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반도의 옛 모습
종수의 객실로 서문설과 금소채도 모이자 석목은 그들에게 천정과 치렀던 전쟁과 성역에 일어난 격변에 대해 말해주었다.
종수는 이미 들었던 일들이라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금소채는 온통 믿기지 않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을 살짝 벌렸다.
그와 반대로 서문설은 차분하고도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한쪽에 앉아있었다. 물론 눈에서 간간이 놀란 기색이 스쳤지만 곧장 평온함을 되찾아 마치 이 모든 일이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굴었다.
석목은 한참 동안 시간을 들여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말해주었다.
서문설의 영롱한 눈에서 빛이 반짝였지만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휴, 성역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별하늘의 구조도 변했다는 말이지.”
금소채도 침묵을 치키며 한참 동안 들은 내용을 생각하다가 천천히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세간에 일어난 일은 변화무쌍하지. 수련자가 아무리 뛰어난 경지에 이른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계에서 아주 작은 존재에 불과해. 먼지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석목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금소채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비아냥거렸다.
“몰라, 성역이 어떻게 변하든지 내가 이룬 경지와는 상관이 없어. 그런데 석목, 네 실력이 제준을 죽일 정도야? 이제 현계 제일 수련자라고 불러야 하나?”
“현계 제일 수련자? 과찬이야. 망망한 성역 세계에는 적잖은 고수들이 숨어있을 텐데 내가 어찌 감히 천하제일이라 하겠나.”
석목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사내라는 놈이 호언장담도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다니. 답답해. 우리 설아는 너를 남자답다고 하던데. 쯧쯧.”
금소채의 눈에서 이채가 스쳤다.
석목이 흠칫 놀라며 서문설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서문설은 금소채를 노려보더니 곁눈으로 빠르게 석목을 한 번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다시 황급히 떨구었다.
서문설이 가볍게 고개를 떨어뜨리자 귀가 붉게 타올랐고, 하얗던 목덜미마저 분홍색을 띄는 게 매우 아름다웠다.
“서방님은 원래 말을 신중하게 하는 편이지요. 그런데 저도 같은 생각이긴 해요. 서방님은 제준을 죽였으니 현계 제일 수련자라 불려도 과하지 않아요.”
종수는 눈에 빛을 반짝이며 석목과 서문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불쾌한 기분은 읽을 수 없었고,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의미 없는 대화는 그만하지.”
석목이 마른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려 흑마문을 비롯한 종문들이 처한 상황을 물었다.
이제 막 남해성으로 돌아온 석목은 이곳이 처한 상황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서문설은 눈에서 실망하는 기색이 스치더니 이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종수가 석목을 한 번 흘겨보았다.
이어서 종수는 동주 반도에 있던 종문들의 상황을 대략 석목에게 말해주었다.
예전처럼 일궁쌍문삼종(一宮雙門三宗)이라는 형세는 이미 크게 달라졌다.
그중에 천음종(天陰宗), 묘음종, 현무종처럼 예전에 크게 들어섰던 종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대부분이 몰락해 다른 신흥 종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특히 백 년 전에 일어난 격변이 큰 영향을 미쳐 몇몇 종문들은 이미 쇠락을 맞이했다.
다만 천음종과 묘음종이 가르치던 도법은 후손들이 물려받을 수 있도록 서문설과 종수가 몰래 도와주었다.
오히려 기존 종파 중에서도 흑마문과 풍화문처럼 그리 눈에 띄지 않던 종파들이 세력을 급격히 키워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 덕분에 이 두 문파들은 여러 지계 수련사가 지키고 있어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야만족들은 점점 몰락하여 야만족 황원에서도 깊은 곳으로 몰려 그 일을 계기로 흑마문과 풍화문은 더욱 번성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자 침묵만 지키던 서문설도 간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금소채가 눈알을 돌리며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
이때, 땅이 흔들리면서 오두막에 걸린 금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섬 근처 바다에서 파도가 치솟았고, 커다란 소용돌이가 수도 없이 몰려오면서 섬을 힘껏 내리쳤다.
“또 뭐야?”
