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904화 (904/916)

외전 26화. 혈아정(血伢晶)

고만족이 탄 푸른 비선이 천천히 석목의 뒤로 날아왔는데 모든 고만족들은 이미 비선 위에 서 있었다.

“석목 도우님, 묘공 도우님. 결정했습니다. 두 분과 함께 이 층의 혈원경으로 들어가겠어요.”

구원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찬바람을 들이마시다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통로가 곧 뚫릴 예정이니 잠시만 기다리면서 준비하세요. ”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만족들을 훑어보았다.

구원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

검은색과 회색, 두 갈래 빛이 먼 곳에서부터 날아왔다.

두 빛은 명룡 일족이 탄 용머리 비주와 수라주 일족이 탄 회색 돌판으로, 이제 두 종족까지 전부 모이게 된 셈이었다.

두 종족 사람들은 매우 피곤해보였고, 기운도 불안한 게 크게 상처를 입었지만 희생자는 없는 것 같았다.

“두 족장님, 빨리 오셨군요. 석목 도우님과 묘공 도우님이 곧 통로를 뚫으려고 합니다. 이제 곧 이 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었어요.”

구원이 두 종족을 맞이했다.

석목과 묘공은 서로 한 번 마주 보고는 다시 집중하여 통로를 뚫었다.

“구 족장님이 전한 소식을 받고서 바로 왔습니다. 어째서 빛기둥이 약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곧바로 들어가십니까? 이제 곧 밤과 낮이 바뀔 텐데요.”

명룡 일족의 곤상 족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수라주 일족의 나소도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비록 석목과 묘공이 곧 통로를 전부 뚫어버릴 것 같았지만 빛기둥은 마구 흔들리면서 계속 번개를 날려 보냈다.

일어나는 여파만으로도 신경 후기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찢겨버릴 수도 있었다.

지금 석목과 묘공이 뚫은 통로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다.

“석목 도우님은 비경 이 층에 이변이 생긴 것 같아서 계속 기다릴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빨리 들어가야 한다고 하셨지만 자세한 일은 저도 잘 모릅니다.”

구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러자 곤상과 나소는 서로 마주 보고는 조금 망설였다.

쾅!

이때, 굉음이 울려 퍼졌다.

소용돌이로 향하는 장벽이 드디어 뚫렸다.

그러나 빛기둥은 여전히 미친 듯이 흔들렸다.

뚫어버린 통로도 계속 흔들리면서 안정되지 않았다.

묘공이 다시 법결을 외우자 금색 문 법보가 밝아지면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가 번쩍이며 헤아릴 수 없는 금빛으로 변하여 통로의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통로에 금빛이 나타나더니 안정을 되찾았다.

“네, 통로는 이제 안정되었군요.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잘 생각해보시고 결정하세요. 우리와 함께 들어갈지, 아니면 빛기둥이 약해진 후에 이 층으로 들어갈지.”

석목이 세 종족을 이끄는 족장들에게 말했다.

고만족은 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명룡 일족과 수라주 일족만 결정을 내리면 되었다.

“두 분, 우리 고만족은 석 도우님과 함께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구원이 말했다.

그러자 곤상과 나소는 안색이 살짝 변했다.

“두 도우님을 도와 도철 진령을 해치우자고 약속을 했으니 물러서면 안 되겠지요. 우리 명룡 일족도 함께 가겠습니다.”

곤상 족장이 말했다.

수라주 일족의 나소 족장은 눈에 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족장님이 들어가신다고 하니 우리 수라주 일족도 따라가겠습니다.”

“세 분 모두 결정을 내리셨으니 그럼 들어갑시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세 종족이 도와준다면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뚫린 통로는 그리 크지 않아 곤상을 비롯한 세 족장들은 곧장 비행 법보를 거두어들이고는 사람들을 모아 통로로 들어갔다.

번개 빛기둥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고, 사방으로 번개가 튀었지만 통로 안은 그래도 안정되었다.

