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895화 (895/916)

외전 17화. 채아와 스산한 곳

“우리도 갑시다.”

곤상 족장은 두 종족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어들이고는 명룡족들을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모님, 왜 홀로 움직이죠? 수라의 심장은 위험천만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세 종족이 힘을 합쳐야만 더 안전할 텐데요.”

수라주 일족에 있던 피부가 검은 소녀가 여인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수라의 심장은 위험한 곳이야. 그러나 절대 곁에 있는 사람들이 안전하리라 생각하면 안 돼.”

족장은 깊은숨을 내뱉으며 피곤한 듯이 말했다.

“이모님, 그 말씀은?”

피부가 검은 소녀가 흠칫 놀랐다.

“수라 성역의 세 종족은 겉보기에는 화목해 보이나 암암리에 권력다툼을 하고 있지. 백 년 전에 공간 격변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공간이 봉쇄되면서 수라성은 자원이 날로 고갈되고 있단다. 그러니 세 종족이 점점 더 치열하게 다투게 된 게지. 심지어 다른 두 종족이 멸족되기를 원해. 난아, 너는 일족에서 폐관 수련하느라 이런 일을 잘 모르겠구나.”

미모가 돋보이는 여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피부가 검은 소녀는 여인이 하는 말을 듣고는 복잡한 기색을 드러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라의 심장에 들어왔다고 해서 다른 두 종족이 우리를 무턱대고 해치려 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항상 조심해야 해. 특히 명룡 일족은 더욱 경계해야 할 녀석들이야.”

여족장이 계속해서 말을 하며 눈에 날카로운 빛을 뿜었다.

“이모님, 명룡 일족은 곤상 족장 한 명만 신경 후기 아닌가요? 이모님의 신통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만 할 텐데요. 신경 중기만 수라주 일족보다 조금 많을 뿐이지요.”

피부가 검은 소녀가 콧방귀를 뀌고는 내키지 않는 듯이 말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니 우리 수라주 일족과 백만족이 녀석들을 두려워하는 거란다.”

여족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계속 말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소녀는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여족장이 짓는 표정을 읽고는 말을 아꼈다.

“명룡 일족은 막강한 종족이야. 그러나 네 비술도 이미 수련을 마쳤으니 너무 두려워할 녀석들은 아니지. 가자, 수라의 심장 비경 일 층에는 수많은 보물들이 있으니, 흔하지 않은 기회라 절대 놓쳐서는 안 돼.”

미모가 돋보이는 여인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곤 뒤에 서 있던 수라주족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수라주족은 일제히 대답했다.

여족장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회색 돌판의 빛이 더 밝아지면서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날아갔다.

* * *

같은 시각, 비경에 자리한 흰 눈이 뒤덮인 산봉우리에 석목과 묘공이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비경의 다른 곳으로 전송된 모양이군요.”

석목이 신식으로 주변을 훑어보다가 세 종족이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천천히 말했다.

묘공은 석목이 하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기가 아주 짙군요. 게다가 비경 속에 있는 공간이 이곳 하나는 아닌 것 같으니, 재미있네요.”

묘공이 눈을 뜨면서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석목은 비경에 흐르는 천지의 영기가 매우 짙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바깥에 있는 다른 공간과 달리 매우 안정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석목은 비경에 공간이 여러 층 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곳에는 구수도철이 파괴한 흔적이 없는 것 같군요. 구수도철이 정말 이 비경에 들어왔을까요? 아니면 세 종족이 일부러 우리를 속이는 걸까요?”

석목은 눈이 뒤덮인 산봉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속인 건 아닌 것 같군요. 구수도철은 확실히 이 비경 속에 있습니다. 다만 더 높은 공간에 있지요. 보아하니 이렇게 풍성한 자원들을 그냥 둔 것을 보니 이 비경 속에 그놈이 아주 좋아하는 물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묘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이렇게 확신에 차서 말씀하시는 걸 보니, 혹시……”

석목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묻다가 갑자기 무엇인가 떠오른 듯이 말끝을 흐렸다.

