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수라(修羅) 성역 (1)
묘공 스님은 석목이 짓는 표정을 한참 보다가 무엇인가 다짐을 내린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구수도철과 같은 진령을 상대하는 일이니 도우님이 조심스러운 것도 전 이해합니다. 그러나 도우님, 곧 뇌겁을 뚫고 비승을 할 계획이시지요? 이렇게 하시죠. 도우님이 저를 도와주신다면 도우님께 보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보물은 천겁을 뚫고 상계로 비승할 확률을 높여줄 겁니다.”
“네?”
석목은 깜짝 놀라며 눈에 빛을 뿜어냈다.
비록 비승 뇌겁을 겪어본 건 아니지만 아마도 극도로 무서울 터라 석목은 왠지 계속 찜찜한 기분이 들긴 했다. 게다가 비승 뇌겁은 석목이 신경을 돌파할 때 겪었던 뇌겁보다 훨씬 강력할 터였다.
속승과 연나가 현계지문 앞에서 맞이한 뇌겁 시험은 뇌겁이라 할 수도 없었는데 그때는 현계지문이 이미 상계에서 내려오는 힘을 대부분 막아냈기에 그리 많은 뇌겁의 힘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석목은 상계로 비승할때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뇌겁이 쏟아질 터라 갖춘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묘공에게 뇌겁을 뚫고 지나갈 확률을 높여주는 보물이 있었다니!
묘공은 상계에서 왔으니 그런 보물이 있을 만도 했다.
묘공이 손을 흔들자 푸른색과 보라색 고리 법보들이 나타났다.
두 고리는 그릇만 했으며 매우 낡은 법보였는데 평범한 고리보다 조금 더 굵은 편으로 겉면에 올챙이 같은 기이한 빛이 새겨져 있어 묵직한 기운을 풍겼다.
두 고리는 각각 푸른빛과 보랏빛을 뿜고 있었고, 빛 속에서도 푸른색과 보라색 번개가 튀고 있었다.
위력이 뿜어져 나오진 않았지만 고리 주변 공간에서 파동이 일었다.
석목은 눈을 반짝이며 두 고리를 바라보았다.
“이 보물은 음양어뢰환입니다. 음과 양, 두 가지 기운과 천둥 속성 본원의 힘이 들어있지요. 때문에 모든 천둥의 힘을 흡수하는 힘이 있어 뇌겁을 뚫을 때 유용하게 쓰일 겁니다. 적어도 뇌겁에서 받는 힘 중에 삼 할 정도는 흡수하겠지요.
유일한 단점이라면 조종하기 번거롭다는 점인데 음양의 힘 또는 천둥 속성 본원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지요. 그런데 도우님은 구전현공을 수련했기 때문에 몸속에 이미 음양의 힘이 존재하니 이 보물을 사용할 때 문제가 없을 겁니다.”
묘공 스님은 눈에 아쉬운 빛을 내비치더니 손을 흔들어 두 고리를 석목에게 날려 보냈다.
석목은 노란빛을 날려 두 고리를 감쌌다.
석목이 눈에 빛을 반짝이자 빛 속에서 노란 빛줄기가 줄줄이 나타나 두 고리로 스며들었다.
그래도 한 번 시험은 해봐야만 했다.
묘공은 미소를 지으며 말리지 않았다.
노란 빛줄기가 닿는 순간, 두 고리에서 빛이 밝아지면서 꿈틀거리는 번개가 몇 배나 더 굵어져서는 놀라운 천둥소리를 냈다. 그리고 번개는 노란 빛줄기를 가볍게 찢어버렸다.
석목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검은빛과 하얀빛이 석목의 손가락에서 튕겨져 날아가더니 구전현공 음과 양의 힘은 각각 푸른빛과 보랏빛 고리를 감쌌다.
고리가 더는 흑백 빛을 밀어내지 않자 빛은 서서히 고리 속으로 스며들었다.
석목은 눈에 기쁜 기색이 스치더니 이어서 주문을 외우며 법결을 고리 속으로 날려 보냈다.
두 고리에서 나는 빛은 점점 밝아졌고, 번개는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석목이 다시 손을 흔들자 고리가 다시 석목의 손으로 날아왔다.
