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884화 (884/916)

외전 6화. 흑염 부족

조롱박에서 파란빛이 흘러 다니며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수많은 빛이 조롱박 주변을 맴돌았다.

이 조롱박은 석목이 행성 곳곳을 떠돌다가 기후가 악랄하고 일 년 내내 얼음으로 뒤덮인 어느 행성에서 찾은 보물이었는데 조롱박 속에는 극도로 순수한 한기가 들어있었다. 그래서 석목은 이 조롱박을 영수 주머니로 제련해 그동안 수령자는 계속 조롱박 안에서 수련했다.

채아도 석목이 지닌 또 다른 영수 주머니에서 수련하고 있었지만 이미 몇 년이나 나오지 않아 석목은 조금 놀랐다.

“내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빨리 수련이나 해. 구원빙화선법(九元冰火仙法)은 어디까지 수련했어? 천겁을 맞이할 날도 이제 멀지 않았어.”

석목이 말했다.

“걱정 마. 이미 팔 할은 끝냈으니. 천겁이 오기 전에 원만은 아니더라도 구 할 정도의 위력은 낼 수 있을 거야.”

수령자가 말했다.

구원빙화선법은 수령자가 익힌 비술로 상계에서 전해진 선술(仙術)인데 위력이 막강했다. 그러나 물과 불을 정교하게 수련한 두 명이 힘을 합쳐야만 시전할 수 있는 아주 희귀한 공격 선술이었다.

불의 법칙은 석목이 이미 수련했으니 이제 수령자가 물의 법칙을 수련하면 되었다.

이 선술은 석목이 천겁을 막아낼 수단 중에 하나라 수령자는 석목의 영수이므로 천겁을 마주해 함께 공격할 때 무리가 없을 터였다.

“이번에는 허풍이 아니길 바랄게. 지난번에 말한 봉인 비술은 천하에 둘도 없는 것이라더니 제대로 효과도 내지 못했어.”

석목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후후, 그건 사고였지, 사고. 네 수련 경지가 이렇게 빠르게 강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어. 진선지체가 봉인의 속박을 뚫어버리라곤 정말 생각지도 못했고.”

수령자가 멋쩍게 웃었다.

석목은 기분이 답답해 수령자와 계속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고개를 흔들었다.

수령자는 수련 경지가 이미 느려지는 경지에 이르렀는데 마침 수련에서 깨어났을 때,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수령자는 석목을 놀리면서 기분전환이나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석목이 과거의 일을 꺼내니 수령자는 창피하기만 해서 다시 조용히 들어가 버렸다.

바닷가에 솟은 암석에서 종수가 서문설 옆에서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서문설은 표정이 계속 바뀌다가 드디어 차분해졌다.

“언니, 서방님 성격은 언니가 잘 아시잖아요. 제가 상처를 받을까봐 그러는 거예요. 그날, 서방님이 언니를 찾으러 갔다가 돌아온 후로 계속 끙끙 앓고 있어서 저는 마음이 아주 아팠어요. 그러니 저를 봐서라도 서방님이 답답하게 구는 건 모른 척해주세요.”

종수가 말했다.

서문설은 눈에 투명한 빛을 반짝였다.

“수아, 그게……”

종수는 서문설을 보자 웃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밖에 너무 오래 있었으니 어서 돌아가요. 서방님은 우리가 싸울까봐 걱정하고 있을 거예요.”

종수는 서문설의 손을 끌고서 돌아갔다.

서문설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종수에게 이끌려갔다.

이때, 금소채가 대나무 숲에서 걸어 나왔다.

서문설과 종수가 손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던 금소채는 눈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 * *

석목이 이 섬에 온 지도 어느덧 이레가 지났고, 네 사람은 화기애애한 나날을 보냈다.

석목은 대나무 숲에 놓인 평대 한쪽에 앉았고, 종수와 서문설, 금소채가 맞은편에 앉았다.

석목은 그녀들에게 수련을 하며 익힌 깨달음을 가르쳐주었다.

