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수라의 세 종족
수염이 난 사내는 석목과 묘공을 데리고 검은 성보 안에서 한참 동안 걷다가 드넓은 대청으로 향했는데 대청에 놓인 장식품들은 매우 정교했다.
“선배님들,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세요. 장로님들을 모셔오겠습니다.”
사내가 말을 하고는 빠르게 물러났다.
이곳에 놓인 장식품들은 매우 특이해 석목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석목은 이 어여쁜 장식들을 현계를 떠날 때, 연나와 속승에게 가져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묘공 스님은 옆에서 눈을 감고는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몰래 원판 법보를 시전하여 구수도철이 남긴 흔적을 뒤쫓았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수확을 얻지 못해 다시금 눈살을 찌푸렸다.
“하하, 도우님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오더니 이어서 키가 훤칠하고 얼굴색이 푸르스름한 노인이 걸어들어왔다.
노인에게서는 이족의 특징을 찾아볼 수 없었고, 수련 경지는 신경 중기 정상에 이른 상태였다.
노인은 석목과 묘공을 한 번 훑어보더니 웃음이 굳은 채 걸음을 멈추었다.
석목과 묘공의 기운을 읽을 수 없어 노인이 한 예상이 빗나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노인은 마치 커다란 산봉우리 두 개가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노인은 멍하니 입구에 서 있다가 곧바로 정신 가다듬고는 다시 인사를 올렸다.
“두 분이 석목 도우님과 묘공 도우님이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곤도(昆圖)라 부르며 명룡 일족의 대장로죠.”
“곤도 장로님, 저와 묘공 도우님은 우연히 수라성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갑자기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석목이 웃으며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기운을 거두어들이고는 말했다.
석목은 말을 하면서 알아차리지 못하게 노인을 훑어보았다.
노인의 몸속에 깃든 진기는 평범한 신경 중기 강자보다 훨씬 두터웠는데 게다가 육신의 힘 또한 강력했다.
석목은 노인이 막강한 혈맥의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읽어냈다.
노인이 갖춘 실력은 육규종을 비롯한 팔황고족의 족장들보다 강해보였다.
석목은 명룡 일족이 갖춘 실력을 대략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묘공은 노인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는데 이는 암묵적으로 모든 일을 석목에게 떠넘긴 것이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실력이 대단한 두 분이 우리 종족에 오셨으니 저희가 영광이지요.”
노인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자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곤도 장로님, 앉으시죠.”
석목이 말했다.
노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앉는 것마저 잊어버려 석목이 말을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석목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도우님들은 처음 뵙는 얼굴인 것 같은데 수라성 분들은 아니시지요? 공간의 폭풍에 밀려 우연히 수라성에 오셨다고 들었는데 우리 명룡 일족에는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저희가 도울 일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하시죠.”
노인은 잠깐 숨을 고르고는 다시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석목은 눈알을 굴리며 사실을 숨긴 채 구수도철과 관련된 정보를 에둘러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닌지 망설이다가 너무 번거로운 것 같아서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곤도 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저희는 밖에서 왔으며 큰일을 해결하기 위해 수라성에 왔죠. 그리고 지금 명룡 일족에게 도움을 받았으면 합니다.”
석목이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흠칫 놀라다가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도우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우리 종족의 힘이 닿는 곳이라면 꼭 최선을 다해서 도울 테니.”
노인은 묘공을 한 번 쳐다보았는데 묘공이 일관되게 눈을 감고 있자 노인은 시선을 다시 석목에게로 던졌다.
“저희는 수라성을 습격한 도철 진령을 찾으러 왔습니다. 수라성이 처한 상황은 이미 봤는데 아마 최근에 기습을 당한 것 같더군요. 저와 묘공 도우는 그 짐승을 찾고 있는데 혹시 곤도 장로님은 도철 진령이 숨은 종적을 알고 있는지요?”
석목이 물었다.
노인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도철 진령을 찾으신다고요! 도우님…… 그 괴물은 왜 찾는 겁니까?”
노인은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도철 진령은 세간에 해로운 아주 극악무도한 괴물이죠. 이 세계에서 그 짐승을 쫓아버리거나 죽여 버릴 계획입니다.”
