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구수도철(*九首饕餮:중국 신화의 괴물 중 하나.)
묘공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니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사님, 중요한 일로 오신 것 같은데 자리를 옮겨서 대화를 나누는 건 어떻습니까?”
묘공 스님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이 손을 흔들어 노란빛을 펼치고는 종수를 비롯한 일행들을 드리운 채 작은 섬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수백 리까지 멀어졌다.
묘공 스님은 옅은 금색 빛을 감고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묘공의 발밑에 금색 연꽃 허상이 나타나 스님도 빛을 그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석목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 * *
야만족 황원은 동해와 그리 멀지 않았기에 일행들은 순식간에 섬으로 돌아왔다.
“묘공 대사님, 이건 남해성의 특산품인 영차입니다. 품질이 뛰어나진 않지만 꽤 별미이니 한번 드셔보세요.”
오두막으로 들어온 후에 종수는 묘공과 석목에게 차를 내주었다. 그리고 서문설과 금소채를 데리고 함께 물러났는데 그녀들은 묘공이 석목을 찾아 왔다는 걸 눈치 챘다.
“대사님, 드시죠.”
석목은 영차를 가리키며 묘공을 향해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묘공은 찻잔을 들고서 한 모금 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님의 존함을 그간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역시 내공이 깊은 분이시라 경지를 전혀 읽어내지 못하겠더군요. 현계 공간에 이렇게 뛰어난 고수가 있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석목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석 도우, 과찬입니다. 실력이라면 도우님이 한 수 위지요.”
묘공 스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나저나 대사님,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석목은 겸손하게 대답을 하고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석 도우, 바로 알아차리셨군요. 그럼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중요한 일을 할 건데 도우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묘공 스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석목이 흠칫 놀랐다.
“무슨 일이시기에 실력이 막강한 대사님께서 이렇게 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겁니까?”
석목이 웃으며 물었다.
“모든 힘엔 한계가 있는 법이지요. 저 혼자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 이렇게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묘공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묘공 스님은 수아와 설아를 여러 번 도와주셨죠. 그리고 제게도 은혜를 베푸셨으니 대사님께서 부탁하신다면 무엇이든 해드려야지요. 무슨 일이신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실례지만 대사님은 대체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석목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채아를 구해주고 은련성에서 석목에게 은련심을 준 사람도 묘공 스님이었다.
석목은 묘공에게 악의가 없는 것은 확실했지만 워낙 실력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아, 물론입니다. 석목 도우님께 부탁하는 처지인데 물론 모든 내용을 다 말씀드려야지요.”
묘공이 석목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하자면 먼 옛날부터 시작해야겠군요. 그러나 제 출신이라면 아마 도우님도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을 하셨겠죠.”
묘공 스님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추측대로라면 대사님은 이미 진선지체가 원만에 이르셨겠지요? 하계에서 이 수준까지 수련을 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만.”
석목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저는 상계에서 왔습니다.”
묘공이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예측한 일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석목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상계로 비승하는 건 수많은 현계 공간 수련자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 꿈을 이룬 사람들은 거의 없어 진정으로 비승한 자들이라면 아마 백 년 전에 오른 속승과 연나뿐일 터였다.
그런데 눈앞에 앉은 사람이 상계에서 왔다고 하니 석목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는 상계 단광산(檀光山)의 극락불문(極樂佛門)에서 왔습니다. 상계에서 현계 공간으로 보낸 순찰자지죠.”
묘공 스님이 멈칫하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석목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묘공이 말한 곳을 마음에 새겨두었다.
상계라면 석목도 매우 동경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순찰자는 무엇입니까? 아무 일도 없이 현계로 내려오신 건 아닐 테지요?”
석목이 물었다.
“순찰자라는 건 상계에서 하계로 보낸 사자자요. 비밀리에 하계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해결하는데, 하계를 이루는 각 공간 위면은 상계를 받치는 기반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하계에 문제가 생기면 상계에도 영향을 미치지요. 과연 석목 도우님이 하신 말씀대로 저는 임무를 수행하러 내려왔습니다.”
묘공 스님이 후후 웃으며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
“그렇군요, 어떤 임무입니까?”
석목이 물었다.
“석목 도우님은 현계 공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묘공 스님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묘공은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석목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계 공간은 하계의 위면 공간 중 하나지요. 이곳에 어떤 특별한 점이라도 있나요?”
“후후, 현계 공간은 오랜 세월 동안 상계의 진선계에 속한 아주 작은 조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커다란 이변을 겪으면서 상계에서 추락해 지금처럼 변했지요.”
석목은 깜짝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그때 일어난 이변으로 현계 공간과 상계는 점점 단절되었지요. 그리하여 이 세계의 수련자들은 아무리 공을 들여서 수련해도 상계로 비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묘공이 계속해서 말했다.
석목은 현계 공간과 상계가 완전히 단절된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어 머릿속에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것 같았다.
“저는 상계에서 명을 받고 현계 공간과 상계를 다시 연결하려고 내려왔습니다.”
묘공 스님이 천천히 말했다.
“네? 그…… 그럼 당신은 혹시?”
석목은 더는 차분하게 앉아있지 못하고는 벌떡 일어섰다.
현계 공간과 상계를 단단하게 연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현계지문 뿐이었다.
현계지문은 연나, 속승, 제준을 가르친 사존이 그들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네. 보화를 포함한 세 사람은 하계에 내려왔을 때, 제가 처음으로 만난 자질을 갖춘 자들이었지요. 그래서 한동안 가르침을 주었으니 저를 세 사람의 사존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묘공 스님이 말했다.
