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오래 전의 일
사내의 뒤에는 면사포를 쓴 여인만 서 있었으며 입이 뾰족하고 볼이 붉은 청년은 사람을 모으러 갔다.
면사포를 쓴 여인은 눈에 싸늘한 빛이 스치더니 어떤 말에도 일관되게 관심을 품지 않다가 수염이 난 사내가 꺼낸 말을 듣는 순간, 시선을 석목에게로 던졌다.
“천하 성역이요? 별다른 변화는 없죠. 굳이 말하자면 백 년 전에 이변이 일어나 모든 행성들이 공간의 힘 때문에 막혀버렸지요.”
석목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 그렇습니까? 천정이 천하 성역을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노란 수염을 드리운 사내가 멈칫하다가 물었다.
“천정이요? 후후, 도우님은 수라 성역에서 오랫동안 은거한 모양이군요. 다른 성역과 관련된 일은 전혀 모르는 것을 보니. 천정은 이미 백 년 전에 성역들이 연합하여 멸망시켰답니다. 지금은 종족들이 각자 발전을 도모하여 번성을 누리고 있지요.”
석목이 후후 웃으며 말했으나 현계지문과 관련된 일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네? 천정이 이미 멸망했다고요?”
노란 수염을 드리운 사내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사내의 뒤에 서 있던 면사포를 쓴 여인도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믿기지 않는 기색을 드러냈다.
곤상 족장과 수라주 일족에서 온 미모가 돋보이는 여인도 그 말을 듣고는 조금 놀라는 듯했다. 그러나 수염을 드리운 사내와 면사포를 쓴 여인만큼 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곤상 족장은 천정이 다른 성역을 다스리는 큰 세력이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물론 천정과 수라 성역은 너무 멀리 떨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수라 성역은 위치가 계속 바뀌었기 때문에 아무런 접점도 없었을 터였다.
“석 도우님, 사실입니까?”
노란 수염을 드리운 사내는 뚫어져라 석목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봤죠. 천정의 제준과 부하인 십이 선장들도 전부 사라졌지요. 그러니 밑에 있던 몇몇 종족들도 전부 흩어졌습니다.”
석목은 깊은 눈빛으로 노란 수염을 드리운 사내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어갔다.
“고만족도 흩어졌지요.”
노란 수염을 드리운 사내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다가 마지막 한 마디를 듣는 순간 표정이 굳어버렸다.
“석 도우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손을 굽히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구 도우님, 계속 궁금했었는데 백만족과 천정의 부하였던 고만족은 어떤 사이죠?”
석목이 미소를 지으며 담백하게 물었다.
노란 수염 사내는 잠깐 침묵하다가 고개를 들면서 대답했다.
“일부러 숨길 일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우님께서 하신 말대로 백만족과 천정의 부하인 고만족은 원래 한 종족이었죠. 녀석들은 고만족 중에서도 흑만부(黑蠻部)에 속했고, 우리는 백만부(白蠻部)에 속했습니다.”
석목은 역시 추측한 내용이 맞아 눈에 빛을 반짝였다.
고만족의 흑만과 백만은 남해성 야만족을 구분하는 흉만, 평만과 흡사했다.
곤상 족장과 미모가 돋보이는 여인도 백만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해 허리를 세우면서 관심을 보였다.
“제준이 우리 고만족을 소집할 때, 종족 안에서 충돌이 생겼죠. 흑만족은 천정으로 귀속되기를 원했지만 우리 백만족은 제준이 품은 의도가 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차례 논쟁을 펼친 후에 흑만 녀석들은 절반 정도 되는 사람들을 이끌고 천정에 들어가 결탁을 해서 우리 백만족들을 괴롭혔지요. 그리하여 백만족은 어렵게 놈들의 포위를 뚫고서 수라계로 도망을 쳤답니다.”
노란 수염을 드리운 사내가 오래전에 벌어진 일을 하나하나 말해주었다.
