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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877화 (877/916)

877화. 비승

석목은 눈에 이채를 흘리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연나와 속승이 현계지문으로 들어가자 하얀빛이 사라졌고, 문은 원래대로 고요해졌다.

대군들은 열띤 토론을 이어나갔다.

대군들은 힘이 없어 시험을 통과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현계지문으로 들어가 상계로 비승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할만 했다.

우르릉!

이때, 허공에 나타난 현계지문이 격렬하게 흔들리면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윽고 천천히 닫혔다.

“아, 현계지문이 닫히려고 해!”

“우린 들어갈 수 없겠지……”

“현계지문이 열리는 걸 본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래.”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소리를 지르면서도 아쉬움을 버리지 못했다.

“석두, 상계로 오르는 걸 포기한 게 후회되지 않을까?”

석목의 어깨에 앉아있던 채아가 물었다.

석목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채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만약 석목이 상계로 비승하게 된다면 채아는 석목의 영총이라 함께 비승할 수 있었다.

이윽고 묵직한 소리가 허공에서 울려 퍼지며 현계지문이 철저히 닫히더니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모든 게 다시 평온하게 바뀌었고, 하늘은 투명하고 맑았다.

석목은 제자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군들도 막연한 기색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미 천정은 사라지고 없어져 모든 일이 끝이 났지만 오히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 속에서 누군가가 날아 나와 석목의 옆으로 다가왔다.

“석목 맹주, 제준은 이미 죽었고 천정은 사라졌으니 우리 청란성지 사람들은 이제 동성성으로 돌아가겠네. 잘 지내시게.”

풍리가 손을 굽히며 말했다.

석목은 그제야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예, 청란 성지는 풍 형의 손에서 앞으로 더 번성할 날만 남았겠군요.”

석목이 말했다.

“맹주께 좋은 기운을 얻어가겠네.”

풍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성역들은 지금 공간의 힘으로 둘러싸여 있을 거예요. 천정도 마찬가지지요. 공간의 힘은 너무 단단해 뚫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만약 성역을 드나들려면 아마 많은 방해를 받을 테니 동성성으로 갈 때 고생을 좀 하시겠군요.”

석목이 말했다.

“괜찮네. 이미 사람을 보내 알아보라고 했는데, 각 성역으로 오가는 전송진법은 제대로 작동이 된다고 하더군. 동성성으로 돌아가는데 문제가 되지 않을 걸세.”

풍리가 대답했다.

석목은 눈썹을 치켜뜨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지내시게!”

풍리는 석목을 향해 손을 굽히고는 다시 청란성지의 제자들을 이끌고 천문 전송진으로 날아갔다.

“석 맹주님, 우리도 가보겠습니다.”

흑마 성역에서 온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손에 칠보묘수를 들고는 석무애와 같은 마존들을 이끌고 다가와서는 말했다.

“또 보자.”

석목은 칠보묘수를 바라보니 눈에서 이채가 스쳤다. 그리고 다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 일족의 대군도 먼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충오는 사람 모양으로 변신하여 부하를 이끌고 다가왔다.

“석목 존상, 백원 존상의 원한은 이미 갚았으니 우리의 소원도 이뤄졌습니다. 전부 존상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충오는 눈에 더는 원한이 맺힌 기색이 없이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큰 짐을 내려놓았을 때 보이는 그런 평온한 기색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인가?”

석목이 물었다.

“존상께서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은련성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충오가 말했다.

“그래, 거긴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니 번거로운 일은 없겠구나. 무릉도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너희에게 아주 적합한 땅이야. 하지만 알다시피 은련성엔 성계 전송진이 없구나. 돌아가려면 꽤 번거로울 텐데 내가 도와줄까?”

석목이 물었다.

“존상께서 배려를 해주시니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우리에겐 돌아갈 방법이 있습니다. 존상님, 다음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지시만 내리시죠.”