석목은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더니 한참 동안 놀란 가슴을 전정시키지 못했다.
연나가 자신의 사존을 말할 때부터 석목은 그 사람이 매우 궁금했는데 그 사존이 바로 묘공 스님이었다니.
석목은 다시 묘공을 한 번 훑어보았다.
“현계지문을 여는 방법도 제가 알려줬지요.”
묘공 스님이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묘공 대사님은 수련 경지가 제준보다 훨씬 뛰어나시군요. 그런데 어째서 현계지문을 여는 일을 녀석에게 맡겼습니까? 직접 하시면 제준보다 더 빨리 여셨을 텐데요.”
석목은 다시 의문이 들었다.
“현계지문을 열면 현계 공간에 사는 수많은 생령들이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때문에 저도 빨리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현계 공간에 사는 수많은 생령들이 재난을 겪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더군요. 그리하여 계속 망설이다가 그 일을 현계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게 내버려 뒀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한낱 외인이니 이 세계에 사는 생령들의 운명을 결정할 자격이 없지요.”
묘공 스님이 한숨을 내뱉더니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염불을 외웠다.
묘공이 하는 말을 들은 석목은 실눈을 뜨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저 스님은 그럴듯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상계는 하계로 내려오는 선인들에게 엄격한 규정을 정해줘. 무슨 일이 있든지 선인은 하계에 사는 생령들에게 심한 피해를 줄 수 없어. 현계지문을 열면 수많은 생령이 죽을 테니 상계의 규칙을 어기는 일이야. 그러니 묘공 스님은 친히 움직이지 않고서 제준의 손을 빌려 계획을 이뤘지.”
석목의 머릿속에서 수령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계의 규칙을 네가 어떻게 알지?”
석목이 수령자에게 물었다.
“내 육신이 아직 살아있을 때, 한 동굴 속에서 상계와 관련된 서책을 읽은 적이 있어. 구원빙화선법도 그 서책에서 배웠고. 서책에 상계와 관련된 규칙들이 적혀있더라고.”
수령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석목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님께서 품으신 따뜻한 마음이 존경스럽군요. 허나 현계지문은 이미 열려서 현계 위면과 상계는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사님의 임무도 끝났을 텐데 어째서 아직 하계에 계십니까? 혹시 조금 전에 말씀하신 중요한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현계 공간과 상계가 다시 연결되면서 천지의 법칙에 이변이 일어나 현계 공간의 구도가 크게 변했지요. 그리고 이런 변화가 큰 재난을 가져왔군요.”
묘공 스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큰 재난이요?”
석목은 어리둥절해졌다.
“상급 진령(眞靈)이자 거대한 짐승인 ‘구수도철’. 이 짐승은 탐욕스럽기 그지없는데다가 날 때부터 공간의 힘을 조종하는 능력을 익혔지요. 게다가 만물을 삼킬 수도 있으니 상계에서도 이 짐승 때문에 여러 번 애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마리가 이곳으로 도망을 쳤어요.”
묘공 스님이 답답한 듯이 말했다.
“구수도철! 석목! 그 짐승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도철 혈맥을 지닌 진령 짐승은 상고 시기에도 두 번 나타났는데 전부 극도로 포악한 존재들이었어. 결국 성역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아 모든 성역에서 힘을 모아서야 간신히 내쫓았어.
게다가 도철 진령은 머릿수가 많을수록 실력이 막강한데 상고 시기에 나타난 두 마리 진령 중에 한 마리는 머리가 세 개인데다가 다른 한 마리는 머리가 다섯 개였어. 그러니 그 두 마리가 함께 나타난다 해도 머리가 아홉 달린 구수도철이 갖춘 실력을 따라가지 못할 거야. 잘 생각해봐. 비승하기도 전에 괴물에게 물려 죽을 수는 없잖아?”
수령자가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은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
“……구수도철을 죽이거나 쫓아내지 않는다면, 이 괴물은 아마 현계 위면을 전부 삼켜버릴 겁니다.”
묘공 스님은 석목이 짓는 표정을 읽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대사님께서 품으신 뜻은 저와 함께 그 도철 진령을 죽이거나 내쫓자는 말씀입니까?”
석목이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네. 석목 도우님의 진선지체는 거의 원만에 이르렀지요. 게다가 구전현공을 수련해 육신의 힘도 강력하기 그지없으니 실력은 이미 선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힘을 합치면 그 짐승을 죽일 수 있는 확률이 오 할은 될 테고, 못해도 현계 공간에서 쫓아낼 수는 있겠지요.”
묘공이 하는 말을 들은 석목은 다시 침묵을 지키며 한참 동안 말을 아꼈다.
“석 도우님, 혹시 걱정하는 게 있습니까?”
묘공 스님은 차분히 기다리다가 석목이 계속 말을 하지 않자 다시 물었다.
“묘공 대사님,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견식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구수도철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고 있죠. 머리가 아홉이라면 도철 진령 중에서도 정상에 오른 존재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친다 해도 아마 구사일생이겠지요?”
석목이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난감한 표정을 드러냈다.
묘공이 웃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금 돌아왔다.
“석 도우님, 역시 모르는 게 없군요. 구수도철은 상급 진령이 맞습니다만 제가 몇 번 겪어본 바로는 전해지는 말처럼 그렇게 무서운 존재는 아니예요. 그 짐승이 숨겨둔 실력이 더 있다고 해도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건 문제가 없을 겁니다.”
묘공이 정중한 얼굴로 말했다.
석목은 눈에 빛을 반짝이며 코를 한 번 매만지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