그런 광경과 마주하자 묘공은 조금 놀랐다.
석목은 예상보다 빠르고 쉽게 고리를 다스렸는데 이는 석목이 갖춘 음과 양의 힘이 묘공이 추측했던 수준보다 훨씬 순수하다는 걸 말해줬다.
묘공은 눈에서 이채가 흐르는 게 석목이 갖춘 막강한 실력을 보고서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물론 석목이 갖춘 실력이 강할수록 도철 진령을 해치울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역시 석목 도우에 어울리는 보물이군요.”
묘공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대사님,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석목은 대충 음양어뢰환을 한 번 제련해보았는데 과연 막강한 위력을 가진 보물이라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묘공은 보물이 못내 아쉽고 아까웠으나 그는 석목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이제 석목이 도와준다면 묘공은 훨씬 수월하게 구수도철을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이제 도철 진령을 쫓아버리고 현계 공간을 안정시키기만 한다면 묘공이 받은 임무는 끝나 그는 상계로 돌아가서 더 많은 포상을 받게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묘공은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그럼 어서 출발합시다. 도철 진령은 아주 작은 성역에 머무는 중인데 혹시라도 더 큰 성역으로 도망가게 된다면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묘공 스님이 일어서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석목은 음양어뢰환을 거두어들이고는 오두막에서 걸어 나갔다.
* * *
종수와 서문설, 금소채는 대나무 숲속에 선 정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석목과 묘공이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자 곧바로 일어섰다.
“석목 도우,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묘공은 세 여인을 한 번 쳐다보고는 석목에게 말했다. 그리고 묘공은 금빛으로 변하여 먼 곳으로 사라졌다.
석목은 멀어져가는 묘공을 바라보며 천천히 숲속으로 걸어갔다.
“수아, 설아, 남해성을 떠날 일정을 좀 미뤄야겠어. 묘공 대사님과 함께 해야 할 일이 있어……”
석목은 종수와 서문설에게 미안해하며 묘공 스님과 함께 구수도철을 해치워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도철 진령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종수와 서문설은 눈치가 매우 빨라 묘공 스님이 석목에게 부탁할 정도라면 매우 위험한 존재란 걸 직감했다.
두 여인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침묵을 지켰다.
“서방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종수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서문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내비쳤다.
“걱정 마. 너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니 꼭 안전하게 돌아올 거야.”
석목이 큰소리로 웃으며 두 여인의 손을 한 번씩 잡아주곤 이어서 묘공 스님을 쫓아갔다.
종수와 서문설은 석목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럴 필요 없잖아? 석목이 갖춘 실력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지금 현계 공간에서 석목과 맞설 상대는 존재하지 않아. 걱정 마.”
금소채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가볍게 말했다.
“서방님은 워낙 조심스런 사람이시니 별일 없을 거예요.”
종수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서문설은 걱정이 가시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 * *
천 리 밖에서 묘공과 석목이 나란히 날아 눈 깜짝할 사이에 반도 제국을 비롯한 세 나라를 스쳐지나 다시 야만족 황원으로 향했다.
묘공은 방향을 틀지 않았고, 계속해서 황원의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묘공 대사님, 구수도철은 작은 성역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난류를 뚫고 지나가지 않죠?”
석목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난류를 뚫고 지나가기엔 시간이 너무 빠듯해요. 작은 성역은 때마침 남해성에 있는 한 공간 비경과 연결이 되어있으니 그곳으로 간다면 더 빠르게 도착할 겁니다.”
묘공이 말했다.
석목은 의외라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도우님, 이제 대사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우리는 실력이 비슷한 것 같으니 이름을 부르시면 됩니다.”
묘공 스님이 후후 웃으며 말을 마치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석목도 묘공을 뒤따랐다.
둘은 백 묘 정도 되는 산골짜기에 내려왔는데 가까운 곳에 부문이 가득 새겨진 커다랗고 하얀 돌이 하나 서 있었다. 그리고 돌에 새겨진 부문들은 거대한 진법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석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다시 자세히 둘러보니 여긴 야만족 비경에 자리한 용사의 문이었다.
그러나 산골짜기는 심하게 무너져 커다란 균열이 여러 갈래 갈라져 있었는데 미루어보아 백 년 전에 일어난 재난 때문인 것 같았다.