서문설은 수련 경지가 이미 신경 중기에 올라 석목이 하는 말을 빠르게 익히는 편이었지만 종수와 금소채는 비교적 경지가 낮아 가르침을 전부 받아들이지 못해 조금 버거워했다.

“제일가는 수련자에게 가르침을 받으니 백 년 동안 수련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이룬 것 같네.”

금소채가 기뻐하며 말했다.

“수련을 하며 익힌 깨우침은 너희에게 알려줄 수 있어도 남해성엔 영기가 수련하기에 턱없이 부족해.”

석목이 말했다.

“서방님, 우리를 데리고 남해성을 떠나시겠다는 건가요?”

종수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석목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서문설과 금소채도 미소를 지었다.

“쉽게 공간 장벽을 뚫을 수 있을 거야. 너희를 데리고 공간 난류를 지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는 석목이 그녀들을 이끌고 이 외진 남해성을 벗어나리라 짐작은 했으나 석목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으니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에 원하던 말을 듣게 되어 다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남해성에서 백 년 가까이 묶여 살다가 이제 드디어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언제 움직일 거야?”

금소채가 가장 조급한 것 같았다.

금소채는 아직 신경에 도달하지 못했으나 며칠 동안 석목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경지를 돌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제 영기가 짙은 곳에서 수련을 하면 신경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이제 떠나면 또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니 이곳저곳 돌아다녀 보고 싶어.”

석목은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세 여인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백 년이라는 긴 시간도 기다렸는데 며칠쯤이야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석목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었다.

“드디어 여길 떠나는군. 오늘처럼 좋은 날에 함께 축배나 들자고.”

금소채가 기분 좋게 일어서며 말했다.

“소채 언니, 또 이상한 걸 하려는 거죠?”

종수가 웃으며 물었다.

서문설도 미소를 지었다.

종수와 서문설은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가끔 외출할 때 말곤 시간을 대부분 폐관 수련을 하면서 보냈다. 그러나 금소채는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틈만 나면 밖으로 떠돌아다니며 가끔가다 엉뚱한 제안을 하는 금소채 때문에 둘은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또 다행히 금소채가 있었기에 백 년이라는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다.

“이상하긴. 내가 아주 좋은 곳을 아는데 아마 이때쯤이면 거기서 재미있는 축제가 열릴 거야. 가서 구경이나 하자고.”

금소채가 눈을 희번덕이다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종수와 석목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서문설은 미간을 찌푸리며 머뭇거렸다.

“너희끼리 가서 놀아. 나는 그런 곳이 불편해.”

“안 돼. 내가 제안한 걸 넌 한 번도 들어 준 적이 없잖아? 오늘은 절대 도망가지 못할 거야.”

금소채가 서문설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래요. 기분 좋게 다 같이 가서 놀아요.”

종수도 웃으며 말했다.

종수가 하는 말을 듣자 서문설은 망설이며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도 때마침 서문설을 바라보고 있어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서문설은 얼굴을 붉히면서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서문설과 석목은 서로 마음을 확인했지만 이제껏 속마음을 한 번도 고백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서문설은 석목을 보면 예전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것만 같았다.

“그럼 그렇게 하자.”

금소채가 웃으며 눈알을 굴렸다.

* * *

야만족 황원에는 검은 산봉우리들이 줄줄이 이어져 산맥을 이루었다. 그리고 산봉우리들은 구름을 찌를 듯이 치솟아있었고, 마치 검은 도가 땅에 꽂혀있는 듯 보였다.

이 산맥은 도봉산맥(刀鋒山脈)이라 불리는데 도봉산맥에는 칼날을 날카롭게 만드는데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재료인 흑동(*黑銅: 구리의 원광을 녹여서 반사로나 전로에 옮겨 산화하고 정련한 것) 광석이 많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흑동 광석을 제련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고, 몇몇 종족들만 그 기술을 알고 있었다.

늦은 밤, 산봉우리 사이에 놓인 드넓은 골짜기에서 불길이 타올라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족히 만 명이나 되는 야만족이 골짜기에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불꽃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화톳불 주변에는 짙은 향을 풍기는 술과 고소하게 구운 고기가 가득 놓여 있었다.

