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879화 (외전) (879/916)

외전 1화. 그리움을 속삭이다

수백 리나 깊은 동해에 뜬 넓은 섬, 바다의 날씨는 아주 변덕스러워 한겨울인데도 섬에는 나무가 무성히 자라나 하늘을 찔렀다.

섬에서 자라는 나무는 전부 평범한 나무였고, 영초나 영재는 없었기에 백 년, 천 년 동안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원시적이고 황폐한 모습이었다.

이 섬 깊숙한 곳에 대나무로 지은 아름다운 오두막이 몇 채 서 있었고, 드문드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오두막 주위는 한적한 대나무 숲이라 바닷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대나무가 파도 소리를 내면서 맑고 그윽한 향기를 풍겼다.

먼발치에서 몇 줄기 빛이 날아와 오두막 앞으로 내려왔고, 오두막 앞에 남자 한 명과 여자 세 명이 나타났다.

젊은 남녀 중에 남자는 푸른 옷을 입고 있었고, 키가 훤칠했다. 또한 외모는 그리 잘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아주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푸른 옷을 입은 남자의 옆에는 어여쁜 소녀가 붙어있었는데 둘은 매우 친밀해 보였다.

또 다른 두 여인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리고 미모가 아리따운 두 여인 중에 한 명은 하얗고 긴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웠고, 또 한 명은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매우 요염했다. 그렇게 모인 네 사람은 석목과 종수, 그리고 서문설과 금소채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둘이 대화나 나눠. 방해하지 않을게.”

서문설은 석목과 종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곧장 대나무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금소채는 씩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석목을 한 번 쳐다보고는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서문설을 뒤따랐다.

대나무 숲 앞에 석목과 종수만 남았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차분한 표정을 내비쳤다.

종수는 서문설이 있는 오두막을 한 번 쳐다보고는 복잡한 기색을 드러냈다.

“여기서 지냈어? 좋아 보이네.”

석목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들어가서 얘기해요.”

종수는 석목을 끌고 근처의 또 다른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미소를 머금고 종수를 따라갔다.

종수는 매우 소박한 곳에 살고 있어 방 안에는 화려한 장식 없이 탁자 한 개와 의자 몇 개만 놓여있었다. 그러나 가구들은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 신경을 써서 다듬어진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서방님, 잠깐 앉아계셔요.”

종수가 석목을 침소로 안내한 후에 의자에 앉으라고 말하고는 곧장 다과를 가지러 가려고 할 때였다.

석목이 종수의 손을 덥석 잡고는 살짝 끌어당기자 그녀는 힘에 이끌려 석목의 품에 안겼다.

“서방님, 안돼요. 오두막 주변에는 금제가 없어요……”

종수가 얼굴을 붉힌 채 석목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석목이 옷자락을 휘둘러 몇 갈래 빛을 날려 노랗고 옅은 광막을 펼쳤다.

그러자 종수는 한껏 붉힌 얼굴을 석목의 품에 묻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서문설은 창가에 앉아 종수와 석목이 있는 오두막을 바라보았다.

노란 광막이 다락방을 드리우자 맑은 서문설의 눈빛에 복잡한 기색이 어렸다. 그리고 서문설은 다시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보기만 하면 뭐할 거야. 이제 저 녀석이 돌아왔으니 네겐 마지막 기회야. 또 놓칠 거야?”

이때, 금소채가 서문설의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서문설은 금소채가 하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자리에 앉았다.

* * *

반나절 뒤, 안방에 놓인 큰 침상 위에서 종수가 살짝 달아오른 낯빛으로 석목에게 기대고 있었다.

“수아, 천봉 일족이 봉변을 당했을 때, 어디에 있었어? 어떻게 남해성에 오게 된 거야?”

석목은 종수를 가볍게 안고는 향기로운 체취를 맡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석목은 줄곧 의문이 풀리지 않았으나 종수를 만난 기쁨으로 가득 차 이제야 그 말을 꺼냈다.

“서방님, 많은 일이 있었어요. 천정이 천봉 일족을 기습했을 때, 저와 사부님, 그리고 조현기는 함께 비밀 석실을 통해 주작성에서 벗어났지요. 사부님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천정에게 목숨을 빼앗겼어요.”

종수가 한숨을 내뱉으며 슬픔에 잠겨 말했다.

석목은 종수를 꽉 껴안았다.

종수는 한참 후에야 다시 차분해졌다.

“계속 얘기해 볼까?”

석목이 물었다.

“그리고 저와 현기는 천정에게 포위되었지요. 그 순간 절망에 빠져버렸는데 그때 우리의 길을 막고 있던 천정의 우두머리는 서문 언니였어요.”

종수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웃으면서 말했다.

석목은 멈칫하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이제 끝이라 생각했는데 서문 언니가 갑자기 천정 놈들과 조현기를 죽여 버린 거예요. 그리고 저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가서 가두어버렸죠. 그렇게 천정으로 끌고 가지 않고서 은밀하고 안전한 행성에 숨겨주었어요.”

종수가 계속해서 말했다.

석목은 그 사실을 알자 놀란 마음을 한참 동안 추슬렀다. 그제야 석목은 모든 의문이 정리된 것 같았다.

“저는 그때 서문 언니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원망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조현기가 천정의 사람이었죠. 우리가 도망치던 비밀 통로도 조현기가 천정에게 소식을 흘린 거예요. 그러니까 사부님은 조현기의 손에 죽은 셈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래도 서문 언니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구해줬는데 그때는 진실을 몰랐기에 언니에게 심한 말도 많이 했어요.”

종수가 자책하듯이 말했다.