석목은 숨기는 것도 귀찮아서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찬 숨을 들이마시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노인은 신경 중기 강자인 자신이 실례를 범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망설이는 표정을 드러냈다.
“정말로 도철 진령을 찾으실 계획입니까? 그 괴물을 죽일 수 있으십니까?”
노인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확답은 드릴 수 없습니다만 저희도 무턱대고 괴물을 찾아다니는 건 아니죠. 그 괴물이 갖춘 실력을 대충 짐작해봤는데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니 구수도철이 떠난 종적을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석목은 가볍게 웃다가 다시 눈에 날카로운 빛을 뿜으며 물었다.
옆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던 묘공이 번쩍 눈을 뜨면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네, 도철 진령의 종적을 알고 있긴 합니다만 제 권한으로는 바로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종족의 족장에게 여쭤보아야 할 것 같군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요. 도철 진령은 우리 명룡족들을 수도 없이 죽였으니 천하의 원수나 다름없지요. 족장님께서도 놈의 종적을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노인은 석목과 묘공이 바라보는 시선에 소름이 돋아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구수도철이 다시 도망가면 더 번거로워질 테니 오래 기다릴 수는 없어요.”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곧바로 족장님께 여쭤보고 돌아오겠습니다.”
노인은 바로 일어서서 빠르게 떠났다.
묘공 스님은 멀어져가는 노인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묘공 도우님, 못마땅한 부분이 있습니까?”
석목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저 사람이 보인 반응이 조금 이상하군요. 처음에 구수도철을 매우 두려워하는 것 같던데 우리가 도철을 해결하겠다고 하니 또 곧바로 흥분을 하는 게 이상하군요.”
묘공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전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다시 되짚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아 석목은 멈칫했다.
“듣고 보니 이상하군요. 그러나 구수도철의 종적을 알아내기만 하면 그만이니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말죠.”
석목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석 도우님이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옥황라판을 시전해봤는데 아무런 수확이 없더군요. 이젠 명룡 일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묘공이 깊은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석목은 그제야 묘공이 몰래 법보를 시전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둘이서 대청에서 조용히 기다리자 잠시 후에 발걸음 소리가 전해지면서 노인이 다시 들어왔다.
“두 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조금 전에 족장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대전으로 모시라더군요.”
노인이 미소를 짓는 게 기분이 좋아보였다.
석목은 다시 묘공이 한 말을 떠올렸는데 정말로 노인의 행동거지가 조금 수상해 보였다.
그러나 노인이 어떤 꿍꿍이를 숨긴다고 해도 절대 묘공과 석목이 갖춘 실력을 따라올 수는 없었기에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족장님이 친히 모신다니 저희가 물론 가야지요. 그러나 구수도철의 종적과 관련해서 족장님께서 말씀을 해주신다고 합니까?”
석목이 눈에 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두 분, 걱정하지 마십시요. 족장님께선 곧바로 동의하셨습니다. 이제 두 분을 대전으로 모시는 이유는 논의를 하여 함께 도철을 쫓아내려는 뜻이죠.”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석목과 묘공도 멈칫했다.
“당신들도 도철을 찾겠다고요?”
석목은 조금 의아했다.
구수도철이 갖춘 실력은 막강하지 그지없어 신경 후기 강자 여러 명이 힘을 합친다고 해도 결국은 죽음 뿐일 터였다.
“도철 진령이 갖춘 실력이 막강하다는 사실은 저희도 잘 알죠. 만약 우리뿐이라면 절대 막무가내로 죽음을 자초하지는 못했겠지요.”
노인이 아부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두 도우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실력은 약하나 우리 명룡 일족은 진법을 능히 다루는 종족이라 도움이 될 겁니다. 게다가 우리 명룡 일족뿐만 아니라 수라성에 사는 다른 종족들도 때마침 우리 종족에 머물고 있죠. 이미 그 괴물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수라성 모두의 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족 사람들도 실력이 막강한 두 분이 계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얼굴을 뵙고 싶어 합니다. 다른 종족들도 힘을 합쳐 그 괴물을 죽이고 싶다고 하더군요.”
노인이 단숨에 말을 마쳤다.
석목과 묘공은 누군가 도와준다하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어 눈을 마주쳤다.
