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883화 (883/916)

외전 5화. 질투

시간이 조금씩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또 반시진이 흘렀다.

짙은 파란빛이 가마를 감싼 채 차가운 빛을 흘려보냈다.

석목은 연이어 법결을 수십 갈래 날렸다.

가마에서 파란빛이 미친 듯이 번쩍이며 수십 번 튕기다가 안정되더니 파란빛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가마가 나타났다.

가마에 갈라진 균열은 이미 전부 복구되었고, 생김새 또한 바뀌었는데 비록 크기는 줄어들었지만 가마 위에서 흐르는 빛은 몇 배나 더 밝아졌다.

차가운 영압이 가마에서 흘러나왔는데 그 위력은 이전보다 훨씬 강력했다.

“네 수련 경지와 이 가마로 동해 해족이 다스리는 구역을 지키기엔 충분할 거야.”

석목이 손을 흔들자 가마가 날아나가 향주의 앞에서 멈췄다.

석목은 연기를 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지만 수련 경지가 신경에 도달하면 평범한 법보를 하나 만드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석 오라버니, 정말 감사해요.”

향주는 가마를 매만지며 다시 석목에게 인사를 올렸다.

옆에 있던 종수와 서문설은 미소를 머금고 서 있었지만 금소채는 또 콧방귀를 뀌었다.

“석 오라버니의 은혜를 꼭 가슴 깊이 새기겠어요.”

향주는 깊은 눈빛으로 석목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석 오라버니, 잘 지내세요.”

말을 마친 향주는 부하들을 데리고 먼 곳으로 날아가 바다에서 사라져버렸다.

석목은 향주가 떠나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 석목은 뛰어난 시력으로 멀리 떠나간 향주가 계속 뒤돌아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향주를 도와줬으니 예전에 받은 은혜를 갚은 셈이나 마찬가지라 이렇게 인연 하나를 끝맺었다.

“그만 봐. 저 여자를 안달나게 하고 싶으면 손가락만 까딱해도 바로 올 것 같은데?”

금소채가 비웃듯이 말했다.

“나랑 향주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벗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석목이 말했다.

“고작 옛 벗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대범하게 용혈고원단을 주다니. 그건 신경에게도 효과가 있는 단약이라고. 그런데 고작 천위 따위한테 주는 거야? 그리고 친히 법보까지 제련해주다니. 절대 가벼운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설아는 너를 도와서 종수까지 구해줬어. 그런데 네가 설아에게 해준 게 뭐야?”

금소채는 거리낌 없이 석목에게 말하더니 싸늘한 눈빛을 내비치며 질문했다.

석목은 금소채를 질책할 마음이 없어 눈에 빛을 반짝였다.

종수는 한쪽에 서서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석목이 종수를 바라보자 종수는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석목은 속으로 깊은숨을 내뱉었다.

“소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와 수아 동생은 자매나 마찬가지야. 구해준 건 당연한 일이지. 별다른…… 이유는 없어.”

서문설은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머뭇거리며 말했다.

“다른 이유가 없다고? 설아, 우리가 지금은 수아 동생과 친자매처럼 지내지만 예전에 네가 수아 동생을 구해줄 때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어.”

금소채가 서문설에게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서문설은 어떻게 말을 이어나갈지 몰라 얼굴만 더 붉혔다.

“수아 동생, 갑자기 할 말이 좀 생겼는데. 우리끼리 집에 가서 얘기 좀 나눌까?”

금소채가 눈에 빛을 반짝이며 종수를 끌고는 섬으로 날아갔다.

종수는 멈칫했지만 반항하지 않고는 금소채에게 끌려갔다.

석목과 서문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종수와 금소채는 빛으로 변하더니 사라져버렸다.

바다 위에는 석목과 서문설, 그렇게 두 사람만 남았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가벼운 파도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다. 또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가끔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모든 것이 고요하게 돌아왔다.