검은 면사포를 쓴 여인은 옷자락이 살짝 흔들리는 게 몹시 심란해 보였다.
노란 수염을 드리운 사내가 면사포를 쓴 여인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러자 면사포를 쓴 여인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석목은 복잡한 기색을 드러냈다.
흑만족은 천정의 밑으로 들어간 후로 천정에 의지하며 다년간 수많은 혜택을 누렸지만 결국은 멸족을 당하게 되었다. 반대로 백만족은 수라 성역으로 도망을 쳐 그간 수많은 고난을 겪었을 것이나 결국 강성하게 발전하여 신경 후기 강자도 배출해냈다.
세상사는 변화무쌍하여 누가 끝에 승리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군요. 구 형이 종족 사람들을 이끌고 수라 성역에 오기까지 많은 일을 겪으셨군요.”
곤상 족장이 말했다.
노란 수염을 드리운 사내는 쓴웃음을 지으며 침묵을 지켰다.
“이제 천정이 무너졌는데 구 족장님은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이곳에 뿌리를 내릴 계획이신가요?”
미모가 돋보이는 여인이 침묵하다가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다른 종족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군요. 우선 괴물 도철을 해결한 후에 다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노란 수염을 드리운 사내는 잠깐 고민하다가 깊은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긴장했던 표정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곤상 족장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석목은 이 세 사람이 짓는 표정을 전부 읽고 있었는데 세 종족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나 분명 이익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석목과 관련이 없는 일이니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 * *
눈 깜짝할 사이 반 시진이 흘러 세 종족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석목이 예상했던 바와 달리 종족마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들은 전부 신경 존재였으나 나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명룡 일족의 곤도 대장로, 수라주 일족의 피부가 검은 소녀, 그리고 고만족의 입이 뾰족한 청년과 면사포를 쓴 여인이 함께 자리했다.
석목은 조금 의아했다. 위험천만한 곳에 세 종족 모두 종족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보내다니, 그 안에서 죽어버릴까 걱정이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렇지만 석목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세 종족이 전부 모인 후에 일행들은 서둘러 출발해 빠른 속도로 수라 성역 외곽으로 향하더니 공간 장벽 근처에 도착했다.
공간 장벽 근처에는 한 묘 정도의 검은 평대가 하나 떠다녔다.
평대는 네모꼴로 모두 세 층으로 나뉘어 각 층마다 검은 꽃무늬가 가득 새겨진 채로 부문 띠를 이루었는데 띠가 서로 연결되면서 일 층부터 삼 층까지 이어놓았다.
삼 층에는 열 장이 넘는 제단이 하나 있었고, 그 주변으로 신경 중기 강자 네 명이 앉아있었다.
네 명 중에 둘은 명룡 일족이며 한 명은 수라주 일족, 또 한 명은 고만족이었다.
제단 중간에는 한 장 정도 되는 웅덩이가 있었고, 그 안에 검은 광석이 몇 개 놓여있었지만 눈에 잘 띄지는 않았다. 그리고 광석에선 검은 번개가 튀고 있었다.
검은 광석에서는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부드러워 보였지만 가장 깊은 곳에선 날카로운 번개가 튀었다.
화염이 들끓자 촘촘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 평대에서 빛이 펼쳐지는 것이 마치 어떤 법보 같았다.
일행이 날아오자 제단 옆에 앉은 네 사람이 다급하게 일어서며 곤상 족장을 비롯한 이들에게 인사를 올렸다.
석목은 의아한 눈빛으로 검은 평대를 바라보았다.
“석 도우님, 거긴 공간 장벽이 굳기 전에 신경 후기인 몇몇 실력자들이 혼자선 절대로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세 종족이 힘을 합쳐 상고 비술로 이룬 도솔(兜率:미륵보살이 사는 곳) 부공대입니다. 위에 있는 도솔뢰염(兜率雷焰)으로 장벽을 부술 수 있죠.”
곤상 족장이 말했다.