야만족들은 산맥 근처에 칩거하는 흑염(黑炎) 부족인데 그들은 제련술이 아주 뛰어나 흑염 부족이 만든 무기는 야만족 황원에서 가장 유명했다.

오늘은 해마다 돌아오는 흑염 부족의 기념일인 화신절(火神節)이었다.

흑염 부족은 흑염 화신을 모셔 매년 이맘때쯤이면 흑염 화신이 내려준 은혜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온 종족이 모여 성대한 제사를 치렀다.

제사를 지낸 후에 흑염 부족은 축제를 즐겨 사람들마다 손에 손을 잡고서 마두금(*馬頭琴: 몽골족의 현악기)과 요고 소리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러면 악기 소리가 하늘까지 울려 퍼졌고, 축제 분위기는 더욱 짙어졌다.

화톳불 근처에는 나무 무대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원래 흑염 부족의 족장이나 신분이 고귀한 사람들이 앉는 곳이었다.

그러나 오늘 족장이 앉는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귀한 손님 네 명만이 앉아있었다.

한 명은 키가 훤칠한 청년이었으며 나머지 세 명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여인들이었다.

“풍국(風焗) 족장님, 갑자기 제 벗들을 데리고 와서 폐를 끼친 것 같군요.”

금소채가 웃으며 말했다.

“금 선녀님, 별말씀을요.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흑염 부족은 아마 지금 사라지고 없었을 겁니다. 당신은 우리 부족의 은인이시니 이렇게 와주셔서 오히려 우리에게 영광이지요.”

거무칙칙한 볼에 칼자국이 그어진 사내가 공손하게 한쪽에 서서 말했다.

“다행이네요. 족장님, 편하게 계셔요. 오늘은 편하게 놀러온 것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금소채가 웃으며 말했다.

사내는 머뭇거리다가 부하들에게 수발을 들라 명령을 내린 후에 다른 일을 보러 갔다. 물론 사내는 흑염 부족을 이끄는 족장이었기에 이렇게 중요한 날에는 친히 많은 일을 주관해야만 했다.

“후후, 소채 언니, 엄청난 대우를 받는 것 같네요.”

종수가 웃으며 말했다.

“몇 년 전에 너무 심심해서 남해성 곳곳을 떠돌다가 우연히 여기에 왔었어. 그런데 흑염 부족이 마침 큰 요수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내가 도움을 좀 줬지.”

금소채가 말했다.

“그렇군요.”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은 조용히 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세속으로 와 노는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흑염 부족이 추는 춤은 꽤 특별하고 재미있었다.

부족 사람들은 소박했으나 열정이 있었고, 그들은 석목 일행에게 많은 음식을 대접했는데 그중에는 과일도 있었다.

황원에는 식물이 많지 않아 고기보다 과일이 더 귀한 음식이었다.

“여러분, 천천히 드십시오.”

한 남자가 웃으며 다가와 금소채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곧바로 물러났다.

석목은 소뿔 모양 술잔을 들었는데 술잔 속에는 하얀빛이 살짝 맴돌고 있는 술이 가득 담겨있었고, 옅은 우유향이 풍겼다. 그렇게 석목은 말젖을 짜서 만든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술은 독하고 뜨거웠으며 향이 매우 짙었다.

석목은 너무 오랫동안 이런 음식을 음미하지 않아서인지 꽤 맛있어 다시 눈썹을 치켜세웠다.

서문설을 비롯한 세 여인은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 대신 춤 구경에 푹 빠져있었다.

“퉁퉁, 쾅쾅……”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화톳불 근처에 있던 흑염 부족 사람들의 춤사위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쿵, 쿵’대며 발로 땅을 내리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니 부족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는 기도를 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때, 금소채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흑염 부족은 제련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춤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종족이지. 매년 제사를 마친 후에 다함께 춤을 추는데 이 춤은 하늘에 감사를 전하는 춤이야.”

금소채는 흑염 부족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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