금소채가 흠칫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서서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바다에서 치는 파도는 점점 더 커지더니 수십 장 높이까지 치솟았다.
파도 속에는 희미한 그림자들이 가득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를 공격하면서 다양한 빛을 뿜었다.
그들은 해족 무리 같아 보였는데 수련 경지가 매우 약했다.
“지난번에 분명히 경고했는데. 해족이 또 나타나다니. 게다가 싸움까지 벌여? 흥!”
금소채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음?”
석목은 먼 곳을 바라보며 눈에 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종수를 비롯한 세 사람은 어리둥절하여 전부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파도 속에서는 두 해족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한 쪽에는 해족이 일고여덟 명 정도 되었고, 주로 파란 복식을 입었다. 그리고 몸에 비늘로 만든 전투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수련 경지가 지계였다.
가장 앞에 있는 파란 궁장을 입은 수려한 여인은 수련 경지가 천위였다.
여인은 조개 모양 법보 두 개를 휘두르며 빛을 번쩍였는데 과연 품질이 좋은 법보였다. 그리고 손에는 파란 뱀 모양 지팡이를 들었고, 지팡이에서 강렬한 물 속성 파동이 흘러나왔다.
남해성에서는 그나마 강렬한 힘이었지만 이 해족들은 오히려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다. 또한 해족들 중 대부분은 부상을 당한 채 싸움을 벌여 얽히고설킨 상처 자국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궁장을 입은 여인은 지팡이를 휘둘러 바닷물로 넓은 수막을 펼쳐 상대방이 날리는 공격을 막고 있었다. 때문에 이 여인이 아니었더라면 그녀의 부하들은 진즉에 죽었을 터였다.
상대도 해족이었다.
하지만 상대 해족들은 용모가 매우 괴상했는데 온몸이 검은색이었고, 뾰족한 가시가 자라나 있었다. 그리고 눈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매우 흉악한 모습이었다.
상대 해족들은 스무 명 정도 되었고 대부분 수련 경지가 지계였다.
가장 앞에 선 사내는 용머리가 달려있고, 단단한 꼬리를 끌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미루어보니 교룡 해족인 것 같았다.
사내의 검은 몸에는 붉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그는 뾰족한 이를 전부 드러낸 채 포악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도 수련 경지가 천위였는데 이미 천위 중기에 이르러 궁장을 입은 여인보다 더 실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검붉은 안개가 사내에게서 흘러나와 몸에 희미하게 드리웠다. 그러자 안개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하하! 대장로님, 동해 해족은 이미 막다른 길에 들어섰군요. 그래도 이렇게 고집을 부리며 저항을 하시겠습니까? 제게 굴복하시면 제가 모든 바다를 거머쥐었을 때, 당신을 만인을 이끄는 제후로 만들어드리지요. 이런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는 게 아닙니다.”
교룡 머리 사내가 호탕하게 웃더니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사내의 목소리는 마치 철편을 긁는 것처럼 듣기 거북했다.
동시에 사내는 두 손을 흔들었는데 손에 그 어떤 법보나 무기도 쥐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열 손가락에는 독수리의 발톱 같은 뾰족한 손톱이 자라나 있었고, 싸늘한 기운을 풍겼다.
칙, 칙, 칙!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와 궁장을 입은 여인이 날린 공격은 전부 찢어져 버렸다.
“꿈 깨!”
궁장을 입은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손가락을 짚으며 지팡이로 바다에 파랗고 굵은 빛을 날렸다.
펑!
파도가 용솟음치며 부서지던 순간, 커다란 수룡이 바다에서 튀어나왔는데 크기가 족히 수십 장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룡에게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발을 허우적거리면서 사내를 덮쳤다.
궁장을 입은 여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이 비술을 시전하느라 많은 진기를 소모한 것 같았다.
여인이 수룡 비술을 시전할 때, 방패가 사라진 몇몇 동족들은 상대 해족에게 공격을 받아 피를 뿜으며 뒤로 밀려났다.
궁장 여인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서 수룡을 조종하여 사내를 덮쳤다.