“아니야. 수아는 몰랐으니까, 수아 잘못이 아니야.”

석목이 말했다.

종수는 다시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서방님, 서문 언니가 저를 구해준 이유는 다 서방님 때문이에요.”

종수는 웃는 듯, 아닌듯한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머쓱하게 코를 한 번 만지고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지만 속으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문설이 석목을 위해 이 정도까지 희생할 줄은 몰랐다.

만약 천정에게 들켜버렸다면 서문설은 처참한 결과를 맞이했을 터였다.

석목은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서문설에게는 무척 고맙지만 나와 그녀는 이미……”

종수가 곧장 석목의 입을 막아버렸다.

“서방님, 서문 언니는 서방님에게 깊은 정을 품고 있어요.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말을 내뱉으면 안돼요.”

종수가 심각한 투로 말하자 석목은 기분이 더욱 복잡해져 깊은숨만 내뱉었다.

“그리고? 어떻게 남해성에 오게 된 거야?”

석목은 곧장 화두를 돌렸다.

“서문 언니는 나를 은밀한 행성에 숨겨놓은 뒤에 천정을 배신하고 나를 데리고 떠나려 했어요. 그런데 천정의 병사가 쫓아왔지요. 병사들은 실력이 워낙 막강해서 우리는 상대가 되지 못했어요.”

종수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석목의 눈이 반짝였다.

제준은 아주 치밀한 놈이어서 서문설이 아무리 조심스럽게 행동했다고 해도 절대 그를 속일 수는 없었을 터였다.

“우리가 놈들에게 잡히려고 할 때, 묘공이라는 선배님이 나타나셔서 우리를 구해줬어요. 그리고 우리를 남해성으로 데려왔지요.”

종수는 눈에서 빛을 반짝였다.

“묘공! 스님이었던가?”

석목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세우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맞아요. 서방님, 그 사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종수는 석목이 그리 반응하자 깜짝 놀라 초조해하며 물었다.

종수는 묘공 스님을 아주 오래전에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수련 경지가 매우 낮을 때였다.

묘공은 석목과 어떤 원한이라도 맺은 것일까? 그렇다면 일이 꼬일 게 뻔했다.

“아니야. 그저 너무 신비스러운 사람인 것 같아서. 예전에 나와도 스친 적이 있었는데 도무지 누구인지 모르겠어.”

석목은 종수가 짓는 표정을 보더니 다급하게 위로를 했다. 그러나 묘공이라는 사람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종수가 다시 긴장을 풀었다.

“수아, 너 묘공이라는 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석목이 침묵을 깨며 물었다.

“저도 잘 몰라요. 우리를 남해성으로 데려다준 후에 사라졌어요. 떠나기 전에 서방님과 천정이 격전을 치르고 있으니 우리가 막무가내로 나간다면 천정에게 붙잡혀 오히려 서방님에게 방해가 될 거라며 이곳에서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어요.”

종수가 천천히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묘공이 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의를 품은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뒤로 계속 남해성에 있었던 거야?”

석목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우리는 계속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남해성에 큰 이변이 일어났지요. 지진과 광풍, 천재지변이 일어나 우리는 힘을 합쳐 서방님의 고향을 지켰어요. 그렇게 격변이 일어난 후로 남해성에는 공간 장벽 같은 게 한 층 생겼는데 너무 단단해서 아무리 뚫으려 해도 뚫리지 않았어요.

게다가 남해성의 성계 전송진법은 때마침 망가져 우리는 여길 떠날 수 없었죠. 그래서 숨어있기 시작했어요. 고향이 이곳에 있으니 서방님은 언젠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요. 그리고 백 년 만에 나타났네요.”

종수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석목은 마음이 따뜻해져 다시 종수를 품에 안았다.

종수는 석목에게서 풍기는 강렬한 남자의 기운에 한참 동안 취해있었다.

“서방님도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겠지요?”

종수가 물었다.

“많은 일이 있었어. 묘공이 한 말이 맞아. 나는 천정과 격전을 치렀고……”

석목은 그간 있었던 일을 종수에게 말해주었다.

제준을 죽이고 천정을 멸한 후에 현계지문을 열기까지, 그리고 성역에서 일어난 격변을 비롯한 모든 일들을 종수에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석목은 연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종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석목이 하는 말에 푹 빠져있었다.

“많은 일이 있었군요. 온 성역에 격변이 일어났으니.”

종수가 깊은숨을 내뱉었다.

“천지의 변화는 우리 같은 수련자들이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격변이 대성역에 사는 생령들을 철저히 소멸시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서방님, 저를 위해서 상계로 비승할 기회를 놓쳤다니. 정말 어리석군요!”

종수가 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내뱉었다.

“너를 찾지도 못했는데 상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겠어?”

석목은 종수를 바라보며 사랑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리고 수령자가 하는 추측이긴 한데 우리 현계와 상계 사이가 더욱 단단히 연결되어서 수련을 통해 상계로 비승할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 더는 힘들게 현계지문을 열 필요가 없이 비승을 할 길이 아직 열려있다는 뜻이겠지.”

석목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비승하려면 뇌겁을 겪어야 하잖아요? 서방님이 갖춘 실력은 막강하지만 그래도 아주 위험할 거예요.”

종수가 자책하듯이 말했다.

“후후, 수아,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뇌겁 같은 것쯤은 가볍게 뚫고 지나갈 수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석목은 종수를 안고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종수는 그대로 석목의 품에 안겨있었다.

한참 후에 종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방님, 우리 서문 언니를 만나서 이 일을 알려줘요. 아마 많이 궁금했을 거예요.”

석목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