사매도 느껴지는가? 이것은 상계의 기운이야. 현계지문이 곧 열릴 거야!”

제준이 미친 듯이 웃었다.

속승과 연나는 서로 마주보고는 눈에 결연한 기색을 내비쳤다.

두 사람은 각각 양쪽에서 제준을 덮쳤다.

제준은 웃음을 멈추더니 얼굴에 경멸스런 기색을 드러내며 금색 화염을 감았다.

제준이 어깨를 움직이자 금색 화염이 줄줄이 날아 나와 불바다를 이루며 두 사람에게로 퍼져나갔다.

쾅!

세 사람이 부딪치면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 * *

육규종을 비롯한 신경 강자들은 먼 곳에 서서 온통 초조한 기색만 내비쳤다.

석목을 중심으로 영력 파동이 격하게 몰려오자 머리 위에 뜬 소용돌이도 점점 커지면서 놀라운 힘을 뿜어냈다. 때문에 신경 후기가 아니라면 가까이 가기만 해도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갈 터였다.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보기만 해야 하나요?”

안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은 서로 마주보며 침묵만 지켰다.

이때, 먼 곳에서부터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짙은 먹구름이 미천 연합의 대군으로 날아와 멈추었다.

먹구름이 걷히자 몸에 검은 무늬를 새긴 키가 훤칠한 병사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연나가 이끌고 있는 흑마족 대군이었다. 그러나 흑마족 대군에 속한 많은 병사들은 조금 전에 격전을 치르며 부상을 당했다.

“제준!”

흑마족 대군에서 가장 앞에 서 있던 명라와 석무애 같은 신경 흑마족들은 제준을 보고는 경악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더니 흑마족들을 이끌고 공격을 하려고 했다.

“안됩니다! 가까이 가면 안돼요!”

육규종이 다급하게 흑마족들을 막더니 그간 일어난 일들을 빠르게 설명해주었다.

“만령현문대진은 이미 열렸어요. 우리가 갖춘 실력으로는 다가갈 수 없죠. 가봤자 죽을 뿐입니다.”

육규종이 말했다.

석무애를 비롯한 흑마족 신경 강자들은 육규종이 하는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무것도 안하고 이렇게 대진이 돌아가게 내버려두란 말인가요?”

명라가 싸늘하게 말했다.

“우리도 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이때, 누군가가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육규종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듬직하게 생긴 청년 한 명이 청란성지의 제자들을 이끌며 날아오고 있었다.

이제 세 성역에서 온 대군들이 모였다.

대장로가 이끌고 있는 대군만 아직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장로의 안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육규종은 풍리를 보자 멈칫하며 물었다. 풍리는 속승이 이끌고 있는 청란 제자들과 함께 이곳으로 왔지만 육규종은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는 속승 진인의 제자인 풍리입니다.”

풍리가 말했다.

“풍 도우군요. 도우님께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육규종이 물었다.

“네,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지요.”

풍리가 대답했다.

그러자 육규종과 석무애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풍리를 바라보았다.

“정말입니까? 도우님, 어서 말해 보시죠.”

육규종이 다급하게 물었다.

“상황을 둘러보니 온 천정이 만령현문대진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준 녀석은 궁전을 지을 때부터 이미 만령현문대진을 이루는 핵심 부위를 궁전 곳곳에 배치해 두었겠죠. 그런데 저는 핵심 부위가 자리한 위치를 잘 알고 있으니 대군을 나눠 대진을 이루는 핵심들을 파괴한다면 대진을 모두 없애진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영향은 줄 수 있을 거예요. 잘만하면 속승 진인과 보화 선자님에게도 시간을 벌어다 줄 수 있지요.”

풍리가 말했다.

“제준은 대진을 이루는 핵심을 찾기 쉬운 곳에 배치하지 않았을 겁니다. 풍 도우님, 외람되지만 그 핵심 위치를 어떻게 알게 되었지요?”

안화가 물었다.

“물론 저만의 방법이 있죠. 하지만 설명하기엔 이제 곧 파멸에 이르게 생겼어요. 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들 이곳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만 기다릴 겁니까?”

풍리가 그리 말하자 안화는 할 말을 잃었다.

육규종은 풍리가 하는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천정에는 건물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다가 건물마다 다양한 금제가 드리워져 있어 금제를 깨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대군을 전부 합치면 수십만 명은 될 테니 제준과 속승이 겨루는 싸움에 끼어들 수 없다면 풍리가 한 말을 따르는 편이 이곳에서 허무하게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좋습니다. 할 일도 없는데 당신이 말한 대로 궁전을 허물어보죠.”

석무애를 비롯한 흑마족들은 내키지 않았으나 별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대군이 풍리가 내리는 지시에 따라 각자 움직이고 있을 때, 어디선가 금색 구름이 빠르게 몰려왔다.

구름 속에선 그림자가 일렁이었는데 그 속에는 병사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