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7화. 이 층과 영독갈(影毒蠍)
“석 도우님, 혈아정을 찾고 싶은 건 이해합니다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요. 당장 구수도철을 찾아야겠습니다.”
묘공이 석목에게 전음을 보내며 말했다.
“묘공 도우님, 걱정하지 마시죠. 무엇이 시급한 일인지는 잘 압니다. 구수도철을 해치우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 혈아정을 찾을 생각이에요.”
석목이 전음을 보내며 말했다.
묘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구수도철이 있는 위치를 확인했습니까?”
석목이 다시 전음을 보내며 물었다.
묘공은 안색이 어두워지면서 한참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들어와서부터 구수도철이 있을 만한 위치를 찾았습니다. 이 공간에 있는 건 확실하지만 알 수 없는 힘이 수색을 방해하고 있어서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죠. 그러나 앞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묘공이 대답했다.
위치를 대충이나마 알아도 구수도철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구수도철은 왜 이곳으로 왔을까요? 혹시 혈아정으로 경계를 돌파하려는 걸까요?”
석목이 다시 물었다.
“아니겠죠. 구원이 한 말대로라면 혈아정은 신경에게만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구수도철은 이미 진극지구(眞極之軀)에 올라 혈아정이 필요 없을 겁니다. 아마 혈원경에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그 짐승을 이곳으로 끌어들였겠죠”
묘공이 대답했다.
“어찌 됐든 절대 구수도철이 원하는 바가 이뤄져서는 안 되니 박차를 가합시다.”
석목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석목이 손을 흔들어 노란빛으로 백 장 범위 안쪽에 있던 세 종족 사람들을 감쌌다. 그러자 사람들이 날아가는 속도는 두 배 정도 더 빨라졌다.
묘공도 발에 힘을 주면서 속도를 가했다.
구원을 비롯한 이들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더 빠르게 뒤로 밀려가면서 시야가 희미해졌으나 육신이 단단한 힘에 감겨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곤상과 나소는 서로 마주 보다가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석목이 손을 대충 휘둘러 모든 사람을 감쌌는데 세 종족 사람들이 이유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석목이 갖춘 법력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 * *
이 층인 혈원경도 매우 넓어 석목과 묘공은 반시진이나 날았지만 주변 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늘어선 비경은 끝도 보이지 않았다.
혈원경은 평원이었으며 언덕이 거의 없이 땅에 이끼 같은 식물들만 자라나 있었다.
이 붉은 이끼 말고는 아무런 생물도 없었기에 매우 황폐해보였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석목이 생각했던 바와 매우 달라 눈살을 찌푸렸다.
“혈원경은 만령경보다 훨씬 광활합니다. 우리 세 종족은 아직 이곳을 전부 돌아보지 못했죠. 그러나 우리가 일전에 탐색한 바에 따르면 혈원경은 총 세 층으로 나뉘며 우리는 아직 일 층에 있죠. 여긴 아주 서늘한 곳이에요.”
구원은 석목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가와서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 층이요? 어떻게 나뉜 세 층입니까?”
석목이 멈칫하다가 물었다.
“앞쪽은 일 층의 끝입니다. 그곳에 가보시면 알게 되실겁니다.”
구원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 줄을 몰라서 주변 구역을 둘러보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석목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앞으로 날아갔다.
쾅!
이때, 붉은 안개가 들끓기 시작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처음에는 낮은 소리였는데 잠깐 사이에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로 커졌다.
주변에 피어나던 혈무 뿐만 아니라 하늘에 뜬 붉은 구름도 흔들리면서 혈무와 연결되어 일행들을 짓눌렀다.
붉은 구름은 처음에는 서서히 다가오다가 눈 깜짝할 사이 파도를 이루며 밀물처럼 밀려왔다.
붉은 파도가 다가오기도 전에 막강한 힘이 먼저 전해졌다.
석목과 묘공은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특히 석목은 세 종족을 이끌고 있어 조금 더 버거운 것 같았다.
“큰일입니다. 무조(*霧潮: 안개 밀물)예요! 석목 도우, 혈원경 일 층에서 흔히 나타나는 천재지변인데 아주 막강하죠. 일 층이 허허벌판인 이유도 이 무조 때문입니다.”
