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4화. 성역의 재난
천하 성역.
이 시각, 무암성에 자리한 가장 큰 성시인 북무성 밖에서부터 홍수가 몰려오면서 성벽이 절반이나 물에 잠겨버렸다. 게다가 입구에 달린 두꺼운 성문 두 짝은 이미 뚫려버려 홍수가 성시 안까지 쏟아졌다.
성시 안은 난장판이 되었고, 모든 건물이 격렬한 지진 때문에 무너졌다. 그리고 혼탁한 물 위에는 온통 무너진 지붕과 잘린 기둥들이 떠다녔다.
북무성의 성벽 위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였는데 그들은 전부 이 성시에 살던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온통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갑자기 엄청난 재난이 왜 닥친 것인지 시민들은 알지 못했다.
다만 반시진 전부터 대지가 격하게 흔들렸고, 북무성 밖에 흐르던 여러 강의 수면이 올라오면서 물이 성시 안까지 흘러들어 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성시 안에 서 있던 건물은 전부 무너졌지만 북무성의 성벽은 매우 단단해 바닥까지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성벽은 몰려드는 홍수의 충격을 잠시나마 막아낼 수 있어 성시에서 살아남은 시민들은 전부 성벽으로 모였다.
성벽의 상공에는 수십 명이 모여 심각한 얼굴로 홍수에 잠긴 성시 안을 바라보면서 살아남은 자가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쏴아!
커다란 파도가 성벽을 내리치면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푸른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드리운 노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성벽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에는 이미 틈이 여러 갈래 생겼는데 성시 밖에선 홍수가 끊임없이 들이치고 있어 곧 성시가 전부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노인이 손바닥을 펼치자 위에 흙덩이처럼 생긴 붉은색 무언가가 놓여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숙여 흙덩이를 한 번 바라보고는 아쉬워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는 손을 흔들어 흙덩이를 던졌다.
흙덩이는 허공에 선을 그으며 ‘펑!’ 소리와 함께 북무성 밖에서 들이치는 홍수로 빠져버렸다.
거세게 밀려오는 물살에 빠진 흙덩이는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에 성 밖에서 들이치는 홍수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나더니 이내 들끓기 시작했다.
훅!
수십 리까지 뻗은 붉은 벽이 물속에서 떠오르며 층층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물 위쪽으로 한 장 높이까지 올라온 후에 멈췄다.
하지만 물은 다시 차오르며 곧장 몇 뼘이나 더 올라왔다.
쿵, 쿵!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붉은 벽 또한 함께 치솟아 다시 물보다 한 장 정도 높게 솟아올랐다.
이때 노인의 뒤에서 노란빛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그의 옆에서 멈춰 섰다.
“육심(陸沈) 장로님, 종족 사람들이 전한 소식에 의하면 우리 반귀 일족 뿐만 아니라 무암성 곳곳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하네요. 산들이 전부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암성 밖은 기이한 힘으로 봉쇄되었다고 해요.”
누군가가 빠르게 보고를 마쳤다.
“심각한 일인 것 같으니 곧바로 맹주님과 족장들에게 알리거라.”
육심 장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육각형 동거울을 하나 꺼내서 그 위에 정혈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정혈이 떨어지는 순간, 거울에 반귀 허상이 한 줄기 나타나 반짝이는 사이에 물결처럼 일렁였다. 이어서 노란빛이 반짝이며 육규종의 얼굴이 나타났다.
“육심 장로님, 종족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거울 속에 비치는 육규종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족장님……”
육심은 머뭇거리지 않고는 무암성에 일어난 현상들을 일일이 보고했다.
그리고 천천히 육규종이 내릴 지시를 기다렸다.
육규종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석목이 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 성역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군요. 현계지문에서 나오는 공간 법칙의 힘이 행성들까지 퍼져나가 재난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석목은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초조했다.
육심은 무암성에만 이변이 일어난 줄 알았는데 석목이 하는 말을 듣고서 온 성역이 같은 재난을 겪고 있는 걸 깨달아 깜짝 놀랐다.
“족장님, 맹주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육심이 다급하게 물었다.