일행들이 공간 소용돌이 앞에 도착했다.

“가죠.”

석목과 묘공이 가장 먼저 공간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세 종족도 전부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졌다.

* * *

붉다!

붉은색은 석목이 이 층 혈원경을 보고서 느낀 첫인상이었다.

세상 전체가 피로 물든 것 같아 땅과 하늘, 심지어 공기 중에 떠다니는 안개까지 전부 붉었다.

허공에는 짙은 혈운이 둥둥 떠다녔고, 구름에 가려졌던 붉은 태양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태양은 핏빛을 수만 갈래로 뿜고 있어 태양이 나타날 때마다 붉은빛은 더욱 짙어졌다.

“여기가 혈원경이군……”

석목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전에 구원에게서 혈원경이 어떤 상황인지 대충 전해 듣긴 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여전히 놀라웠다.

혈무는 수라 성역에 감도는 수라 살기와 매우 흡사했으나 혈무가 더 부드러운 편이었고, 싱그러운 향기도 뿜어냈다.

“이 혈무는 혈원의 안개죠. 수라 성역에서 떠다니는 수라 살기의 원천이 바로 이 혈원경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혈원의 안개는 수라 살기와 달리 생령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며 오히려 좋은 점이 훨씬 많으니.”

구원이 말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전송되며 뿔뿔이 흩어지지 않아 전부 한 곳에 모였다.

구원은 말을 하면서도 푸른빛을 번쩍이며 흘러 다니는 혈무를 흡수했다.

세 종족은 전부 혈무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석목은 붉은 안개에 닿는 순간, 몸속에 흐르던 혈맥이 갑자기 기이한 열기를 풍기면서 천천히 흩어져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열기는 육신을 해치지 않았고, 오히려 미천거원 혈맥을 강화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다만 강화시키는 속도가 워낙 느려 이곳에서 수백 년은 넘게 지내야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을 듯했다.

“구원 족장님. 혈원경에 대해 많은 걸 숨기고 계신 것 같군요?”

석목이 구원을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원은 혈무에 대해 말해주긴 했으나 그 효과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석목 도우님, 시간이 촉박해 자세한 내용을 말씀드리지 못했지 절대 숨기려고 한 건 아닙니다. 이 혈무는 혈맥의 힘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에 혈맥이 흐르는 수련자들에겐 가장 좋은 원기죠.”

구원이 깜짝 놀라서 다급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족장님들. 기어코 혈원경으로 들어오고 싶어 했던 이유는 도철 진령이라는 골칫덩이를 해결하는 것 말고도 더 있겠지요?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 지금 다 말씀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석목이 내뱉는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지만 또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세 족장은 석목이 하는 말을 듣고서 흠칫 놀랐다.

단 한 순간이었지만 석목은 세 족장이 짓는 표정을 전부 읽었다.

“석 도우님,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절대 두 분에게 숨긴 사실이 없어요.”

나소 족장이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런가요?”

석목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세 족장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은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에 세 족장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석목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때, 묘공이 세 사람을 훑어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순간, 종족마다 한 사람씩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그들의 몸에서 금빛이 반짝이다가 주먹만 한 빛 덩어리가 날아 나와 묘공 앞에 모였다.

구원과 나소, 곤상 족장은 모두 안색이 굳어버렸다.

묘공이 손가락으로 빛 덩이를 짚자 세 덩이 빛이 점점 불어나며 금색 거울로 변하였다. 그리고 거울마다 각각 다른 장면이 펼쳐졌는데 그건 세 종족이 만령경을 탐색하던 장면이었다.

“만령경은 자원이 풍성하긴 하지만 혈원경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 같아.”

“저 두 사람의 힘을 빌려 혈원경에서 혈아정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 명룡 일족에선 신경 후기 강자가 한 명 더 나올 거야.”

첫 번째 금색 거울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곤상은 안색이 굳더니 차갑고 싸늘한 눈빛으로 금빛이 뽑혀 나온 명룡족을 바라보았다.