그때, 묘공이 손을 흔들자 원판 법보가 나타났다. 그리고 법보 위에 달린 시침이 흔들리면서 위쪽을 가리켰다.

묘공의 원판이 다시 도철의 존재를 찾아내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 되었으니 묘공이 이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쪽 공간으로 올라가는 입구는 어디에 있을까요?”

석목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비경엔 여러 공간이 존재하니 분명 연결되는 입구가 있을 터였다.

비경 속 공간은 곤상이 한 말처럼 단단하기 그지없어 힘으로 공간 장벽을 뚫고 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석목은 조금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세 종족 사람들과 흩어질 줄 알았더라면 비경의 지도를 달라고 할 것을 하며 후회했다. 그랬더라면 이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우선 찾아봅시다. 비경은 그리 작은 편이 아니지만, 우리가 나는 속도라면 한 번 훑어보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죠.”

묘공 스님이 말했다.

석목 또한 그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이제 막 날아가려고 할 때, 석목의 허리춤에 달린 조롱박에서 파란빛이 반짝이더니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가 다시 파란 옷을 입은 청년으로 변하였다. 청년은 파란빛을 감고 있었는데 이미 신경 중기 정상에 이르러 이제 곧 신경 후기에 진입할 것 같았다.

“이놈아, 이대로 간다고? 수화선정을 찾아야지?”

파란 옷을 입은 청년은 다름 아닌 수령자였다.

조롱박 안에서 백 년간 수련하면서 수령자는 경지가 크게 강해졌다.

석목은 수령자를 보는 순간, 얼굴이 살짝 굳다가 다시 흠칫 놀라며 수령자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 근처에 수화선정이 있다는 거야?”

이때, 석목이 찬 또 다른 영수 주머니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칠색 빛이 날아 나왔다.

“하하하, 영기가 아주 짙군. 영수 주머니에 너무 오래 박혀있었어.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시끌벅적한 소리가 칠색 빛에서 흘러나왔는데 곧이어 빛이 줄어들면서 채아가 나타났다.

채아는 몸집이 확연히 달라졌는데 몸통은 더 길어졌고, 특히 꼬리에 달린 깃털이 몸통만큼 자라났다. 또한 털에서 칠색 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게 매우 화려했다.

얼핏 보면 채아는 마치 칠색 화염 덩어리 같았다.

“채아, 너는 왜 나왔어?”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채아는 그동안 조용히 영수 주머니에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채아가 원한 일이기도 했지만 석목이 채아에게 특별한 비술 하나를 수련하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 비술은 석목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나 채아의 모습을 보니 아직 비술 수련을 완전히 끝마친 것 같지는 않아 석목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석두, 이미 십 년이 넘게 수련했어. 나는 좀 쉬어야 해. 바깥 구경도 좀 하고.”

채아가 몸을 날려 석목의 어깨에 앉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석목은 채아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 석두. 수화선정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 나도 그게 필요하니까 내 것도 찾아줘.”

채아도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게 수화선정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채아의 먹성이 발동되자 석목은 눈을 희번덕 거렸다.

묘공 스님도 멈춰 서서는 수령자와 채아를 번갈아 보았다.

묘공은 채아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으나 수령자에게로 시선이 닿는 순간, 눈에서 빛을 반짝였다.

“한리! 석 도우님, 운이 좋으시군요. 이렇게 흔치 않은 영총을 갖고 있다니.”

묘공 스님이 부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석목은 아무 말 없이 수령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 방향으로 천 리 정도 가면 수화선정이 있을 거야.”

수령자는 묘공 스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 그를 쳐다도 보지 않고 석목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신식을 펼쳐 수령자가 말한 곳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그곳은 눈이 뒤덮인 산봉우리의 끝이었는데 바로 옆에 화산이 있어 공기가 매우 뜨거웠다.