서문설과 석목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문설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이던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고는 석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서문설의 앞머리가 살랑이는 바람에 휘날렸으며 복숭아 같은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서문설을 바라보고 있자니 석목은 이유 없이 긴장감이 몰려왔다.

신경 후기 강자 열 명, 심지어 제준을 마주했을 때도 이런 긴장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위…… 위험을 떠안고 수아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천정을 공격할 때, 우선 너를 구해내려고 했어. 그런데 전장에 네가 없더라고. 진즉에 천정에서 도망갔더군.”

석목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문설은 눈에서 희열이 스치더니 분홍색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말을 꺼내려다 다시 삼켰다.

석목은 망설이다가 깊은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 모든 걸 꼭 기억할게. 하지만 너랑 나는……”

서문설의 하얀 얼굴이 어두워졌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그때 나는 수련의 길만 고집했었지. 스승님의 소원을 꼭 이뤄드리고 싶었어.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천정에서 보낸 삶은 속고 속이는 삶이었어. 우리가 엇갈린 건 우리의 운명이 그래서일 거야.”

석목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서문설이 먼저 말을 끊어버렸다.

서문설은 눈이 빨갛게 달아올라 얼굴에서 슬픈 기색이 스쳤다. 그렇게 말을 마친 서문설은 곧장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석목은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예전에 빗속에서 이별하던 장면이 다시 석목의 눈앞에 떠올랐다. 이어서 석목은 머릿속이 번쩍이더니 월신과를 먹은 후에 마주했던 풍경이 떠올랐다.

“설아, 예전에 통천선교에서 헤어지고 나서 내가 떠나간 후에 나를 찾으러 왔었어?”

석목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서문설은 허공에서 멈춰 서서는 침묵하다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바람이 가볍게 불면서 서문설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히자 석목은 가슴이 일렁거렸다.

서문설은 석목이 짓는 표정을 읽고는 눈에 빛을 반짝였다. 그렇게 슬픈 마음이 조금은 가신 것 같았다.

“내게 마음이 없는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서문설이 석목을 등지고는 말을 이었다.

“설아, 오해가 있었어. 이번에 현계지문이 열리면서 천지의 규칙이 이미 바뀌어서 상계와 이 세계 사이에 연결이 더욱 단단해졌어. 그래서 나는 현계지문으로 비승하지 않았지만 내가 이룬 수련 경지라면, 상계에서 쏟아지는 뇌겁을 잘 버텨낸다면 상계로 비승할 수 있어. 물론 실패하면 죽음뿐이겠지만.”

석목이 깊은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석목은 뇌겁 비승과 관련된 일을 종수에게 말했지만 서문설과 금소채에게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서문설은 계속해서 표정이 바뀌었다.

그동안 석목은 일부러 수련을 하지 않았지만 진선지체가 거의 원만에 이르러 일부러 수련하지 않는다고 해도 수련 경지가 여전히 천천히 강해져 눈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이제 석목은 수령자가 물려준 봉인으로도 더 이상 기운을 누를 수가 없게 되었다.

석목은 뇌겁이 곧 다가오리라는 걸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늦으면 백 년, 빠르면 아마 이삼십 년 안에 올 터였다.

이 시간은 평범한 인간에게는 아주 긴 시간이지만 석목과 같은 수련자들에게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 단 한 번 폐관 수련을 하면 사라질 시간이었다.

“어찌 됐든 내게는 시간이 많지 않아. 수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네 생각을 들어보고 싶어.”

석목이 정중하게 물었다.

서문설은 마음이 차분해졌지만 석목이 하는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렀다.

“넌 정말 석두야!”

석목이 넋을 놓던 사이에 서문설이 하얀빛으로 변하여 먼 곳으로 날아갔다.

석목은 서문설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조금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서문설이 섬에 놓인 커다란 돌 위에 서 있었다.

노을이 붉게 타오르며 바다를 금빛으로 물들여 마치 금을 한 층 뿌린 것만 같았는데 그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혼자서 뭐해?”