명룡족은 당황하다가 곤상의 얼굴을 보는 순간, 고개를 푹 떨구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또 다른 금색 거울에서도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는데 전부 수라의 심장에서 사람들이 나눈 대화였다. 물론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지만 일단 전부 혈아정과 관련된 대화였다.

구원과 나소도 표정이 일그러진 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석목은 흠칫 놀라며 묘공을 한 번 쳐다보았다. 어느새 묘공은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런 수단을 세 종족에게 박아놓아 석목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석목이 다시 족장들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제 더 변명하지는 못하겠지요? 혈아정은 뭡니까? 세 분이 대체 어떤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확실히 얘기하세요. 저는 누군가에게 이용 당하는 걸 제일 싫어하니.”

석목이 내뱉은 마지막 한 마디에는 심지어 은은한 살기도 섞여있었다.

세 족장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구원은 마치 칼날이 등 뒤에 있는 것 같아 몸을 파르르 떨었다.

석목이 갖춘 실력이라면 이미 확인했으니 절대 세 족장이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만약 석목이 화가 나기라도 한다면……

여기까지 생각한 구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곤상와 나소는 구원이 짓는 표정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도우님들, 맞습니다. 저희가 사실을 숨겼어요. 사죄를 드리니 용서해주세요.”

구원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그 광경을 본 곤상과 나소는 깜짝 놀라 덩달아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세 종족 사람들이 전부 우르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금빛이 뿜어져 나온 세 사람까지 깜짝 놀라 무릎을 꿇었다.

묘공은 금빛을 거두어들이고는 세 종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하! 우선 혈아정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말하세요. 나와 묘공 도우님을 이용하여 무슨 짓을 벌이려 한 겁니까?”

석목은 다시 천천히 살기를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혈아정은 이 혈원경에 있는 보물입니다. 천 년 동안 혈원의 기운이 응집되어 생긴 수정이죠. 우리처럼 혈맥의 힘을 지닌 수련자들에게는 최고의 보물이니. 그걸 삼키면 혈맥의 힘이 강화되어 수련 경지를 뚫을 확률이 높아지죠.”

구원이 빠르게 설명했다.

“그런 보물이 있다고?”

석목은 눈에 빛을 반짝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혈아정은 석목에게 큰 쓸모가 없었지만 종수와 서문설에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게다가 종수는 천봉 혈맥이 흐르니 신경 중기까지는 별문제가 없겠지만 후기에 진입하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세 종족이 한 말대로라면 혈아정으로 종수가 신경 후기에 오를 확률을 크게 높여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상계로 비승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혈아정을 갖고픈 욕심이 생겼다.

“혈아정은 혈원경의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수많은 요수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죠. 요수들도 혈아정을 탐내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세 종족이 여러 번 혈아정을 거둘 시도를 했지만 늘 실패로 돌아갔지요. 그리하여 두 도우님의 힘을 빌려 혈아정을 찾고 싶을 뿐이지 절대 악의를 품은 건 아닙니다.”

구원이 숨김없이 그대로 말해주었다.

구원은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석목이 짓는 표정을 살폈는데 그가 화를 내지 않자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그렇군요. 그러나 이렇게 일을 숨기는 건 이번뿐입니다. 또 이렇게 진실을 숨기다가 들킨다면 그때는 이렇게 쉽게 지나가지 않을 테니.”

석목이 싸늘하게 말했다.

“도우님, 걱정하지 마세요. 맹세합니다. 더는 숨기는 것이 없습니다.”

구원을 비롯한 족장들이 다급하게 답했다.

“그럼 다행입니다. 가죠.”

석목이 코웃음을 치며 노란빛으로 변하여 혈원경의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혈아정을 가지려면 세 종족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묘공은 석목을 한 번 쳐다보고는 금빛을 드리우며 석목을 따라갔다.

세 종족 사람들도 다급하게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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