석목의 얼굴은 거울 속에 드러나지 않았고, 계속해서 목소리만 들려왔다.
“명령을 내리시죠. 성계이상의 수련자들은 성역 곳곳으로 가서 생령을 지키고 공간이 안정될 때까지 대기하라고.”
“네.”
육심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종족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북무성의 성벽으로 내려왔다.
* * *
흑마 성역.
명옥성에 흐르던 마기는 예전처럼 조용히 안개로 뭉친 게 아니라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흩어놓듯 격렬하게 들끓었다.
짙은 마기가 덩어리를 이루며 커다란 소용돌이로 변하더니 서로 맞부딪치면서 질서 없이 날아다녔다.
쾅!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으며 마기 소용돌이 속에서 찬란한 은빛이 번쩍였다. 그렇게 일어난 은빛은 전부 번개였는데 내리칠 때마다 소용돌이를 투명하게 비추었다.
쩍!
은색 번개가 갑자기 터져버리면서 검은 돌들이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만 장 높이 하늘까지 치솟았다가 다시 별똥별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굉음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천둥소리가 뒤를 이었다.
돌들이 비처럼 쏟아졌고, 천 장 높이까지 치솟았던 커다란 산봉우리들이 사라져버리면서 평지로 변하였다.
* * *
미양 성역.
동성성 위에는 하늘과 땅을 잇는 회오리바람이 기승을 부리면서 모든 걸 뒤덮기 시작했다.
숲에서도 강풍이 휘몰아쳐 굵기가 수백 장에 이르는 큰 나무들마저 뿌리째 뽑혀 허공에서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나무 부스러기가 마치 모래바람처럼 하늘을 어둡게 뒤덮었고, 숲속에 숨어있던 마을도 무너지며 시체들이 널브러졌다.
수련자들은 적어도 스스로는 지킬 수 있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또한 빠르게 도망간 사람들은 단단한 동굴에서 잠깐 피난을 할 수 있었지만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은 전부 재난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회오리바람이 스친 땅에는 깊은 골짜기가 파였고, 여러 번 스친 곳에는 나무며 돌들까지 전부 부서져 낭패를 보아 마치 땅을 한번 갈아엎은 듯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한쪽 숲의 상공에서도 회오리바람 여러 갈래가 서로 합쳐지면서 나무들이 하늘로 뽑혀 올라갔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는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서 있었는데 푸르스름한 보호 광막으로 자신을 감쌌다.
강력한 기운을 풍기는 걸 보니 수련 경지가 성계 후기에 도달한 고명한 수련자였는데 그는 동성성에서 오랫동안 폐관 수련을 하고 있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강자였다.
얼마 전에 중년이 수련하고 있던 곳은 공간의 힘과 폭풍이 휘몰아쳐 무너져버렸다.
회오리바람은 중년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나 중년은 신식으로 주변을 살펴본 후에 흠칫 놀랐다. 과연 동성성 곳곳에서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년은 이곳에서 더 머물지 않았다.
하!
중년 남자는 푸른빛으로 변하여 회오리바람을 뚫고는 하늘로 날아올라 곧장 성운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에 성운 근처가 드디어 드러났으며 남자는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남자는 이제 곧 동성성에서 날아가 성역 다른 곳에서 폐관하여 한계를 돌파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시진 뒤에 중년 남자는 깜짝 놀랐는데 아직도 동성성에서 나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중년 남자가 믿기지 않는 듯이 눈을 비비자 별들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지만 거리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남자는 정신을 가다듬고는 법력을 전부 시전하여 온 힘을 다해 하늘로 날아갔다.
훅!
바람 소리가 귓전에서 울려 퍼졌고, 중년은 곧장 수 천 리 밖으로 날아갔다.
중년이 다시 멈춰 섰지만 여전히 별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조금도 앞으로 날아가지 못한 것 같았다.
중년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어서 중년은 깊은숨을 내뱉으며 다시 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여러 번 날아가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중년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여러 번 시도를 한 끝에야 중년은 그 이유를 알아차렸는데 지금 온 성역이 기이한 공간의 힘으로 금제되어있어 남자는 공간 장벽을 뚫을 수 없었고, 성역 세계로 날아가지 못했다.