“도솔뢰염이요? 그건 상고 시기의 불과 번개 속성이 함께 들어있는 화염이 아닙니까? 막강한 영력을 지녔지만 수련하기에 매우 어렵다던데 어떻게 이걸……”
석목은 의아한 듯이 말하더니 제단에 이는 검은 화염을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광석을 바라보자 말문이 막혀버렸다.
“뇌염정췌석(雷炎精萃石)! 이미 사라진 영재를 어디서 구했습니까! 이걸로 도솔뢰염을 제련했군요!”
석목이 놀라며 말했다.
뇌염정췌석은 희귀한 보물로, 극도로 순수한 번개와 불 속성 영력을 머금고 있어 상고 시기에도 흔하지 않은 보물이라 지금은 이미 사라졌다고만 생각했다.
이 보물만 있다면 도솔뢰염과 같은 번개와 불 속성 화염을 수련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석목 도우, 역시 모르시는 게 없군요. 뇌염정췌석이 맞습니다. 수라의 심장 비경에서 구했죠.”
곤상 족장이 말했다.
“수라의 심장 비경에 이런 상고 시기의 진귀한 보물이 있습니까?”
석목은 깜짝 놀랐다.
옆에 있던 묘공 스님도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수라의 심장 비경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상고 시기 때부터 존재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상고의 귀한 보물이 그곳에 있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죠. 뇌염정췌석 뿐만 아니라 통천수옥(通天水玉), 적원화석(赤元火石), 현무선암(玄武仙巖), 수화선정(水火仙晶)과 같은 진귀한 보물들도 본 적이 있습니다. 전부 아주 희귀한 보물들이죠……”
곤상 족장이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수화선정이 있다고요!”
석목이 갑자기 곤상 족장이 하는 말을 끊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비경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곤상 족장은 석목이 큰 목소리를 내자 깜짝 놀라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족장님이 수화선정을 찾는 걸 좀 도와주시죠. 찾게 된다면 꼭 그 대가를 드리겠습니다.”
석목이 다시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수화선정은 뇌염정췌석처럼 두 가지 서로 다른 속성의 영력을 머금은 진귀한 보물로, 수화선정에는 물과 불의 원기가 들어있어 석목이 수련하고 있는 구원빙화선법을 익힐 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묘공은 의아한 눈빛으로 석목을 한 번 쳐다보았으나 말 사이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수화선정은 하계에서는 매우 진귀한 보물이었지만 상계에서는 그리 귀한 보물이 아니었다.
“물론이죠. 석목 도우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수도철을 죽여주신다고 했으니 이런 보잘것없는 일들은 제가 도맡아 하겠습니다.”
곤상 족장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만약 정말로 수화선정이 있다면 구수도철을 처리할 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곤상 족장은 부하들에게 도솔 부공대 속에 깃든 뇌화의 힘을 써 공간의 장벽을 뚫으라고 명을 내렸다.
“공간의 장벽은 제가 뚫겠습니다.”
석목은 곤상 족장을 말리더니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노란 빛기둥이 날아나가 공간 장벽을 내리쳤다.
쩍!
석목에게 공격을 받자 공간 장벽은 종잇장처럼 부서져 버려 크기가 수십 장에 이르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광경을 보자 모두 어안이 벙벙해 세 족장도 놀라 입을 크게 벌리고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족장들은 도솔 부공대로 공간 장벽을 뚫을 수는 있었지만 법결을 시전하는 데만 시간을 두 각이나 버려야 했다. 또한 그것도 기껏해야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구멍을 뚫을 수준이라 석목처럼 대충 주먹을 휘둘러 크기가 수십 장에 이르는 구멍을 뚫어버릴 실력은 없었다.
“석목 도우님, 역시 대단하시군요. 존경스럽습니다!”
곤상 족장을 비롯한 세 명은 곧장 정신을 차리고는 경외하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놀란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가죠.”
석목과 묘공은 가장 먼저 구멍을 뚫고 지나갔고, 세 종족 무리가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