“좋은 말로 할 때 듣는 편이 좋을 텐데! 이렇게 고지식해서야. 그럼 네놈의 종족들과 함께 죽어라!”
교룡 머리 사내는 눈에서 빛을 반짝였다.
사내가 두 손으로 법결을 짚자 두르고 있던 안개가 몇 배나 더 짙어져서는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더 많은 안개가 끊임없이 사내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사내가 입을 벌리고는 날카로운 빛을 날리더니 다시 법결을 짚었다.
검붉은 안개가 들끓으면서 붉은빛을 감고는 순식간에 안개용으로 변했는데 그 크기는 덮쳐오는 수룡과 비슷했다.
사내가 차갑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앞을 짚었다.
검붉은 안개용이 날아가는 순간, 두 갈래 공격이 부딪치면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두 마리 용이 격전을 펼쳤지만 안개용이 훨씬 가벼워 보였고, 동작도 매우 날렵했다. 이어서 안개용은 단번에 수룡의 목덜미를 물어버렸다.
파란 수룡이 포효하며 파란빛을 크게 드리우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던 순간, 파란 번개 구체가 수룡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굉음과 함께 안개용을 내리쳤다.
쾅!
수많은 번개 구체가 부서졌다.
검붉은 안개용은 격하게 흔들렸지만 터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궁장을 입은 여인이 믿기지 않는 기색을 드러냈다.
수룡 비술은 여인이 익힌 필살기였고, 수강신뢰는 위력이 아주 강력해 천위 강자라 할지라도 무턱대고 받아내지 못할 텐데, 안개용은 이토록 가볍게 막아냈다.
궁장을 입은 여인은 낮게 소리를 지르고는 파란빛으로 변하여 교룡 머리 사내에게로 날아갔다.
사내가 냉소를 지으며 법결을 바꾸었다.
그러자 검붉은 안개용에게서 핏빛 무늬가 나타나더니 붉은빛이 갑자기 짙어지면서 검은빛을 묻어버리고는 핏빛 용으로 변하였다.
부식된 기운이 핏빛 용의 몸에서 흘러나오자 파란 수룡을 감싼 보호 광막은 곧장 부식되었고,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금 둘은 수백 장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둘 사이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이내 석목이 나타났다.
석목은 궁장을 입은 여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석목은 다시 시선을 혈룡에게 던졌다.
“음!”
석목은 의아한 듯이 핏빛 안개용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핏빛 안개용에게서 빛이 번지다가 울퉁불퉁해지더니 이어서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살갗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는데 빛은 마치 줄줄이 뻗어오는 촉수와도 같았다.
수많은 빛줄기가 옅은 화염을 감고 날아와 강렬하게 부식시키는 기운을 풍겼다. 그리고 번개 같은 속도로 파란 수룡의 몸통을 뚫어버렸다.
수룡이 두른 보호 광막은 이미 절반 정도 부식되어 수많은 빛줄기가 수룡의 몸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파란 수룡이 처참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빛이 맹렬하게 번쩍이다가 곧장 어두워지더니 거대한 몸통이 단번에 터져버려 빛이 되어 흩날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연이은 변화가 일어났다.
궁장을 입은 여인은 빠르게 날아와서는 수룡이 터져버리는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랐다.
핏빛 안개용이 다시 궁장을 입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커다란 꼬리를 휘저으며 핏빛 잔영으로 변하여 궁장을 입은 여인 앞에 나타나 힘껏 내리쳤다.
궁장을 입은 여인은 깜짝 놀랐으나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기에 다급하게 두 갈래 법결을 날렸다. 그러자 두 조개껍데기 방패에서 빛이 번졌다.
펑!
핏빛 용 꼬리가 방패를 내리쳤다.
궁장을 입은 여인은 방패와 함께 날아가 버렸고, 한참 멀리 날아가서야 멈춰 섰다. 그리고 조개껍데기 방패에서 빛이 미친 듯이 번쩍였지만 간신히 일격을 막아내긴 했다.
방패가 공격을 막아냈지만 퍼져 나가는 힘 때문에 궁장을 입은 여인은 뒤로 밀려났다.
여인이 몸을 파르르 떨면서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