얼음과 불 사이에는 그리 크지 않은 산골짜기가 하나 있었고, 얼음과 불은 서로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아 마치 산골짜기가 완벽하게 두 가지 기운을 갈라놓은 것만 같았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은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조금 전에도 신식을 펼쳤었는데 그때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이런 현상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 다시 훑어보니 산골짜기는 정말 신비스러울 정도로 기이했다.

석목은 빠르게 신식으로 주변 구역을 훑었다.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고는 눈에 빛을 반짝였다.

“묘공 도우님, 수화선정은 제게 아주 중요한 물건이니, 저는 잠시 그곳으로 가봐야겠어요.”

석목은 미안한 듯이 묘공에게 말했다.

“구수도철은 이 공간에 없으니 잠깐 떨어져 있어도 상관없을 것 같군요. 따로 공간의 입구를 찾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묘공 스님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수화선정을 찾은 후에 바로 공간 입구를 찾아볼게요.”

석목이 정중하게 말했다.

묘공 스님이 미소를 지었다.

둘은 빠르게 흩어져서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 * *

천 리 밖 산골짜기에 두 그림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석목과 수령자가 골짜기로 내려왔고, 채아는 석목의 어깨에 앉아 흥분한 기색을 내비쳤다.

산골짜기는 매우 평범했고, 검은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어디로 통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동굴에서 하얀 안개가 자욱하게 흘러나왔고, 그건 평범한 물안개나 연기가 아니었다. 그렇게 동굴에서 흘러나온 안개는 흩어지지 않은 채 매우 기이한 기운을 풍겼다.

“이곳이라고? 수화선정은 그림자도 안 보이는데?”

채아가 눈에 빛을 뿜어 동굴 깊은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수령자를 바라보면서 툴툴거렸다.

백 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채아는 여전히 수령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수령자는 코웃음을 치며 경멸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채아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채아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려 할 때였다.

“됐어. 그만 싸워. 중요한 일부터 하자.”

석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채아가 수령자를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석목은 하얀 안개를 바라보면서 노란빛을 날려 안개 한 덩이를 끌어왔다.

하얀 안개가 노란빛 속에서 튕겼다.

석목은 하얀 안개와 닿은 노란빛이 매우 느린 속도로 조금씩 사라져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화령지기!”

석목은 하얀 안개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랐다.

“화령지기? 그게 뭐야? 특별한 원기인가?”

채아가 고개를 갸우뚱대며 물었다.

“원기라고 할 수 있지. 모든 속성의 영력을 스스로 흩어지게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원기야.”

석목이 말했다.

화령지기는 어느 성역에서도 절대 흔하지 않은 보물이라 무너져가는 행성이나 비경 공간에서만 간간이 나타나는 것이라서 석목도 실물은 처음 봤다. 물론 예전에 서책에 기록된 내용을 읽은 적은 있었는데 이렇게 직접 볼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다.

수라의 심장 비경은 정말로 신비한 세계였다.

“그런 원기가 있다고? 그렇다면 수련자들은 이 안개에 닿기만 해도 녹아버리지 않을까? 빨리 멀리 도망가자.”

채아가 소리를 지르며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화령지기는 수련자들에게 위협이 되긴 해도 수련 경지가 낮은 수련자들에게만 그래. 물론 신경 강자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양이 많지 않으면 큰 피해는 입지 않을 거야.”

석목이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채아가 깊은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빨리 가자.”

수령자가 말을 하면서 동굴 속으로 날아갔다.

석목도 수령자를 뒤따랐다.

동굴은 사람의 키 정도 높이였고,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점점 넓어져 백 장 깊이까지 들어가자 높이가 다섯 장으로 높아졌고,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높아지는 게 동굴이 땅을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깊이 들어갈수록 통로에 감도는 화령지기가 점점 짙었다.

그러나 석목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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