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3화. 제준의 숨겨놓은 수단
북을 치는 소리가 금색 구름에서 울려 퍼지던 순간, 금색 구름이 사라지면서 수많은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전부 키가 훤칠한 고만족이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병사들은 허리춤에 금색 북을 걸고 있었다.
우두머리는 천목 선장인 고명이었다.
“큰일이군. 반고군(盤鼓軍)입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풍리는 안색이 굳어버렸다.
미천 연합에게 공격을 받아 도망갔던 패잔병들도 그 속에 섞여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낯선 패잔병들이 있었는데 아마 곳곳에서 천문을 지키던 천정의 대군들일 터였다.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은 안색이 굳어버렸다. 천정이 이렇게 규모가 막강한 전력을 아직까지 숨기고 있었다니.
고만족 사람들은 적어도 이삼십만 명은 되는 것 같아 양쪽 대군은 숫자가 비슷했다.
하지만 아군은 연이은 격전을 치르며 이미 진이 빠진 상태라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공격!”
고명이 싸늘한 눈으로 연합의 대군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한 손을 흔들었다.
고만족 대군이 밀물처럼 밀려오면서 연합의 대군을 공격했다.
쿵!
고만족 대군은 미천 연합의 대군 가까이에 서서 다양한 빛을 번쩍였다. 그러자 고만족들은 육신이 빠르게 커지더니 수천, 수만 장이나 되는 거인으로 변하여 손을 들어 올리고는 허리춤에 맨 북을 힘껏 내리쳤다.
금색 파동이 뿜어져 나와 하늘을 뒤덮으며 미천 연합의 대군에게로 날아갔다.
미천 연합의 대군이 다급하게 진형을 정돈하여 공격을 맞이하려고 할 때, 천정의 대군이 가한 빠른 공격에 앞쪽이 공격을 당하였다.
처참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자 연합의 진형은 앞쪽이 어수선해졌다.
금색 파동이 드리운 순간, 미천 연합의 대군은 내장까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목구비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수련 경지가 약한 병사들은 육신마저 터져버렸다.
소리 파동 공격을 한 차례 날린 후에 고만족 거인들은 우르르 양쪽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고만족 거인들 사이에서 두터운 전투 갑옷을 입은 천정의 대군이 기세등등하게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그 숫자가 족히 몇 만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천정의 대군은 갑옷으로 몸을 꽁꽁 감싸고 있어 눈과 코마저 드러나지 않았는데 대부분 커다란 도나 검 같은 법보를 들고 있었고, 무기에서 삼엄하고도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쿵!
갑옷을 입은 전사들은 강철 물결을 이루며 곧장 연합의 대군을 공격했다.
그러자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미천 연합의 대군은 앞쪽이 소리 파동 공격을 받아 흐트러졌고, 공격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쿵, 쿵, 쿵!
고만족 거인들도 북채로 허리춤에 걸린 북을 내리치며 달려왔다. 그러자 극도로 강렬한 소리 파동 공격이 연합의 대군을 둘러쌌다.
천정의 대군과 연합의 대군은 다시 치열한 전쟁을 펼쳤다.
연합의 대군에 속한 육규종과 석무애, 풍리를 비롯한 강자들은 소리를 지르며 흐트러진 진형을 정돈했다. 그렇게 강자들은 간신히 전장을 안정시키긴 했으나 큰 소용은 없었다.
천정의 대군은 더 촘촘하게 압박을 해왔으며 사방팔방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무자비한 공격을 받은 연합의 대군은 혼란에 빠져버렸다.
한 차례, 또 한 차례 공격이 연합의 대군을 향해 터져나가자 핏빛이 끊임없이 흩날렸다.
* * *
만령현문대진을 이루는 진안이 된 석목은 육체가 이미 끝까지 부풀어 그 모습은 마치 크고 둥근 공 같았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비록 석목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감각은 여전히 느낄 수 있어 연합의 대군과 천정의 대군이 다투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에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석목은 꿈속에서 금색 북을 달고 있는 사람들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은 엄청난 위력을 지닌 천정의 병사들이었다.
석목은 천문과 같은 천정 곳곳이 쉽게 무너진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과연 지금 나타난 대군이야말로 제준이 감춰둔 진정한 병사들이었다. 애초에 제준은 연합의 대군이 격전을 치른 후에 지쳐있을 때, 단번에 연합의 대군을 무너트리려는 작정이었다.
석목은 어렵게 고개를 돌려 연나와 속승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제준과 치열한 싸움을 펼치고 있어 세 갈래 빛이 끊임없이 부딪쳤다.
