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명룡족(冥龍族)
“음, 저 원숭이는!”
묘공과 앞으로 날아가고 있던 석목은 원숭이를 보는 순간,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붉은 원숭이는 가시 달린 해족의 우두머리가 시전했던 소환 비술로 나타난 원숭이 환영과 똑같았다.
가시 달린 해족이 쓰던 머리뼈 법보는 눈앞에 보이는 붉은 원숭이의 머리로 제련한 법보였다. 그런데 가시 달린 해족이 어떻게 원숭이 머리를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용사의 문이 자리한 비경이 수라 성역과 남해성을 잇는 걸 떠올려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다.
석목과 묘공 스님은 은닉 신통을 부리지 않아 검은 복식을 입은 이족들은 둘을 보는 순간 안색이 변하여 동작을 늦췄다.
이때, 원숭이의 눈에서 빛이 번지더니 굉음과 함께 붉은 태양 허상이 떠올랐다.
태양 허상은 눈부신 빛을 뿜어냈고, 허공에선 폭발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윽고 막강한 힘의 파동이 태양 허상에서 흘러나와 허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원숭이가 팔을 휘두르자 태양 허상이 법보 그물을 내리쳤다.
쿵!
태양 허상이 폭발하면서 법보로 이루어진 그물이 찢어져 버렸다.
검은 복식을 입은 이족들도 뒤로 튕겨져 날아갔고, 그중 수련 경지가 가장 낮은 소녀는 피를 뿜어냈다.
원숭이는 눈에서 흉악한 빛을 뿜어내더니 거대한 몸통으로 포위망을 뚫고는 팔을 뻗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소녀를 덥석 잡았다.
소녀는 막강한 힘 때문에 속박되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이족들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족들이 갖춘 실력으로는 포악한 원숭이를 막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발 늦어버리는 바람에 소녀를 구할 수도 없게 되었다.
소녀가 곧 원숭이의 손에 잡혀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이때, 땅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노랗고 커다란 손이 뿜어져 나와 단번에 원숭이를 잡았다.
원숭이는 깜짝 놀라 울어대면서 근육을 더 크게 부풀리더니 털을 꼿꼿하게 세워 광폭한 힘을 터뜨렸다.
원숭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핏빛은 칼날, 구체 같은 모습으로 변하여 노란 손을 공격했다.
그러나 핏빛은 노란 손에 아무런 상처도 내지 못해 원숭이가 날린 공격은 마치 아주 작은 개미가 날린 공격과도 같았다.
노란 손에서 빛이 반짝이며 투명한 부문들이 날아 나와 여러 갈래 쇠사슬로 변하여 원숭이를 꽁꽁 묶어버렸다.
주먹만 한 부문들이 쇠사슬에서 뿜어져 나와 원숭이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원숭이가 뿜어내던 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면서 진기가 막강한 힘으로 억눌려 ‘쿵!’ 소리와 함께 무겁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원숭이는 여전히 포효하고 있었지만 진기가 억눌린 탓에 육신의 힘으로는 절대 쇠사슬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소녀는 죽을 고비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소녀는 다급하게 원숭이의 손에서 빠져나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묵아(墨兒), 괜찮아?”
움푹 팬 볼에, 이마에 흉터가 길게 그어진 중년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듯이 묻는 걸 보니 소녀의 손윗사람인 것 같았다.
“괜찮아요.”
소녀가 간신히 답했다.
근처에 자란 숲에서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석목과 묘공이 나타났다.
석목의 손에 남아있던 노란빛은 빠르게 사라졌고, 거대한 손바닥도 순식간에 땅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검은 갑옷을 입은 이족들이 한곳에 모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족들이 애써 잡으려던 원숭이를 석목이 가볍게 제압해버렸다. 그러니 석목과 묘공의 수련 경지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가볍게 원숭이를 제압한 걸 보면 아마 신경 강자일 터였다.
석목이 소녀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또 원숭이를 막아줬지만 이족들은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 대체 적인지 벗인지 알 수 없어서 아무도 먼저 말을 건네지 못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마에 흉터가 난 중년 이족은 이족들 중에 수련 경지가 가장 높은 자라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서 석목과 묘공에게 인사를 올렸다.