같은 광경이 성역 곳곳에서 펼쳐졌다.
거의 동시에 각 행성들은 전례가 없는 재난을 겪게 되었고, 허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더니 산마저 무너져 내려 천지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다행히 각 성역에 있던 고명한 수련자들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각자 방어 수단을 시전하여 성시를 보호했다. 그리하여 재난이 성역의 생령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어느 정도 줄였지만 여전히 많은 생령들은 하늘의 뜻에 목숨을 맡겨야 했다.
그러나 이때, 온 성역이 고통스러운 재난을 겪은 후에 이변이 일어났다.
* * *
천정.
석목을 비롯한 강자들이 지키는 가운데 이곳은 큰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석목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현계지문을 바라보았다.
“석목,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네. 현계지문이 열리긴 했지만, 지금까지 봤을 때 온 성역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겠지. 성역 세계가 붕괴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불행 중 다행이지.”
속승은 연합의 일원들에게 영역을 펼치면서 석목의 표정을 읽고는 전음을 보냈다.
“명령을 내려 연합의 모든 강자들이 지키게 했으니 어느 정도 막아낼 거야. 성계가 넘는 수련자들도 충분히 있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석목과 가까이에 있던 연나도 석목의 표정을 바라보고는 전음을 보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걱정이 조금 줄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살았던 작은 어촌 마을을 떠올렸다.
남해성에는 성계 수련자가 없을 터였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현계지문에서 끝없이 흘러내리던 법칙의 힘이 점점 줄어들더니 서서히 멈추었다.
천정에서 들끓던 공간 파동도 멈췄으며 떨리던 공간도 곧장 회복되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깊은숨을 내뱉었다. 과연 성계를 뛰어넘는 강자들은 충분히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고, 수련 경지가 낮은 수련자들은 대부분 신경 강자들이 시전한 영역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영역이 드리울 수 있는 범위에도 한계는 있어 적잖은 사람들이 재난을 겪으면서 큰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제 모두가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한숨 돌리기도 전에 또 이변이 일어났다!
높이가 만 장에 이르는 현계지문이 다시 격렬하게 흔들리면서 눈부신 하얀빛을 내뿜었다.
쿵!
투명한 빛이 현계지문에서 뿜어져 나왔는데 빛은 마치 커다란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은하수가 날아가는 순간, 곧장 부서지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전부 법보를 꺼내 들고는 보호 광막을 둘렀다. 그리고 공격을 받아내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미칠 듯한 희열을 드러냈다.
흘러나온 빛은 순수하기 그지없는 천지의 원기였는데 이 빛은 그 어떤 천지의 영기보다 수백 배, 수천 배는 순수하고도 짙었다.
현계지문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만 명은 하얀빛이 몸에 닿는 순간, 전쟁으로 입은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얀빛이 몸속으로 스며들어 수련 경지마저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계에 머물러있던 수련자들은 하얀 원기가 드리운 순간, 곧장 한계를 돌파해버렸다.
퍽!
미천 연합의 성계 수련자는 현계지문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하얀빛 몇 갈래를 흡수한 후로 몸에서 빛이 환하게 번지더니 순식간에 한계를 돌파했다.
펑, 펑, 펑!
현문과 가까이에 있던 수련자들에게서 빛이 연이어 터졌고, 모두 줄줄이 한계를 돌파했다.
방진과 안화, 대장로와 육규종 같은 신경 초기나 신경 중기 강자들도 수련 경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상계의 선기(仙氣)가 천정을 가득 채웠고, 천정 곳곳에서 희귀한 나무들이 미친 듯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약밭 곳곳에 영초와 영화들이 빠르게 자라났고, 자예구심란(紫蕊九心蘭) 한 포기에 달린 꽃잎이 옅은 보라색에서 짙은 보라색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단 몇 번 호흡을 할 사이에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어졌고, 곁가지에서도 꽃봉오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영초는 그렇게 순식간에 몇 배나 더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