속승과 연나는 둘이서 한 사람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지만 여전히 밀리고 있어 연합의 대군을 도와줄 수 없었다.
“정말 처절한 패배를 맞아야 하는 걸까……”
석목은 이 처참한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늘에 걸린 다섯 행성은 여전히 빛을 뿜고 있었다.
다섯 행성에서 커다란 균열이 생기더니 점점 길게 뻗어가는 게 이제 곧 부서지려는 것 같았다.
다섯 행성에서 이변이 일어나면 두 배나 강력해진 영력이 쏟아질 터라 석목은 안색이 굳어버렸다.
석목은 육신이 다시 한 번 불어나 손과 발이 퉁퉁 부어버렸고, 몸마저 붉은색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근육과 피부, 경맥마저 부풀어 그 모습이 마치 껍데기가 벗겨진 원숭이처럼 두려웠다.
붉은 안개가 석목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석목은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몸 속에 흐르는 영력을 안정시키려고 온힘을 다해 기혈을 움직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육신이 터져버릴 터였다.
영석으로 이루어진 행성이 뿜어내는 영력은 점점 많아졌고, 속도도 점차 빨라졌다. 하지만 석목은 영력이 쏟아지는 속도를 통제할 수 없어 육신은 계속해서 불어났고, 호흡마저 버거워졌다.
시간이 흐르자 석목은 커다란 핏빛 공으로 변하였다.
펑!
드디어 석목의 육신은 쏟아지는 영력을 담지 못해 터져버렸고, 혈무가 되어 흩날렸다. 결국 석목의 몸은 완전히 부서져버렸다.
석목은 눈앞이 어두워졌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석목은 이미 불사신의 경지를 깨우쳤기에 육신이 터져도 큰 문제는 없었다.
오행의 힘이 석목의 육신을 찢어버리는 순간, 구전현공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석목은 어렴풋이 무엇인가를 깨우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깨우침이 너무 희미하여 석목은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석목의 육신이 터져버리는 순간, 연나와 속승, 그리고 먼 곳에 있던 연합의 대군은 얼굴이 전부 퍼렇게 질려버렸다.
연합 대군의 얼굴에 절망스런 기색이 스쳤다.
육신이 터져버렸으니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을 텐데 맹주가 천정의 손에 죽어버렸다고 생각한 연합의 대군은 사기가 꺾여 몇몇은 포기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석목!”
속승은 석목이 죽지 않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했으리라 짐작했다.
속승은 머릿속이 이미 하얗게 변해있었고, 얼굴은 늙고 초췌해졌다.
오히려 속승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연나만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석두……”
채아가 터져버린 석목의 육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석목과 지냈던 추억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석두, 걱정 마! 지금 내 실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꼭 수련을 열심히 해서 너를 위해 복수할 거야!”
채아가 속으로 다짐하며 몸에 빛을 번쩍였다. 그리고 몸을 더 작게 줄이고는 먼 곳으로 도망가 버렸다.
채아는 미천 연합에 귀속되었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는 석목이 미천 연합의 맹주였기에 계속 이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석목은 죽어버렸으며 미천 연합도 곧 무너질 것 같으니 채아는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음! 아닌데?”
채아는 한참 날아가다가 멈춰 섰다.
채아와 석목은 계약으로 심신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 석목의 신혼이 여전히 느껴져 채아가 기뻐하며 다시 돌아섰다.
진안 근처에 흐르는 오색 빛은 마치 다섯 갈래 강물과 같아 허공에서 기세등등하게 맴돌며 커다란 오색 빛 구체를 이루었다.
석목의 육신이 터지면서 생긴 혈무도 오색 빛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짙고 끈적이는 혈무가 빠르게 맴돌면서 끊임없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이 마치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혈무가 오색 빛에 난 틈으로 날아가는 순간, 형태가 없는 힘이 막아버려 혈무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혈무가 끊임없이 들끓다가 줄어들더니 한곳에서 핏줄기처럼 얽히고설키다가 희미한 사람 그림자를 이루었다.
순간, 혈무로 이루어진 핏줄기가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고, 온전한 사람 그림자가 회생한 듯이 나타났다.
구릿빛 피부에 짙은 눈썹, 튼튼한 근육에 자연스럽게 떨어진 두 팔을 보니 마치 무궁무진한 힘을 내뿜고 있는 것 같았다.
석목이었다!
석목의 두 눈에서 맑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막강한 기운도 모공에서 흘러나오는 게 마치 강력한 기류와도 같았다.