중년 이족은 이렇게 계속 머뭇거리다가는 갑자기 나타난 고수들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곧장 앞으로 걸어와서 인사를 올렸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검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다가 때마침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소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는데 소녀의 귀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석목은 속으로 이 상황이 우스웠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이 행성에 사시는 원주민들이겠군요? 우리는 공간의 폭풍에 밀려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때마침 출구를 찾고 있었던 참이죠.”
석목은 차분하게 말하면서 자신과 묘공의 신분을 일부러 숨기지는 않았다.
“두 선배님은 다른 행성에서 오셨군요. 우리는 이 수라성에 사는 명룡 일족입니다.”
석목이 하는 말을 듣자 중년 남자는 겁에 질린 표정이 조금 사그라져 공손하게 대답했다.
백 년 전에 일어난 이변으로 수라성은 공간 장벽으로 막혔고, 별에 살던 사람들은 모두 수라성에 묶이게 되었다.
명룡 일족은 수라성에서 가장 큰 종족이라 실력이 매우 뛰어났고, 신경 강자도 수두룩했으나 공간 장벽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 안전하게 밖에서 수라성으로 온 걸 보니 아마 예측했던 것보다 두 사람은 실력이 훨씬 막강할 터였다.
석목은 중년 남자가 짓는 표정을 읽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중년 이족이 말한 수라성과 명룡 일족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므로 석목은 신식을 통해 묘공 스님과 대화를 나눴다.
묘공 스님도 고개를 흔드는 걸 보아 수라성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 이 근처에 성시가 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수라성은 얼마 전에 큰 재난을 당해서 성시가 이미 대부분 무너졌습니다. 주변 십만 리 안에는 아무런 성시도 없죠.”
중년 이족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재난? 어찌된 일입니까?”
묘공 스님이 눈을 껌뻑거리며 물었다.
“수라성은 얼마 전에 엄청난 괴물에게 습격을 당해서 행성 절반이 거의 파멸에 이르렀습니다. 아마 두 선배님들께서도 무너진 행성을 보셨겠죠. 전부 그 괴물이 한 짓입니다,”
중년 이족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퍼렇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중년 이족이 그 괴물을 말하자 전부 두려운 기색을 내비쳤다.
“보긴 했습니다만 그 괴물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행성의 절반을 파괴했다는 말입니까?”
석목이 실눈을 뜨며 물었다.
“자세한 일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 괴물은 크기가 엄청났죠.”
중년 이족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성시가 없다니 곤란하게 됐군요. 번거롭겠지만 우리를 종족으로 데려가 그 괴물에 관해서 얘기를 좀 더 깊게 나눠도 되겠습니까?”
중년 이족은 한숨 돌리다가 석목이 하는 말을 듣고는 다시 긴장한 표정을 드러냈다.
중년 이족은 조금 난감했지만 그래도 석목이 청한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럼요. 선배님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명룡 일족에 내려오는 규칙은 매우 엄격하여 남들이 종족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지 않았으나 석목과 묘공은 실력이 매우 막강한데다 또 명룡족들을 구해줬으니 중년 이족은 명룡 일족의 장로들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걸 이해해주리라 생각했다.
“후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히 방문만 할 예정이라 다른 목적은 없어요. 물론 대가도 드려야겠지요. 저 원숭이는 우리에게 필요가 없으니 가져가세요.”
석목은 중년 이족이 짓는 표정을 읽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이족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원숭이를 잡아가는 게 그들이 받은 임무라 이제 임무를 완료했으니 많은 포상을 받을 터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중년 이족은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는 몸을 날려 작은 회색 두레박 법보를 꺼냈다.
중년이 법결을 날리자 작은 두레박에서 회색빛이 뿜어져 나와 원숭이를 감아버렸는데 회색빛에선 막강한 힘이 흘러나왔다.
거대한 원숭이의 몸통이 가볍게 말려들더니 빠르게 줄어들다가 반짝이며 두레박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강제로 살아있는 짐승을 넣을 수 있는 공간 법보는 미양 성역이나 천하 성역에서 매우 보기 드문 귀한 법보라 석목은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중년 남성은 마치 매우 흔한 법보를 다루는 것처럼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묘공 스님이 일전에 수라 성역에는 공간 신통을 익힌 생령들이 아주 많다고 했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중년 이족은 검은 부적을 날려 두레박의 입구를 막아버렸다.