구원이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법결을 날렸다.
세 종족을 드리우고 있던 노란빛이 더 짙어지면서 들끓기 시작하던 순간, 노란빛은 거북이 등껍질 모양 노란 방패로 변하였다.
석목이 모든 준비를 마치는 순간, 붉은 무조가 석목과 묘공을 묻어버렸다.
막강한 힘이 무조에서 흘러나왔는데 마치 파도가 기승을 부리는 바다 위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석목은 노란빛을 반짝이며 밀려오는 힘을 밀어냈다.
세 종족을 드리운 노란 방패는 매우 단단해 살짝 떨리기만 했다.
묘공도 금빛을 반짝이며 가볍게 무조로부터 받은 충격을 밀어냈다.
일행은 계속해서 무조 속에서 빠르게 앞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일각 정도 더 날다가 석목이 갑자기 멈춰 섰다.
혈무가 계속해서 기승을 부렸지만 석목은 혈무를 뚫고서 앞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순간, 앞에 있던 땅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심연으로 빠져버렸다.
“여기가 일 층의 끝입니까?”
석목은 고개를 돌려 구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아래 쪽은 이 층입니다.”
구원이 대답했다.
석목은 머리를 끄덕이며 묘공과 함께 아래로 날아갔다.
* * *
무조는 일 층에만 흐르는 것 같아 이 층으로 날아 들어가는 순간, 무조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다시금 고요해졌다.
어두컴컴한 구역에서 옅은 붉은빛이 간간이 번쩍이는 것이 마치 검은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반딧불과 같아 아주 미약한 불빛이었지만 앞쪽을 비추기에는 충분했다.
일행들이 빠르게 내려가자 뒤편에 자리한 일 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한참을 더 내려갔지만 바닥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에 뜬 붉은 반딧불은 점점 더 많아졌고, 빛도 더 밝아졌다.
석목은 노란빛을 짙게 뿜어내면서 속도를 더했다.
잠시 후에 끝없는 검은 숲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활기를 띤 숲에는 기이할 정도로 높고 몇 장 정도로 굵은 나무들이 수도 없이 자라나 있었다.
나무는 대체로 검은색을 띠고 있었고, 검은 안개를 내뿜었다. 그러자 검은 안개가 숲을 어두컴컴하게 만들어 요수들이 숲 곳곳에 숨은 채 나뭇가지 사이로 허공에 떠 있는 석목 일행을 바라보았다.
요수들의 몸은 전부 검은색이었고, 액체 같은 빛이 흘러 다녀 매우 기이했다.
“여긴 혈원경의 이 층입니다. 곳곳이 검은 숲이지요. 숲속에 사는 요수들은 이곳에만 사는 영수들인데 실력이 아주 막강합니다. 아직은 외곽이지만 깊은 숲에는 신경 영수들도 수두룩하죠. 심지어 신경 중기나 후기 영수들도 있어요.”
구원이 설명해주었다.
석목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는 눈에 빛을 깜빡이며 숲속에 사는 검은 요수들을 바라보았다.
요수라고 해봤자 어둠 속성의 힘을 다스릴 수 있는 조금 특별한 요수일 뿐이지 엄청나게 뛰어난 실력을 갖춘 건 아닌 것 같았다.
석목이 다시 신식을 넓게 펼쳤다.
순간, 이 층에 자리한 어두운 숲속에 공간의 힘이 떠다녀 엄청난 힘으로 신식을 밀어내 석목은 안색이 살짝 변했다.
석목의 신식으로도 천 리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
“혈원경에서는 흔한 현상이죠. 허공에 공간을 속박하는 힘이 감돌아 신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깊이 들어갈수록 밀어내는 힘이 더 강해지죠.”
구원은 석목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했다.
신식의 힘을 펼칠 수 없다면 일이 많이 번거로워질 터라 석목은 안색이 살짝 굳었다.
일 층에서도 신식을 펼치기가 조금 어렵다고 느껴질 정도였는데 이 층은 밀어내는 힘이 더욱 막강했다.
석목은 신식을 거두어들이고는 눈에 금빛을 뿜었다.