골짜기에 놓인 커다란 돌들은 움푹 꺼져있었고, 굵직한 균열 여러 갈래가 온 산골짜기를 가로질렀다. 떄문에 커다란 돌들로 이루어진 대진은 철저히 망가져 있었다.
백마산 위에 선 야만족의 성전은 나름대로 상태가 괜찮았지만 예전만큼 빛나지는 않았고, 진법이 망가져 보초를 서는 사람조차 없었다.
“석 도우님, 예전에 이곳에 왔었지요?”
묘공은 석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아주 오래전에 초대를 받아 용사의 문에 들어가서 시험을 보았지요. 그런데 도우님이 말한 다른 성역의 비경과 연결된 곳이 이곳이겠지요?”
석목이 추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비경을 연결하는 대진은 이미 파손되었지만 석목은 공간 파동으로 용사의 문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네. 용사의 문이라. 이 비경의 이름인가요? 매우 어울리는 이름이군요.”
묘공 스님이 말을 하며 손을 흔들자 금빛 한 갈래가 날아 나와 금색 칼날로 뭉쳐서는 허공을 찢어버렸다. 그러자 찢어진 곳에 검은 공간 균열이 생겨 묘공은 틈 속으로 몸을 날렸다.
석목은 마지막으로 주변을 한 번 더 훑어보고는 균열 속으로 날아갔다.
* * *
석목은 눈앞이 희미해지더니 이어서 갑자기 숲의 상공에 나타났다. 그런데 주변은 까마득하게 어두웠다.
석목이 눈살을 찌푸렸다.
용사의 문이 자리한 비경은 전과 많이 달라졌고, 곳곳에서 기이한 붉은 안개가 흘러 다녔다.
예전에 비경에 들어왔을 때, 붉은 안개는 가끔 비경 속에 나타나던 혈무였는데 지금은 온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혈무 속에 묻혀있는 식물도 옅은 붉은빛을 띠고 있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광경이었다.
쿵!
숲에선 요수들이 어슬렁거리며 붉은 눈빛으로 살의를 풍기면서 석목과 묘공을 향해 포효했다. 다만 요수들은 전부 날지 못하는 요수들이라 밑에서 소리만 질러댔다.
용사의 문이 자리한 비경에 처음 들어왔을 때 흩날리는 혈무는 석목의 심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나 지금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석목이 흘러 다니는 붉은 안개 한 갈래를 붙잡았다.
안개에서 기이한 파동이 흘러 다녔는데 매우 익숙한 파동이었다.
“가시 해족?”
석목은 곧바로 익숙한 기운이 무어인지 알아차렸다.
가시가 돋아난 해족의 몸에서도 이렇게 기이한 기운이 흘렀는데 이곳에서 흐르는 붉은 안개와 매우 흡사했다. 아마도 그들은 이곳에 드리운 혈무로 인해 괴상한 해족들로 진화한 것 같았다.
용사의 문이 자리한 비경도 성역에서 벌어진 이변에 영향을 받았는지 공간이 매우 불안했다. 그러니 이런 환경에서 혈무가 흘러나오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건 수라 성역에서 스며들어온 수라 살기입니다.”
묘공 스님이 말했다.
“수라 성역……”
석목이 눈을 깜빡거리며 계속 같은 말을 되뇌었다.
수라 성역이란 이름은 처음 듣는 것 같았다.
“그리 크지 않은 성역이지만 아주 특별하죠.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천천히 이동할 수 있는 성역인데 도철 진령은 바로 이 수라 성역에 있습니다.”
묘공이 말했다.
“움직이는 성역……”
석목은 깜짝 놀랐다. 세상에 움직이는 성역이 존재했다니.
“그곳에 가보면 어떤 점이 특별한지 알게 되겠죠. 갑시다, 수라 성역과 연결된 공간 통로는 조금 더 깊은 곳에 있으니.”
묘공 스님은 곧장 앞으로 날아갔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갔다.
비경은 매우 커서 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만 리 가까이 날아갔지만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석목이 소년 시절에 들어왔던 곳은 용사의 문이 자리한 비경에서도 외곽 구역이었을 터라 그는 눈에 빛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