“석두!”
채아가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저기 봐. 석 맹주님은 죽지 않았어!”
“석 맹주님이 다시 살아났다!”
“다행이야!”
연합의 대군은 석목의 모습을 본 순간, 다시 사기가 차올라 절망으로 가득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전황으로 봤을 때, 미천 연합은 여전히 밀리고 있었지만 석목이 살아났으니 다시 희망이 생겼다.
속승과 연나도 깊은 숨을 내뱉었다.
“음, 불사신!”
제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불길한 예감이 들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준은 곧바로 잡념을 떨쳐버렸다.
만령현문대진에 금제되었으니 석목이 처한 운명은 이미 정해진 셈이라 원만에 이른 구전현공을 진안으로 삼았다면 절대 예외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고 한들 어쩔 텐가. 기껏해야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며 이렇게 미칠 듯한 오행의 영력을 주입받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었다.
제준이 한 손을 들어 금색 도장에 빛을 번쩍이자 커다란 금색 부문들이 서른여섯 개나 되는 도장들에서 날아 나왔다.
금색 부문들이 흔들리며 금색 진법 서른여섯 개로 변하였다.
우르릉!
금색 진법은 눈 깜박할 사이에 다시 금색 손 서른여섯 개로 변하였다.
손마다 각각 다른 모양이었지만 전부 강력하기 그지없는 기운을 풍겼는데 손 서른여섯 개는 팔괘진형을 이루며 속승과 연나에게로 날아갔다.
두려운 기운 파동이 펼쳐지자 스치는 곳마다 파멸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삼십륙천강성인(三十六天罡聖印)!”
속승과 연나는 안색이 얼어붙었다.
연나가 한 손을 흔들자 은빛이 연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은색 진법을 이루며 두 사람에게 드리웠다.
은빛이 반짝이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서른여섯 손이 날린 공격을 피해 수 백 장 멀리까지 도망갔다.
펑!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수많은 기류가 구멍에서 맴돌면서 커다란 공간 소용돌이를 이뤄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을 빨아들였다.
제준이 냉소를 지으며 법결을 날렸다.
삽십륙천강성인은 일격을 날린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다시 금빛을 흩날리며 별똥별처럼 연나와 속승을 쫓아갔다.
“만령현문대진은 이미 열렸으니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전력을 다해 제준을 죽이지 못하면 모든 게 파멸에 이를 거야!”
속승이 묵직하게 말했다.
연나는 심각한 얼굴로 가까이에 있는 오색 빛 구체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들끓는 혈무를 한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승이 소리를 지르며 두 손으로 법결을 짚자 그의 몸에서 푸른 화염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속승은 기운이 급속도로 강해지더니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리고 방대한 압력이 퍼져가면서 주변 허공을 한참 동안 흐트려 놓자 뚜렷한 물결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갔다.
푸른 화염이 타오르는 사이에 속승은 육신이 갑자기 커졌고, 순식간에 팍 늙어버렸다.
속승이 한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쥐고는 빠르게 앞으로 휘둘렀다.
순간, 푸른 주먹 그림자가 수백 갈래 나타났는데 각각 크기가 커다란 건물만 했다. 또한 주먹 위에는 푸른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고, 막강한 기운을 풍기면서 금색 손 서른여섯 개와 부딪쳤다.
한편, 연나는 두 눈에 은빛을 반짝이며 칠보묘수를 앞으로 던지고는 주문을 외웠다.
칠보묘수에서 칠색 빛이 번쩍이며 순식간에 커다란 나무로 변하였는데 굵은 나뭇가지 일곱 개는 마치 날카로운 검과 같아 곧장 금색 손 서른여섯 개를 향해 날아갔다.
쿵, 쾅!
세 가지 색이 얽히고설키면서 엄청난 파동이 밀물처럼 퍼져 나가 금색 손 서른여섯 개는 단번에 부서져 사라졌다.
푸른 주먹 그림자와 칠보묘수가 하늘을 뒤덮으며 제준을 공격하자 제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심각한 얼굴로 법결을 짚었다.
제준의 몸에서 금색 화염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는 등 뒤로 커다란 금색 법상을 시전했다.
금색 법상이 빠르게 날아가 도장 속으로 스며들어갔고, 금색 도장은 굉음을 내며 한 묘 정도 되는 크기로 변하여 공격을 맞이했다.
연나와 속승이 날린 공격이 금색 도장과 부딪치며 한참 동안 대치했고, 허공이 미친 듯이 일그러졌다가 부서지자 모든 게 무너진 광경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