금소채가 뒤에서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서문설은 금소채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계속해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오늘 왜 그랬어?”

서문설이 물었다.

“왜 그랬냐고? 다 너를 위해서 그랬지. 내가 그런 말을 하는 동안에 석두 녀석 반응을 봤는데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더라. 아직도 네게 정이 남아있다고 쓰여 있더라니까? 그래서 너희에게 기회를 마련해준 거지. 그런데 네 표정을 보니 그 석두 녀석이 또 눈치 없이 멍청한 말만 해댔지?”

금소채가 웃으며 말했다.

“멍청한 말? 맞아. 그 사람은 수련을 할 때 말고는 모든 순간이 다 멍청해.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서문설이 깊은숨을 내뱉자 이전에 숲에서 우연히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금소채가 흥분하며 물었다.

“석목이 예전에는 어땠는데? 전에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성역 제일 강자라니 첫사랑이 궁금해지는군.”

둘은 조용히 뒷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석목 그놈이 이렇게 눈치가 없으니 너도 바보같이 기다릴 수는 없잖아? 천정은 이미 무너졌고 우리는 석목에게 도와달라고 해서 성계 전송진법을 복구한 후에 남해성을 떠나서 성역을 떠돌아다니는 건 어때? 우리가 갖춘 실력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겠지.”

금소채가 갑자기 서문설의 손을 붙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천천히 말했다.

서문설이 손을 빼면서 호통을 쳤다.

“너 또 시작이야.”

금소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그라지더니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 일은 내가 해결해 줄게.”

금소채가 갑자기 자리를 떴다.

서문설은 금소채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녀가 이미 떠나고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 * *

종수가 머무는 거처.

석목은 창가 자리에 놓인 대나무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창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대나무 잎이 흔들리며 쓸리는 소리만 날뿐, 매우 고요했다.

그러나 유유자적한 바깥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석목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종수가 걸어들어왔다.

종수가 들어오자 석목이 일어서며 물었다.

“수아, 금 아씨가 왜 너를 찾은 거야?”

“소채 언니가 서방님과 서문 언니가 처음 만났을 때 겪었던 일을 말해주었어요.”

종수가 조금은 야박하게 말했다.

“운명의 장난이었지. 그 일은 언젠가 수아, 네게 말해주려고 했어.”

석목이 말했다.

“내가 질투할까봐 걱정인 거죠? 예전에 서방님이 서문 언니를 찾아갔다가 돌아와서는 계속이 기분이 좋지 않았잖아요? 이번에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서방님이 서문 언니에게 정이 남아있다는 걸 제가 모를 리 없지요.”

종수가 말했다.

“서문 언니는 우리 부부를 여러 번 구해줬어요.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서문 언니를 더 잘 알게 되었고요. 결국 금 아씨까지 난감하게 됐네요.”

“수아, 그게……”

석목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섬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 저는 하루하루 서방님이 어서 우리를 찾아오기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서방님이 돌아왔을 때, 서문 언니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지요. 그리고 다짐했어요. 만약 서방님이 안전하게 돌아올 수만 있다면 서문 언니와 함께 서방님 곁에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서방님이 정말 공간 벽을 뚫고서 제 곁에 이렇게 나타났군요.”

종수가 천천히 말했다.

“서방님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제 소원은 이룬 셈이나 마찬가지예요. 이제 내 말만 잘 들어요. 저는 먼저 나가볼게요.”

말을 마친 종수는 석목이 말하기도 전에 날아가 버렸다.

“서방님이 어머니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니 후회하면 안돼요.”

문밖에서 종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머리가 복잡해진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놈아, 양옆에 처와 첩을 껴안게 생겼네? 이건 모든 사내들이 꾸는 꿈이 아니더냐. 이 늙은이도 질투가 나는군.”

이때, 석목의 허리춤에 있던 파란 조롱박에서 수령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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