“선배님들께선 저를 따라오시지요.”
중년 이족은 회색 두레박 법보를 거두어들이며 공손하게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석목과 묘공이 뒤를 따랐다.
* * *
중년 이족 일행의 속도를 고려하여 석목과 묘공은 아주 느린 속도로 날아가 그들은 반나절이 지난 뒤에야 커다란 성시 앞에 도착했다.
말이 성시지 성보(城堡)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았는데 면적이 매우 넓은 성보는 족히 백 리는 되었다. 또한 성보의 윤곽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지하에도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검은 성보는 옅은 안개로 드리워져 있었고, 수많은 부문들이 번쩍였다. 그렇게 공간의 힘이 요동치는 모습을 보니 매우 수준 높은 금제 같았다.
석목과 묘공은 명룡 일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기에 무턱대고 신식으로 둘러보진 않았다.
“원 형,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이번에 혈림폭원(血霖暴猿)을 사냥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셨는데, 성공했나요? 제 딸도 잘 부탁드려요.”
성보 근처에서 한 순찰 무리가 때마침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수염이 가득 자란 사내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말을 건 사내가 갖춘 실력은 성계 후기 경지였다.
사내는 중년 이족의 옆에 있는 소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음, 이 두 분은 누구십니까?”
수염이 난 사내는 석목과 묘공을 보더니 안색이 굳어선 싸늘하게 물었다.
얼마 전에 괴물에게 습격을 당해 명룡 일족에는 비상이 걸렸다. 때문에 같은 일족 사람들이 출입하는 일마저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으니 바깥 사람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두 분은 석 선배님과 묘공 선배님입니다. 혈림폭원을 사냥할 때, 우리를 도와주신 분들이죠. 이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돌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중년 이족이 다급하게 설명해주었다.
오는 동안 석목은 자신과 묘공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아버지, 제가 큰 위험에 닥쳤을 때, 두 선배님이 저를 구해줬어요.”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폴짝폴짝 뛰면서 수염이 난 사내 곁으로 다가가 사내의 팔을 감으며 말했다. 그리고 소녀는 재빠르게 석목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자 수염이 난 사내는 눈을 깜빡이며 긴장했던 표정을 풀었다.
“두 선배님은 실력이 막강한 분들입니다. 곧 우리 종족의 장로들을 만나 뵈실 예정이죠.”
중년 이족이 말을 마치고는 다시 입술을 움직이며 전음을 보냈다.
“선배님들, 명룡 일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낱 호위 무사에 불과하니 종족의 장로님들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안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수염이 난 사내는 곧장 표정을 바꾸면서 난감한 듯이 말했다.
“물론이죠.”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염이 난 사내는 긴장을 풀면서 감격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원판 무기 하나를 꺼내 법결을 날리자 원판에서 빛이 밝아졌다.
순간, 검은 성보에서 극도로 옅은 파동이 뿜어져 나와 석목과 묘공의 몸을 훑었다.
파동은 매우 미약하여 신식이 예민하지 않다면 절대 알아차리지 못했을 터였다.
묘공 스님은 아까부터 계속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석목은 묘공도 이 미세한 파동을 알아차렸는지 알 수 없었다.
이는 명룡 일족이 두 사람을 훑어보는 것이었으나 석목은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파동이 아주 정밀한 걸 보니 명룡 일족은 실력이 뛰어난 종족일 터라 그렇다면 구수도철과 관련된 정보를 알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사내가 시전한 원판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작은 글씨가 한 줄 나타났다.
“선배님, 종족의 장로님들이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사내는 원판을 거두어들이고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검은 영패를 하나 꺼냈는데 영패에는 검은 용 모양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빛 한 갈래가 영패에서 날아 나와 성보를 감싼 안개 금제로 스며들었다.
금제가 양쪽으로 걷히면서 입구가 나타났다.
석목과 묘공은 사내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석목이 멀어져가자 소녀는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