충오는 금색 진반 하나를 석목에게 건네줬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반을 받았다.

그렇게 은련성에서 온 요족들은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이곳에는 이제 미천 연합의 대군과 천정의 패잔병들만 남았다.

석목은 대장로와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로들이 곧장 석목에게로 날아왔다.

“맹주님.”

대장로를 비롯한 장로들이 인사를 올렸다.

“모든 일이 끝났군요. 우리와 천정 사이에 맺힌 원한도 이미 끝을 맺었지요. 그동안 너무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종족 사람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제대로 쉬실 때입니다.”

석목이 담담하게 말했다.

대장로를 비롯한 장로들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심신이 매우 고되었을 터라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만 했다.

“맹주님, 천정은 이미 멸망했지만 여기 남은 영기는 아주 짙군요. 우리가 모두 여길 떠나면 버려진 땅이 될 텐데, 너무 아깝습니다.”

대장로가 말했다.

석목은 멈칫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여기에 남고 싶은 종족들은 남으라고 하시죠. 제게 물어볼 필요 없이 알아서 논의하시면 됩니다.”

석목이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대장로와 육규종을 비롯한 장로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제 장로들은 각자 종족을 위해 어떻게 최대한 많은 땅을 이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만 했다.

천정에 흐르는 영기는 아주 짙어 다른 행성보다 훨씬 농후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면 실력이 크게 강해질 터였다.

“연합에서 처리할 일은 두 분께 맡기겠습니다. 저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당분간 미천 연합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예요.”

석목이 말했다.

장로들은 그 말을 듣자 멈칫했지만 석목은 미천 연합에서 이미 신과 같은 존재라 그가 하는 말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

석목이 계속 말을 이어가고 싶어 하지 않자 장로들은 곧장 자리를 떠났고, 각자 종족으로 돌아가 천하 성역으로 돌아갈지 천정에 남을지 논의를 거쳤다.

그리고 다들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

미천 연합의 대군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대군은 천문 전송진으로 향했으나 대부분은 이곳에 남아 천정 곳곳으로 흩어졌다.

천정의 패잔병들도 미천 연합이 이끌고 갔기에 이 자리에는 석목 혼자만이 남았다.

석목은 더는 미천 연합이 어찌 움직이든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제 백원왕과 약속한 일을 전부 끝마쳤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석목은 너무 많은 걸 희생했다. 심지어 석목은 종수마저 잃어버려 찾지 못했다.

이제 모든 일을 마쳤으니 석목은 이제 자신을 위해 살고 싶었다.

석목은 고개를 들고는 복잡한 표정을 드러냈다.

“종수,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석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종수가 어디에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석목은 이미 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자라 할 수 있었지만 이 망망한 별바다에서 종수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석두, 종수 누나가 천정에 잡힌 게 아니라면 아마 도망갔을 거야. 그러니 아직 살아있을 거야. 살아만 있다면 꼭 찾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채아가 석목을 위로하며 말했다.

“위로하지 않아도 돼. 종수는 아직 살아있어. 지금 어디에 묶여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천정과 이렇게 큰 전쟁을 벌였는데 종수가 모를 리 없어. 꼭 찾아내야만 해.”

석목이 채아의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그리고 석목이 돌아서서 천정을 떠나려고 하던 순간, 발밑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파란빛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극도로 차가운 힘이 파란빛에서 뿜어져 나와 허공마저 얼어붙었다.

석목은 몸을 날려 수백 장 멀리까지 날아가 파란빛을 피했다.

“뭐야? 누구야?”

채아가 소리를 질렀다.

“이건……”

석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땅이 폭발하면서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크기가 수십 장에 이르는 파란 교룡이 땅속에서 튀어나왔다.

용은 몸통이 파란색이었고 파란 수염을 드리운 채 금색 눈을 빛냈다. 이런 교룡은 평범한 교룡과는 완전히 달랐고, 성스러운 성수라는 느낌마저 물씬 풍겼다. 물론 이 용은 다름이 아니라 수령자의 혼이 깃든 한리였다.