신식을 쓸 수 없으니 영목신통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나 영목신통을 시전하던 석목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숲에서 떠다니던 검은 안개는 영목신통에도 영향을 미쳐 석목은 영목신통으로 이삼 천 리 정도까지 밖에 볼 수 없어 신식을 드리울 때와 그리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석목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가죠.”
석목이 말을 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세 종족을 감쌌던 보호막이 부서졌다가 다시 노란빛으로 변하여 더욱 단단하게 뭉치더니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날아갔다.
이 층은 일 층보다 차가운 기운이 더욱 짙게 감돌았다.
오래 날면 검은 얼음이 한 층 깔려 차가운 기운이 몸으로 스며들었다.
석목은 보호막에 감도는 빛을 더 짙게 만들어 한기를 밀어냈다.
이때, 아래쪽 숲에서 두 마리 고양이 요수가 나타났는데 각각 몸집이 소만 한 게 두 눈에 붉은빛을 띠고 있는 모습이 지능이 높지 않은 요수인 것 같았다. 그렇게 고양이 요수들은 석목 일행을 덮쳤다.
고양이 요수는 실력이 천위 정상이었고, 속도가 꽤 빨라 마치 그림자 두 갈래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무리 앞에 나타나 고만족 둘을 물었다.
그러자 구원이 콧방귀를 뀌면서 입으로 푸른빛을 날려 고양이 요수들의 몸을 한 바퀴씩 감았다.
고양이 요수들은 몸통이 두 덩이로 갈라지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어 시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석목은 고양이 요수들의 시체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일행들은 잔영을 그리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날아갔다.
커다란 나무 옆에 놓인 길쭉한 돌에서 파동이 일면서 순식간에 회색 옷을 입은 여인으로 변하였고, 여인은 납작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대충 붙어있어 용모가 매우 추악했다.
여인은 석목 일행을 바라보며 일그러진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검은 나방으로 변하여 앞으로 날아갔으나 석목 일행이 날아가는 방향과는 조금 달랐다.
* * *
석목과 묘공은 빠르게 수십만 리를 날았지만 검은 숲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혈원경은 매우 넓었다.
묘공은 날아가면서 원판 법보를 띄워 법결을 날렸다.
원판에 달린 시침이 가볍게 흔들리면서 시종일관 한 방향만을 가리켰다.
“그 흉물은 지금 삼 층에 있는 것 같군요.”
석목이 원판을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네, 속도를 더 냅시다. 점점 더 불안해지는군요.”
묘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에 싸늘한 빛을 비쳤다.
석목도 기분이 찜찜했기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이제 막 속도를 더하려 할 때, 석목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앞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노란빛을 거두어들이며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묘공도 금빛을 번쩍이며 날아가는 속도를 줄였다.
앞쪽에서 바람 소리가 들려오더니 갑자기 수많은 보랏빛 점이 나타나 빠르게 몰려왔다.
보랏빛 점은 촘촘하게 날아오며 앞길을 막았다.
“이건…… 영독갈!”
보랏빛 점을 본 구원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보랏빛 점은 전부 검은 전갈이었는데 커다란 집게발이 두 개 자라나 있었고, 꼬리는 마치 철로 만든 채찍과도 같았다. 그리고 꼬리의 끝에는 싸늘한 빛을 번쩍이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바로 맹독이었다.
보랏빛 점은 꼬리 끝에서 흘러나온 빛이었다.
보통 전갈은 다리가 여덟 개인데 앞에서 날아오는 전갈은 다리가 촘촘해 개수를 셀 수도 없었다.
전갈들을 본 세 종족 사람들은 안색이 굳어버렸다.
“영독갈!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구원이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영독갈은 실력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으나 꼬리에 맹독이 있는 벌레라 부식시키는 힘을 지녔고, 언제나 떼로 몰려다녀 이 층에 자리한 숲에서도 가장 다루기 힘든 요수들이었다. 때문에 신경 요수라도 함부로 영독갈들을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통은 수천 마리에서 많아야 만 마리씩 몰려다니는데 눈앞에 나타난 영독갈 무리는 적어도 수십만 마리나 되는 것 같았다.