“네, 그렇다면 만나보지요. 길을 안내하세요.”
석목이 말했다.
노인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는 곧장 밖으로 걸어갔다.
* * *
검은 보성 안은 길이 매우 구불구불 했고, 너무 어두워 마치 지하에서 걷는 것만 같았다.
셋은 이리저리 굽이돌다가 커다란 대전 앞에 나타났다.
대전의 정문에는 거대한 용 모양 조각상이 있었다.
용은 머리에 검 같은 뿔이 한 쌍 자라나 있었으며 등에는 가시가 한 줄 붙어있었는데 가장 특이한 부분은 용의 발로, 크고 검은 네 발 말고도 배에 작은 하얀 발이 하나 자라있었다.
조각상은 매우 생생해 다섯 흑룡이 언제든지 벽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
대전의 벽에는 생김새가 다양한 용들이 수도 없이 새겨져있었는데 전부 흑룡처럼 다양한 빛을 뿜어 커다란 진법을 이루며 빛을 번쩍였다.
석목은 금제 진법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는 시선을 용 모양 조각상으로 던졌다.
“오조명룡(五爪冥龍)입니다. 진선계에서 나름 강한 존재이지요. 공간의 힘을 통제하는데 능하며 명룡 일족은 오조명룡의 후손입니다.”
묘공 스님의 목소리가 석목의 귓전에서 맴돌았다.
석목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죠.”
노인이 입구 옆에 서서 안내를 했다.
석목과 묘공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전 안에 펼쳐진 공간은 족히 삼사십 장은 되는 것 같았다. 또한 바닥엔 짙은 푸른색 돌들이 깔려있었고, 돌 위에는 소나무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돌에서는 옅은 음의 기운이 흘러나왔는데 이것들은 미양 성역이나 천하 성역에서는 매우 귀한 송석(松石: 소나무 돌)이었다. 음 속성 법보를 제련하는데 쓰이는 귀한 재료인데 이렇게 바닥에 깔다니.
대전의 안쪽 벽도 전부 귀한 재료로 지어졌으며 오색영롱한 구슬이 벽에 박혀 진주 같았는데 빛을 뿜어내어 대전을 환하게 비추었다.
이런 진주는 수천 년에 걸쳐 생긴 통령보주(通靈寶珠)로, 매우 귀한 물건이라 열기와 한기를 차단하며 바람까지 막아낼 수 있는 묘한 힘이 있어 한 알, 한 알이 아주 진귀한 보물이었다.
석목은 주변을 훑어보다가 다시 시선을 대전에 놓인 계단으로 던졌다.
대전 안에선 열 몇 명이 세 곳으로 나뉘어 앉아있었다.
계단 위에 놓인 주좌에는 키가 훤칠한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요족에게서 보이는 특징은 없었다. 남자는 검은 무늬가 새겨진 옷을 입고 있었고,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위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중년 남자의 몸에서 영기가 들끓는 모습을 보니 이미 신경 후기에 도달한 것 같았다. 그는 아마 명룡 일족의 족장일 터였고, 뒤에는 몇몇 종족 사람들이 함꼐 서 있었는데 전부 신경이었다.
대전의 왼쪽에는 푸른 복식을 입은 사람들이 몇몇 서 있었는데 옷에 거미줄 같은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여인은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었으며 아주 수려한 용모가 돋보였지만 미간 사이에서 살기가 어렴풋이 흘러나왔다.
여인의 몸에서 막강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걸 보니 신경 후기 강자였다.
여인의 뒤로 몇몇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전부 신경이었으며 그중 푸른 옷을 입은 소녀는 신경 중기에 이르렀는데 피부가 마치 검게 타버린 것 같았다.
소녀는 자신의 외모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흑백 빛이 뚜렷한 눈으로 석목과 묘공을 바라보았다.
대전의 오른편에도 사람들이 네다섯 명 서 있었는데 그들은 육신이 매우 건장했고, 키가 전부 두세 장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런 거인들과 비교했을 때, 명룡 일족은 마치 어린아이들 같았다.
석목은 이 익숙한 기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눈살을 찌푸렸다. 오른편에 선 거인들은 바로 고만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