“수령자! 살아있었다니.”

석목은 깜짝 놀랐다.

석목은 만령현문대진의 진안 속에 갇혀있을 때, 오행의 영기가 여러 번 폭발하자 몸속에 지니고 있던 몇몇 법보와 분신을 저장 반지에 넣어두었었다. 그러나 저장 반지와 영수 주머니와 같은 물건들은 요동치는 만령현문대진의 원기 난류 속에서 전부 사라져버렸다.

수령자는 영수 주머니에 있어 이미 죽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직 살아있었다니.

뿐만 아니라 수령자는 실력이 크게 강해져 이미 신경 중기에 이르렀는데 아마 상계의 선기를 흡수했을 터였다.

한리는 홍황유종의 강력한 힘을 타고났기에 수령자가 이 짐승을 본 순간 망설이지 않고 회생을 한 이유가 충분했다.

“흥, 내가 누군가. 나는 수많은 비술과 공법을 지니고 있는데 고작 그따위 원기 난류로 나를 죽인다고? 하하하!”

수령자가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석목은 수령자를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상고 시대부터 내려온 낡은 골동품과 같은 존재라 수령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수단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석목은 수령자가 땅속에 숨어있는 것조차 몰랐다.

수령자 이놈은 만령현문대진에서도 도망갈 수 있는 놈이라 기운을 숨기는 일쯤은 아마 식은 죽 먹기였을 터였다.

“너, 이 도마뱀 같은 놈은 왜 나타난 거야? 한기로 우리를 공격하려는 거야? 석두, 저놈은 착한 놈이 아니니 신경을 쓰지 말고 어서 종수 누나를 찾으러 가자.”

채아는 적의가 가득한 눈으로 수령자를 노려보다가 석목에게 말했다.

석목은 차분한 표정으로 수령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실력이 크게 늘어 천하를 휘젓고 다닐 수도 있을 텐데 왜 나온 거야? 내가 떠나면 때마침 마음대로 떠돌아다닐 수도 있었잖아?”

“후후, 이놈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그래도 우리가 보낸 시간이 있는데 떠난다고 해도 너와 인사 정도는 나누고 가야지. 그리고 나는 너와 헤어질 생각이 없어.”

수령자가 파란빛을 반짝이며 다시 몸을 줄였다. 그리고 채아와 똑같은 크기로 변하여 석목의 또 다른 어깨에 앉았다.

“야, 얼음 도마뱀. 거기 앉지 마. 석목의 어깨는 내 자리야. 어서 꺼져!”

채아가 화를 내면서 깃털을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입을 벌려 푸른 화염을 날려 수령자를 태우려고 했다.

수령자는 후후 웃으며 입을 벌려 파란 한기를 날렸다.

쩍!

채아가 날린 푸른 화염이 순식간에 얼음으로 변하여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채아는 눈에 차가운 빛이 반짝였다.

“됐어. 싸우지 마. 수령자, 할 얘기 있으면 빨리 말해. 시간이 없으니까.”

석목이 손을 흔들어 노란빛으로 둘을 갈라놓으며 말했다.

수령자는 입이 찢어질 듯이 웃더니 파란빛을 반짝이자 미간 사이에 투명하고도 현묘한 부문이 나타났다.

이어서 수령자가 다시 입을 벌려 파란 부문으로 정혈을 날리자 투명한 부문이 석목의 앞에서 떠다녔다.

옅은 계약의 힘이 투명한 부문에서 흘러나왔는데 그건 영수로서 신혼이 연결되는 계약이었다.

“무슨 뜻이지?”

석목은 부문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채아는 가장 걱정하는 일이 벌어져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수령자를 바라보았다.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계약이지. 네 영수가 될 거야.”

수령자가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수령자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수령자도 닦달하지 않고는 차분하게 기다리며 석목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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